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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회중(II)

날짜 : 2012.07.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감사하는 회중(II)
성경본문 : 야고보서 3장 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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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 자기 수련의 한 훈련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피정이 있습니다. 한 피정지도자가 참여자들에게 지정된 방에 한 사람씩 들어가라고 지시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과 5분간 대화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연이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저 방에는 여러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 여러분이 가장 위해 주어야 함에도 학대했던 사람, 가장 사랑해 주어야 함에도 미워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5분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나오십시오.”
참여자 가운데 마흔이 넘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나름대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도대체 누가 방 안에 있길래 그러는 거야?’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얼마 후 꺼억 꺼억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 안에 누가 있었겠습니까? 방안엔 사람은 커녕 액자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대형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피정 지도자가 했던 말이 기억나면서 존재 깊이에서 이런 물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울에 비친 저 여자는 누구인가? 바로 내가 아닌가.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게 느꼈던 사람,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 나밖에는 나를 제대로 위해 줄 사람이 없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을 비하하며 살았던가?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해 주어야 함에도 얼마나 나를 싫어하고 있었던가? 도대체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며 살아왔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실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너무도 많이 자신을 괴롭히고 남용하고 무시하면서 살지 않았는지 자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이야기 보다 남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면서 자신을 무시했던 현대인들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한편 저는 이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남용하고 있는 부위는 무엇이겠나? 가장 잘 관리해야 하는데 가장 무관심하게 버려둔 부위는 무엇이겠나?”

야고보에게 이 질문을 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2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가장 무시받고 남용되는 부위는 우리들의 혀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혀가 가장 귀중한 부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혀를 잘 조정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혀가 하는 일이 너무도 많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너무 멋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편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인간의 지혜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말들을 순종하게 하려고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아주 지혜롭습니다. 말들을 콘트롤하는 아주 쉬운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혜롭게 말들을 잘 조정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인간은 모든 자연의 피조물을 능히 길들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8절 말씀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온갖 동물들은 길들여도 사람이 길들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혀입니다. 아무도 혀를 길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혀를 잘 길들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정말로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혀를 길들이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1절 말씀에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들여 지지 않은 혀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8절 하반절에 보면,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계속 악을 범하고 있고 독사의 독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혀가 독을 뿜어 내면 아예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난번 호주 세미나에서 한 목사님이 이민 목회 초기에 지은 시라고 하면서 다음의 시를 소개하셨습니다. 두 문단만 소개해 드립니다.

말(語)들의 잔치
말들이 판을 벌렸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입에서 이 입으로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어
거짓의 장단에 몸을 흔들며
말들이 춤을 춘다
………
말들이 칼춤을 추네
사울의 칼이 내 던져지고
이세벨의 독기가 품어 내지면서
사방에서 들리는 애통의 소리
오장육부를 찌르며
혀들이 피의 잔치를 연다

…………
호주에 와서 많은 말의 상처를 받은 후 지은 시라고 소개를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시에 큰 공감을 가지실줄 압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하죠. 우리 모두 말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혀가 뿜는 독으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물듯 하면서 아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민 목회 초기에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9, 10절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혀가 독만 뿜어 내면 짜르거나 재갈을 물리면 되는데 문제는 어떤 때는 찬송도 곧 잘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재갈만 물린다고 해도 상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요즘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샘이 무척 소중했습니다. 그런데 샘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단 물을 내는 샘이 있었고 쓴 물을 내는 샘이 있었습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단 물을 내는 샘은 언제나 단 물을 냅니다 쓴 물을 내는 샘은 언제나 쓴 물을 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샘입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샘은 괴상하다는 것입니다. 한 샘에서 단 물이 나왔다고 쓴 물이 나왔다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쓴 물이 나올 때는 확 틀어 막고 단 물이 나올 때만 열수 있을까요? 12 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한 마디로 짠 물을 내는 샘은 짠 물만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 물을 내는 샘은 단 물만 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죠? 이처럼 당연한 말씀을 왜 반복했을까요?
야고보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이기에 원하지 않는 말을 내뱉어 사랑하는 이웃에게 상처를 주곤 하지만 그것이 참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원래 자신의 참 모습은 단 물을 내는 샘이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신뿐이겠습니까? 이웃을 향해서도 이웃이 단 물을 내는 샘이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까 그 목사님께서 계속 목회를 힘차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 안에 단 물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류시화 시인의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이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이것이 단 물을 내는 샘의 모습이 아닐까요? 상대방 가슴 안에 있는 시를 듣고 아니 외우고 오랜 후 상대방이 그 시를 잊었을 때 외워 놓은 시를 들려주는 것이 바로 단 물을 내는 샘이 아닐까요?

