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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를 믿는가?

날짜 : 2012.10.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는 교회를 믿는가?
성경본문 : 마태복음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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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찬양대에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여자대원이 있었습니다. 몇몇 대원들이 그분에게 다른 곳에서 봉사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암시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찬양대에 출석했습니다. 찬양대 대장은 절박한 마음으로 담임목사에게 찾아 갔습니다.
“목사님, 그 대원을 찬양대에서 그만 두게 해야 합니다. 만일 목사님이 그 사람을 찬양대에서 축출하지 못하면 나는 사직합니다. 다른 찬양대원들도 역시 그만 둘 거예요. 제발 처리해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은 문제의 찬양대원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찬양대를 떠나야 할 것 같소.”
“왜 내가 찬양대에서 나가야 합니까?” 하고 목사님에게 항의하듯 말합니다.
“글쎄요, 대여섯 명의 대원들이 나에게 당신은 노래를 할 줄 모른다고 하네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요. 하고 그 찬양대원은 코웃음을 칩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50명이나 목사님이 설교를 할 줄 모른다고 나에게 말했는데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주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노래를 못한다고 그만두라고 제가 말한 적도 없고, 더 감사한 것은 그런 부탁은 한 번도 받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부탁은 안 받을 줄 압니다.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구나를 다시 한 번 실감케 되었습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종교개혁’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잘못 사용될 때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하지만 바르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한편 바르게 개혁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은 아닐 줄 압니다.
노래를 못한다고 찬양대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바른 개혁일까요? 반듯이 그렇지는 아닐 줄 압니다. 그러나 개혁 무드가 생기면 닥치는 대로 바꾸는 우를 종종 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 개혁의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변하지 않는 기준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짧지만 두 내용이 묘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죄와 교회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종교개혁의 첫 번째 원칙은 죄가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가 죄를 범하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상대방에게 권고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번에 저희 장모님이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만, 장모님을 제가 무척 존경합니다. 저희 장모님은 이웃이 죄를 범하면 꼭 가서 권고하십니다.
이번 장모님 빈소에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는데, 5일장이었는데 어떤 분들은 이틀 사흘을 와 계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들은 대개 장모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신 분들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입니다.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죄에서 돌아 온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는 물론이지만 장모님에게도 귀한 선물이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집고 넘어 갈 것은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은사는 부족해도 열심히 교회 일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반대로 은사가 넘치는데 섬기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여튼 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예수님은 죄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실 수밖에 당신이 피를 흘려 깨끗하게 한 교회가 다시 죄에 물드는 것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조용히 하는 충고를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 죄에서 돌아서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많은 경우 돌아오겠죠. 그러나 더 완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17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결국 교회에 공개적으로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누가 잘못하면 먼저 개별적으로 충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두세 증인을 모아 가지고 충고 해야지,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공개적으로 고발하여야지….”

