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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나의 빛

날짜 : 2012.06.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말씀은 나의 빛
성경본문 : 시편 119장 105-11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0610.wmv

월남전 당시 많은 미군들이 월맹군에 포로가 되었었습니다. 그 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분이 삼성 장군이었던 스톡데일(Stockdale) 해군 제독이었습니다. 하노이를 폭격하다가 추락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그마치 8년간 포로 생활을 합니다. 포로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8년간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고통 가운데 지내는 것은 육체적 고문보다도 더 큰 고문이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같은 미군 포로들끼리 서로 서로 힘이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전보를 치는 것처럼 소리로 싸인을 만들어 갔다고 합니다. 두 번 치면 a, 세 번 연달아 치면 b,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연락을 주고 받곤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We love you”라는 말도 이런 식으로 전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석방된 후 짐 콜린스(Jim Collins)라는 스탠포드(Stanford)대학 교수가 스톡데일제독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8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의 종말에 대해서 희망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젠가 석방될 것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뿐 아니라 나의 이 경험은 나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콜린 교수는 감동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질문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석방되지 못 한채 삶을 감옥에서 마쳤습니까?”
“아주 답변은 간단합니다. 낙관주의자들이죠.”
“낙관주의자들이라뇨?”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가게 될 거야 생각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나가게 될거야 기대했는데 나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곧 막연한 낙관주의자들입니다.”
콜린 교수는 그의 책에서 스톡데일 파라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표현을 합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어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할 것을 믿으며, 동시에 현실의 어려움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만큼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도전 가운데서 두 가지로 반응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잠시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기대한대로 되지 않을 때 비관론자가 되어 갑니다. 곧 낙관론자나 비관론자는 하나입니다. 어짜피 인생에는 고난이 많은 것, 누구나 다 스톡데일 파라독스의 삶을 살기를 원하실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제일 긴 장입니다. 무려 176절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말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려 176절을 기록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표현하다 보니 176절까지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시인은 말씀에 대해서 표현하려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인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한국에 삼행시라는 것이 있죠. ‘정거장’하면 첫 줄은 ‘정’자로, 그다음 줄은 ‘거’로, 마지막 줄은 ‘장’으로 시작되는 시를 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본문인 시편 119편도 비슷한 시입니다. 단지 알파벳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어와 영어가 한글과는 가까우니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첫 문단은 a로 시작합니다. A로 시작하는 8문장을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문단은 b로 시작하는 문장 8개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05절에서 112절은 영어식으로 하면 n으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면 한번 스크린으로 볼까요?
자 그러면 산수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몇 개가 되겠습니까? 총176절인데 모든 문단이 8절로 되어 있으니, 곧 176나누기 8하면 22가 나옵니다. 알파벳 수는 22입니다. 그러니 시편 119편은 22문단이고 각 절은 8절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으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원어성경에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acrostic 표현이라고 합니다. 한글번역을 찾아 봤더니 ‘이합체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러한 표현으로 곧 acrostic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를 썼을까요? 어느 주석가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라고 표현을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뿐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특별한 방법의 시를 쓰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22문단 중에 한 문단 n문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의를 함께 표하면서 아울러 말씀의 신비에 잠시 젖어 볼까 합니다. 첫 절에는 n문단 곧 오늘 본문의 주제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105절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인은 자기 발에는 등이 붙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등은 손에 들고 있어서 앞 길을 비추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발을 내딛는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은 손에 들고 다니는 등이 아니라 발에 아주 붙어 있어서 안전하게 우리들의 발이 닿는 곳을 밝혀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발에 등이 되어 우리의 길에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6절 말씀입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환한 빛이 됨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다가 급할 때만 비추어 달라고 하면 그 때 우리 발에 등이 되어 주실까요?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들에게 말씀은 늘 우리의 앞 길을 보여줍니다. 107절 말씀입니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갑자기 주제가 달라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의 특징일줄 압니다. n으로 시작하는 문단이니 내용이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서 계속 그 다음 내용을 살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 끝까지 살펴보면 큰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은 말씀과 고난의 삶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09절 말씀입니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자신의 삶은 늘 위기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삶을 뒤돌아 보면 고난이 없었던 때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번 삶의 위기를 버틸수가 있었는데, 아니 그러한 위기를 도리어 삶의 소중한 재산으로 바꿀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주의 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111절 말씀입니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삶의 위기와 고난 가운데서 말씀으로 인해 벗어나곤 했던 것이 도리어 자신의 재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이 되는 축복을 누렸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한 것입니다. 