얼마 전 TV를 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대학교 실험실에서 독사들의 독을 저장하고 있고 이 독사들의 독을 심장마비 약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독사의 독의 단백질 순서를 조금 바꾸면 심장병 치료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저는 독사를 왜 하나님께서 만드셨나 늘 궁금했는데 그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독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혀에도 독이 나옵니다. 그 독은 상처를 주죠. 그런데 그 독을 조금 변형시키면 놀라운 약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독을 변형시키는 묘약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들의 입에서 묘약도 나옵니다. 바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단물입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 물은 무엇입니까? 여러가지가 있을줄 압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입니다. 감사 앞에서는 어떠한 독도 치료제로 뒤바뀌지 않을까요? 성경은 늘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어떠한 독도 치료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감사가 소중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열등감을 연구한 한 학자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태어나서 5년 동안 하루 평균 431개의 부정적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431개. 예를 들어, “ 좀 조용히 못하겠니”, “이 어질러 놓은 것 좀 봐.” 결국 열등감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5살 이하의 어린이에게 누가 와서 ‘감사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태어나 줘서 감사하다” 이런 인사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에게 이런 감사해보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5살 이하에 감사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신 하루 431개의 부정적 메시지만 들었습니다. 교육 시킨답시고…. 그러니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자들의 입에서 독이 더 많이 나올 수 밖에…. 아마 그래서 성경은 더욱 우리들에게 감사를 강조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올 해 저희 교회 표어를 ‘감사하는 회중’으로 정했습니다. 작년까지 건축과 아울러 건축 후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세우느라 정신없이 수년간을 보냈습니다. 올 해는 차분한 마음으로 잊었던 감사의 제목을 다시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본연의 삶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신년 예배시 ‘감사하는 회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올 해도 반년이 지나고 7월도 네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남은 5개월 남짓 한 시간, 다시한번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니 올 해 특히 우리들의 삶의 샘에서 나와야 하는 단 물을 다시금 되찾는 남은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물론 감사는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만, 특히 올 해는 서로 서로 감사의 단 물을 선물로 나누는 시간들이 되길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항상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감사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감사가 어떻게 독을 치료제로 바꾸게 할 수 있을지 개념이 잘 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감사가 능력이 있는 이유는 주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지금도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곧 우리의 감사의 노래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우리 삶 속에 초대하는 초대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회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 가운데서도…. 우리의 감사는 독을 치료제로 바꾸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한 해 감사하는 회중의 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십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해독제를 만들뿐 아니라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독을 치료제로 바꾸는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폴 마이어라는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바람을 멈출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는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은 배울수는 있다.

시인의 놀라운 지혜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멈출 수 없는 것을 알고 삽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풍차를 만들어서 바람을 사용합니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파도를 멈출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리어 파도를 사용하여 배의 돛을 조종합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가장 지혜로운 자는 누구일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자라고…. 아주 멋진 시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지막을 좀 바꾸고 싶습니다.
“상처는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감사로 상처를 주는 독을 치료제로 바꿀수 있다.”

감사는 어떠한 독도 치료제로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그 치료제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가 늘 만들어 질 것입니다. 감사하는 회중은 세상의 독을 치료제로 바꾸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되십시다. 감사하는 자들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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