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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는 경이로우니

날짜 : 2012.08.1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떠나는 자는 경이로우니
성경본문 : 신명기 16장 13-17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0819.wmv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토록 위대한 소설가가 되게 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였습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이상적 사회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그룹의 모임에 참여했다가 체포됩니다. 사형선고까지 받습니다. 사실 정부는 그들을 사형집행하는 척하다가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이들은 이것을 알리가 없었습니다. 후에 그 때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28살입니다.
“인생은 5분의 연속이다. 사형수의 몸이 되어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28년을 살아오면서 5분이 이처럼 소중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옆에 있는 사형수에게 한마디씩 작별 인사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을 정리해 보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둘러보는 데 쓰기로 작정했다.
“눈에 고인 눈물을 삼키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들을 잠깐 생각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난 28년이란 세월을 아껴쓰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는 사형장을 살아 나온 후 이처럼 사형전 5분에 대해 글을 쓴 것입니다. 5분의 소중함을 경험한 그는 세기적인 소설가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때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또 함께 사형장에서 사면을 받은 모두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위대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의 공포와 충격으로 백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최고의 소설가가 되어 갑니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니까 그와 같은 사형의 공포를 이겨내고 도리어 그것을 멋진 소설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백발이 되고도 남을줄 압니다.
그러면 보통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위대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을까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못 되어도 그래도 한 평생을 자랑스럽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삶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열어 놓으신 위대한 삶으로 가는 길이 소개되어져 있다고 생각 됩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이스라엘 민족의 세 절기가 나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 무교절은 유월절이라고 생각해도 되고요, 칠칠절은 잘 아시는 오순절입니다, 그리고 초막절 세 절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신명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꿈을 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아라 명령하신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명령하십니까? 한 마디로 위대한 삶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신명기에 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오늘 봉독해 드린 바로 이 명령입니다. 곧 가나안 땅에서 살 때 세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교우님들께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형선고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매년 세 절기를 지키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대한 민족이 되게 하시려고 바로 이 명령을 하셨습니다. ‘세 절기를 지켜라.’

그렇다면 대수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정 구정 추석을 잘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세 절기와 위대한 삶이 관계가 있을까요? 좀 의아한 생각이 들게도 될줄 압니다. 그러면 16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곧 모든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왔어야 했습니다. 일년에 세 번. 일년에 세 번 어떻게 보면 쉬어 보이죠. 그러나 이때는 요즘처럼 차가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나 걸어가야 합니다. 걸어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위험도 위험이지만 많은 여비가 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위험도 여비도 문제가 안 될 수가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실 절기도 하루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7일간 지켰습니다. 곧 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열심히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 축제를 지키고 집으로 돌아오면 잠시 후 또 오순절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또 다시 축제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잠시 후 또 장막절이 돌아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이처럼 첫 해 세 절기를 지켰다고 가정합시다. 세 절기를 보낸 후 이스라엘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보스톤에서 일년에 세번씩 한국을 오가야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국에 가서 일주일만 지내고 옵니다. 일년을 그렇게 지내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물론 그것도 비지니스가 있어서 한국만 다녀오면 돈이 생긴다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국 다녀오면 돈만 더 드는 경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사용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남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일년에 세차례 축제를 보내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광야 40년과 별로 큰 차이를 못 느꼈을 줄 압니다. 물론 광야 생활에 비하면 양반이죠.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정착민으로서 즐거운 삶을 살게 될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세 절기를 지키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쯤이야 문제없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1년을 지내다 보니 장난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 오면 또 가야 하고 또 돌아 오면 또 가야하고 또 가야하고…. 첫해만 가면 됩니까? 다음 해가 오면 똑 같이 다시 가고 또 가고 또 가야합니다. 이들은 즐겁게 갔을까요?
처음에는 좋았겠죠. 그러나 이들은 곧 불평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나 다름이 없네. 광야 생활에서도 늘 떠돌아 다녔는데, 여기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떠나야 하니 말일세.”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돈 버는 일을 쉬고 떠나기가 싫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어서 싫어했습니다. 한편 “설마 그랬을까? 하나님의 말씀인데 기쁨으로 지켰겠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열왕기하 23:21-23절 말씀을 보면 이들이 어떠했었을까 실마리를 잡을수 있습니다. 요시아 왕 시절 궁전에서 율법책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사실 유월절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다른 절기는 잘 지켜졌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키라는 이 세 절기는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곧 이들은 떠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집을 떠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민족이 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대한 민족이 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길은 사형틀에 잠시 서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비해서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일 년에 세 번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 년에 세 번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나요? 떠나길 거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성경 곳곳을 보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남의 사람이 되게 하시길 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떠나는 자들에게 나타나시곤 하셨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난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 11장 마지막을 보면 이미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떠나라고 12:1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도 매한 가지입니다. 모세도 애굽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광야로 떠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가시덤불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떠난 자들에게 나타나시곤 하셨습니다.

