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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날짜 : 2012.09.09
예배명 :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두 사람
성경본문 : 사무엘상 18:1-5, 20:17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0909.wmv

한국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1987년 2월 12일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간 한 남자가 실종됐습니다. 나이는 19살, 이름은 ‘임미남’. 하루 밤을 뜬 눈으로 새우며 아들을 기다렸던 어머니에게 한 경찰관이 찾아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아들을 교통 사고로 잃은 어머니는 큰 슬픔 가운데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 후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12년 5월 4일, 세상을 떠난 임미남씨 누나 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경찰로부터 온 전화입니다. 임미남씨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임미남 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당황한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끝내 DNA검사 결과 아들로 판명이 났습니다. 25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이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교통사고 후 병원에서는 수술 끝에 겨우 살렸지만 남자의 신원을 찾을 수 없어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정신병원 기록에는 미남씨가 계속 자신의 주소를 말하며 가족을 찾아 달라고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임미남씨는 매일 “나는 임미남, 주소는 강남구 논현동, 어느 중학교를 나왔습니다.” 말했지만 누구도 찾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간호사는 정신병자로 인식하고 자기 할 일만 했고 구청 공무원은 그의 신원을 찾아 놓고도 자기 담당이 아니라고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회복지사에게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 내가 한번 알아볼게요!”하고 친절히 대답한 사람이 없었기에 19세에서 44세가 되기까지 정신병자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친절한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합니다. 임미남씨는 정신병원에 있었기에 25년이라는 세월이 낭비된 것이 밝혀졌지만, 어떻게 보면 많은 경우 정상인으로 살지만 이웃의 냉대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정신병원에서 평생 사는 사람들이 무지기수가 아닐까 생각해 볼만 합니다. 멀쩡하게 살아가지만 각자의 세계가 온전히 펼쳐지지 못한 채 산다면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정신병원이 아닐까요? 임미남씨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보이지 않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앞으로 갇힐지도 모릅니다.
한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뒤돌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귀한 삶이 낭비되지 않고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명실 공히 최고의 삶을 산 사람 중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실 지난주에 최고의 삶을 사는 첫 번째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을 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문적인 군인 골리앗을 무찌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늘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보스턴을 찾아오신 교우님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시는 모든 일에서 놀라운 확신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놀라운 확신 하나만 있으면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을 받쳐주는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두 번째 요소를 찾아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주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장면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 그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부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전 구절입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냐?” 다윗이 대답합니다.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그 다음 18:1절이 오늘 본문 말씀 첫 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두 번째는 바로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우정이었습니다. 요나단과의 우정이 다윗을 최고의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 이들의 우정은 어떤 우정이었나요? 3, 4절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실 다윗이 골리앗 장군과 싸우려고 나갈 때 사울 왕이 자기의 군복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너무 커서 사울왕의 군복을 벗고 그냥 나갑니다. 이제 골리앗을 무찌른 후에는 새로운 선물을 받습니다. 그 선물은 요나단의 군복입니다. 다윗에게 꼭 맞았나 봅니다. 자기의 군복을 준다는 것은 최고의 우정의 표현일 줄 압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준 군복을 입을 때마다, 요나단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특히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의 눈길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봉독해 드립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은 마음의 문 아닙니까? 곧 두 사람의 눈은 깊은 우정의 탄생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곧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8:6절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는데 여인들이 나와 춤추며 노래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노래를 듣고 사울 왕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에 대한 시기에서 입니다. 여러 차례 죽이려 합니다.
이제 요나단은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선택은 자명합니다. 20:17절 말씀입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당연히 요나단의 바람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요나단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도망가는 것을 돕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후로 요나단이 다윗을 또 만났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못 만난 것 같습니다. 반면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줄곧 도망 다닙니다. 그러나 그는 요나단이 준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도망 다니던 중 다윗은 비보를 듣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 왕과 요나단이 함께 전사한 소식을 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애통의 노래를 부릅니다. 사무엘하 1:25절 이하입니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음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그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열두지파를 통일시키고 위대한 왕국을 건설합니다.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시편에 수많은 시를 짓는 최고의 음악가요 예술가요 신앙인이 됩니다.

이상으로 다윗의 삶을 정리해 보면, 다윗의 삶에 가장 큰 도전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골리앗, 두 번째는 사울 왕이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골리앗을 무찔렀고, 요나단의 우정의 힘으로 사울왕의 도전을 견디어냈습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밖으로부터 오는 위험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능히 이겨냈습니다. 안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은 친구를 통해 이겨냈습니다. 곧 다윗은 하나님을 첫 번째 환경으로 삼았고 두 번째 환경으로 요나단의 우정을 삼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환경 안에 사는 다윗에게 남은 것은 매일 매일 위대한 승리의 길만 남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늘 이 두 가지 도전이 있지 않습니까? 골리앗처럼 밖에서 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안에서 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깊은 우정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요즘은 어떻게 요나단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래야 내가 다윗이 될 수 있는데요. 친구를 사귀려고 해도 사귈만한 사람이 없는데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풀어보기 위해서 잠시 한글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이번 설교준비를 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미 깨닫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한글로 ‘나’와 ‘너’, 아니면 ‘너’와 ‘나’가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잠시 한글 공부 좀 할까요? 오랜만에 스크린을 사용해 보겠습니다.