제자들은 이제 개혁의 의지로 자못 굳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보면 개혁가들이었습니다. 무엇인가 개혁을 원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개혁가라고 믿고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개혁되기를 이스라엘 종교가 개혁되기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들의 원래 꿈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개혁을 말씀하시니 많이 흥분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의 시작은 개인이요, 두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와 함께 개혁의 의지를 펼쳐갈 두 세 사람을 금방 머리에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세 사람만 있으면 교회개혁이 이루어질 확신이 더해졌습니다.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흥분된 얼굴을 보고 계셨던지 예수님은 갑자기 말을 돌리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제자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깨끗하게 하게 하시길 원하시는 듯 말씀하셨고 그 일을 잘하라고 부탁하는 듯 하셨는데 난데없이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듣기는 좋아 보이지만 제자들은 좀 어리둥절 해합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을 하실 때는 이런 표현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조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제자들은 더 어리둥절해지지만 이제 감을 잡기 시작합니다. 두세 사람을 통해서 하는 일이 개혁이지만 그러나 두 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개혁을 넘어 더 큰 일들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잘 못한 사람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더 큰일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조금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감이 잡혀 감을 아셨던지 주님께서 펀치라인을 날리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제자들은 이웃을 정죄하기 위하여 교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두 세 사람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두 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생각을 원하십니다. 아니 발전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이웃의 죄를 정죄하는 것으로만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웃의 죄를 해결하는데 귀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래 두 세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기 원하시는 놀라운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시간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개혁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종교개혁의 기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무명의 목사이었을 때 그가 졸업한 Crozer 신학교에서 Social Philosophy를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가 1961-1962년이었습니다. 수강생은 8명 그 중 남학생은 6명 여학생은 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 한 클래스만 가르쳤습니다. 곧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공식적은 제자는 8명뿐입니다. 만일 이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나중에 어떻게 될것을 알았더라면 이처럼 적은 숫자의 학생이 그 클래스를 등록했을까요?
이 8명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마틴 루터 킹의 제자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클래스의 syllabus(교과 안내서)를 소장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큰 값어치가 있을까요? 요즘 킹 목사님이 서명한 영수증의 값어치가 무려 $10,000이라고 합니다. 제 지갑에도 서명한 영수증이 좀 있습니다만…, 여러분도 영수증 잘 보관하세요.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압니까? 한편 킹 목사님이 두 차례 paper숙제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8명이 두 번 페이퍼를 낸 것입니다. 그러니 총 16개의 페이퍼가 쓰였습니다. 16개의 페이퍼 중에 단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한 시가는 엄청나지 않을까요?
한편 이들은 요즘도 계속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네가 유일한 제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때를 아쉬워하지 않을까요? 킹 목사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걸, syllabus를 잘 보관할 걸, 페이퍼를 왜 버렸지…? 그런데 이들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 때 함께 신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 강의만 들었어도 영원한 킹 목사의 제자가 되는데 말입니다.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그들은 놓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들이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놓친 것일까요? 킹 목사님의 클래스에는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바로 옆방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였더라면 그 곳이 더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교우 여러분, 참 종교개혁은 킹 목사님의 클래스보다 예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 더 위대한 역사적 현장임을 믿는데서 시작됩니다. 두 세 사람들이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위대합니다. 이 교회의 위대함을 믿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교우 여러분,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믿을 때 우리는 참 교인이 됩니다. 교회를 믿지 않고 교회를 개혁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를 믿는 순간 교회는 개혁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지 개혁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니 믿음으로만 개혁이 되는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닐까요?
교회가 믿음의 대상인줄 너무도 잘 알았던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23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를 통해서만이 세상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누리게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만나는 것이 없으면 세상은 충만함을 잃어 간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를 충만케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두 세 사람이 만나는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충만케 하십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 대해서 비판의 물결은 그 어느 때 보다 거세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정말로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참 개혁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한국 교회를 믿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만 비판한다면 참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형화된 한국 교회를 믿어야 합니다. 대형화 그 자체를 우상화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지금도 두 세 사람이 겸손히 모이는 많은 무리가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대형 교회 안에 있는 교인 한 사람을 믿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많은 모순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줄 압니다. 그 때 우리 자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변할 것입니다. 반면 작은 이민 교회를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이민 교회도 두 세 사람이 모이고 있습니다. 곧 주님이 함께 하시는 위대한 공동체입니다.

교우 여러분, 보스톤한인교회를 믿으십시오. 한편 보스턴 지역에 많은 한인교회들이 있습니다. 모든 교회를 다 믿으십시오. 아니 한인 교회 뿐 아닙니다. 백인교회 흑인 교회 히스패닉교회 모든 교회를 믿으십시오. 이 교회들을 통해서 지금도 만물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여러분은 진정한 교회 개혁에 동참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몸임을 믿는 것입니다. 곧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 모든 세상의 열쇠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뿐 아니라, 세상을 충만케 하는 열쇠,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충만케 하는 열쇠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잘 아시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한 천사가 와서 묻습니다. “그렇게 크고 위대한 일을 마치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위대한 일을 누가 이어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열 두 제자를 세상에 남겨 놓았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 두 제자도 얼마 후 모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제 천사가 예수님께 묻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고 있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믿지 않으십시다. 반면 두 세 사람이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를 감히 교회라고 부르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참 종교개혁에 동참하십시다. 만물이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케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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