저도 저의 개인적 신앙이 굳게 자리를 잡게 된 때는 군에 있을 때였습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 군의관 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전 5분간을 그토록 귀중하게 여겼다면 저는 군대 3년의 시간을 귀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저의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시간들은 떠나 있었던 시간들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집을 떠나 잠시 유학이나 연수와 계신 분들이 많으신데, 너무도 소중한 시간을 보내시고 계십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1년 1년을 귀중한 시간으로 보내게 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삶을 정착민이지만 유목민처럼 살게 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집을 떠난 자들과 하나님은 언제나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크 아탈리라는 불란서의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멋진 표현을 합니다.
“떠나는 자는 경이로우니….”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는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은 정착민이면서 유목민이고 유목민이면서 정착민인 사람이다.”
그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정착민과 유목민을 다음과 같이 비교합니다.
“노마드들은 그 때 중요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불, 사냥, 언어, 농경, 목축, 신발, 옷, 연장, 제식, 예술, 그림, 조각, 음악, 계산, 바퀴, 글씨, 법, 시장, 세라믹, 야금술, 승마, 배의 키, 항해, 신, 민주주의가 그것들이다. 미래의 정착민들이 발명하도록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국가, 세금, 감옥, 저축, 총, 대포화약 들이었는데, 맨 먼저 그런 발명이 이루어진 곳은 로마였다.”
그러기에 그는 이상적인 인간을 정착민이면서 유목민인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신 것 아니었겠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정착민이지만 유목민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세 차례 순례의 길을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물론 말씀드린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것을 잘 안 지켰죠. 경이로운 민족이 되길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갑니다. 스스로 유목민 되는 길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민족을 강제로 유목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강제로 경이로운 민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곧 경이로운 민족이 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인 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강제적인 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길을 원하시겠습니까? 오늘 콜롬비아 선교단의 보고를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자발적으로 경이로운 삶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년부터 저희 교회에 두 가지 선교 프로그램을 허락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해외선교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자발적인 유목민의 삶을 누릴수 있습니다. 토요일 아침마다 청년들이 homeless를 찾아가 맛있는 샌드위치를 나눕니다. 이것도 자발적인 유목민의 삶을 누리는 한 방법일줄 압니다.
이번 주말은 전교인 수양회를 갖습니다. 수양회를 갖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떠남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떠나는 그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수양회에 가서 무엇을 얻어 가지고 오려는 마음으로 참여하시는 분들도 간혹 있는줄 압니다. 좋습니다. 무엇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오시는 것 참 귀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미 떠남의 축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떠남은 무작정의 떠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의 택하신 곳 곧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명령을 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떠날 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아울러 도중에 함께 하나님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한 떠남은 하나님을 향한 떠남이요 이웃을 향한 떠남입니다. 곧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경이로운 삶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미국 사회에서 잘 정착해야 합니다. 하지만 최고의 삶은 정착민인 동시에 유목민이 되는 것입니다. 수시로 떠날줄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늘 하나님을 만나며 삽니다. 이웃을 만나며 삽니다. 최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아니 경이로운 삶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마더 테레사의 유언입니다.
“나를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병원 구경도 못해보고 죽어가는데 나에 대한 간호가 어찌 이리 극진합니까?”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입니다. 수녀들이 기계 장치로 마더의 호흡을 되살려 보려는 찰나, 마더의 말에 응답하듯 전기 공급이 끊어졌습니다. 87년 동안의 이 땅 위에서의 떠남의 삶을 마치는 순간이었습니다. 1910년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늘 떠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경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떠남의 삶을 마치면서 멋진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나에 대한 간호가 어찌 이리 극진합니까?”
떠남의 삶을 살지 않고 이런 유언을 할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경이로운 삶을 살다가 이런 멋진 유언을 남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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