(1번 스크린)
보시다시피 ‘너’와 ‘나’입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자주 써서 무심코 지내왔는데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음을 뒤집어 보면 ‘너’가 ‘나’가 되고, ‘나’가 ‘너’가 됩니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스크린 까지 띄우며 난리를 피시나” 생각하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영어로 한번 볼까요?

(2번 스크린)
‘You’ &‘I’ 아무리 궁리를 해도 연결이 안 됩니다.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너’와 ‘나’는 정말로 관계가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영어만 그럴까요? 독일어로 한번 볼까요?

(3번 스크린)
‘Sie’ &‘Ich’ 이것도 전혀 연관성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어로 한번 볼까요?

(4번 스크린: 你 &自)
앞이 ‘니’라고 발음하는데 바로 ‘너’이고 뒤가 ‘나’라는 의미를 지닌 ‘자’입니다. 중국어로도 전혀 관계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글을 볼까요?

(1번 스크린) ‘너’와 ‘나’는 하나입니다. 그냥 그 안에서 모음만 바뀌었지 본질적으로는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저는 이번 설교준비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목회하다 보니 영어책을 훨씬 많이 접하다가 최근에 한국 출판계가 발전하면서 요즘에는 한국어로 된 책들을 많이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정신과 전문의가 쓴 ‘너’라는 책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최근에 발견된 ‘거울 신경 세포’를 소개합니다. 이 거울 신경 세포’의 발견은 DNA발견과 맞먹는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요즘 모든 과학, 내지 세상은 DNA가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 소개한 임미남씨가 가족을 찾을수 있었던 것도 DNA검사 덕분이었습니다.
하여튼 ‘거울 신경 세포’란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면 보는 사람의 두뇌에도 똑같이 뇌신경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물론 보는 사람은 하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골프를 잘 치려면 골프 잘 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계속 봐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직 자기는 그처럼 하지는 못하지만 잘 치는 골퍼들의 폼을 볼 때 자기의 뇌에도 그처럼 자극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곧 ‘너’의 행동이 바로 ‘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도 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을 보느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바로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책을 덮어 놓았는데 갑자기 ‘너’라는 단어가 그제야 눈에 들어 왔습니다. 모음을 바꿨더니 바로 ‘나’가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큰 업적을 다시 한 번 느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무찌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기적인 인물이 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다윗을 괴롭히는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을 세우십니다. 요나단을 통해서 참 자신을 보게 합니다. 물론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먼저 사랑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먼저 사랑한 것은 요나단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눈빛을 보고 다윗도 같은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곧 다윗이 요나단이었고 요나단이 다윗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우정이었고 이 우정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새롭게 탄생시킨 것입니다.

곧 우리는 요나단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요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은 저절로 다윗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이 또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너’가 ‘나’이고 ‘나’가 ‘너’이기 때문입니다. ‘너’가 바로 ‘나’의 환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너’의 환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국가를 탄생시킨 것은 다윗이 아닙니다. 요나단과 다윗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명단에는 요나단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역사를 아는 자들이라면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공은 다윗 혼자가 아닙니다. 요나단과 다윗입니다.

제가 새교우반 교우님들에게 항상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DNA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DNA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Watson 과 Crick입니다. 이들이 DNA를 발견하게 된 경위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서로 머리에서 생각나는 것은 하나도 거르지 말고 다 이야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머리에서 생각이 나도 스스로 점검한 후에 좀 엉뚱한 것 같으면 그냥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체면 문화에 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 둘은 달랐습니다. 서로 모든 것을 내어 놓자고 했습니다. 그 결과 세기를 뒤바꾸는 발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머리가 나빠서 역사의 큰 공헌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똑똑해서 못합니다. 너무 똑똑해서 혼자 하려다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임미선씨에게 친절한 이웃이 없었기에 그는 25년을 헛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친구와 더불어 25년을 멋지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똑똑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보스턴에서 정말로 크게 사회에 공헌할 사람은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의 출세와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치는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유는 ‘너’라는 거울의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라는 거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새 역사를 펼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너’라는 아름다운 거울 앞에 늘 서기를 즐겨하십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다윗의 후예들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이라는 거울 앞에 늘 섰습니다. 요나단의 군복을 입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냉장고 권리’라는 말을 어떤 학자가 만들어 냈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서 마음 놓고 주인에게 허락 안 받고 냉장고를 열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숫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깊이가 측정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냉장고를 허락 없이 열수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냉장고를 허락 없이 열수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은 함께 냉장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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