큰 고난 가운데서 말씀대로 살 때 자기라는 꽃이 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톡데일 제독이 고난 가운데 꽃이 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가 아름다운 즐거움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파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시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1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새로운 결단의 고백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목을 붙인다면 저는 스톡데일 파라독스(Stockdale Paradox)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시인은 낙관론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에 고난이 끝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만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말씀 가운데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이 모든 어려움은 언젠가 놀라운 축복의 소재가 될 것을 믿기에 언제나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은혜가 되는 내용의 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이 시는 acrostic시입니다. 왜 이 저자는 이 시를 acrostic시로 썼을까요? 그냥 쓰면 훨씬 편하고 더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시인은 두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씀의 내용을 통해 말씀하고 있고, 또 하나는 표현방법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말씀의 능력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온갖 고난을 이기고 자기가 참 자기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한편 포맷(format), 표현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acrostic표현을 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를 끝 없이 찾아 오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우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최고의 우리가 되어 갑니다. 이토록 소중한 말씀을 우리도 짝사랑 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의 짝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를 모르니 acrostic시를 쓸 수도 없고 말입니다. acrostic 시 대신에 무슨 방도가 있지 않을까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바로 떨기나무의 불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까만 글씨가 바로 떨기나무의 불입니다.
주디쓰 쿤스트(Judith Kunst)라는 분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어떻게 보면 연구했다고나 할까요? 다 살폈을 때 더 이상 살필 것이 없어서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분의 글을 읽고 저도 다시 출애굽기 모세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분의 말도 맞긴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그 불을 더 잘 연구하러 가까이 가니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 말씀을 깊이 살피고 연구하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살피고 연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을 짝사랑하는 우리들의 표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당연히 말씀을 붙듭니다. 그래야 합니다. 저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늘 되뇌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팔이팔! 로마서 8:28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려운 일을 만나면 늘 이 말씀으로 힘을 얻습니다. 이 말씀 하나로 안 되니 그 다음으로는 고린도전서 10:13말씀을 외우곤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늘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물론 견디어 낼줄로 압니다. 견디어 낸다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survive는 할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survive가 아닙니다. thrive입니다. 활짝 꽃이 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스톡데일 제독이 스톡데일 파라독스라는 꽃을 만들었듯이 우리도 모두 thrive할 것을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 각자가 자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예를 든다면 저는 ‘이영길 파라독스’의 꽃을 피워야 함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파라독스의 꽃을 피워야 함이 아닐까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평소에 불타는 떨기나무를 자세히 살피는 것입니다. 자세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많은 질문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질문이 다 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 들려오는 말씀이 우리를 우리되게 할 것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각자의 꽃을 피우게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자세히 살피는 것입니다. 때로는 솔직한 질문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놓고 맹렬한 토론도 벌이는 것입니다. 질문과 토론이 마쳤을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몸소 모범을 보이셨나요? 놀라지 마세요. 하나님 스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요? 저도 이번 설교준비를 하면서 저의 오랜 궁금증을 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에 부모님을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님은 아들 예수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같이 친구들과 오고 있는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던 길을 돌이켜 가는데 사흘 후에 성전에서 찾아냅니다. 누가복음 2:46말씀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소년 예수가 어떻게 했다구요?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요즘 저희 교회 구역모임이나 소그룹 성경공부와 같은 모임에 앉으신 것 같습니다. 듣기도 하셨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설교만 듣고 만족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궁금한 점이 많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셔서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이 바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메시야임을 말씀으로 재확인하시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소년 예수님도 이 말씀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라키쉬(Lakish)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랍비 요차난(Yochanan)이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동료 랍비들이 친구 요차난 랍비를 위로하기 위해 골머리를 씁니다. 결국 파뎃(Padat) 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파뎃은 요차난 랍비가 하는 말에 계속 맞다고 하면서 여러 자료까지 제공해 드립니다. 그야말로 ‘아멘, 아멘’하는 것입니다. 이에 요차난랍비가 소리지릅니다.
“당신은 라키쉬가 아니요. 라키쉬는 나의 말에 24개의 질문으로 도전하곤 하였소.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더 깊게 깨닫게 되었다오. 당신은 그냥 내 말에 옳다고만 하고 있소. 그래서 나는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길을 잃게 되었소.”
랍비는 옷을 찢으면서 외칩니다.
“어디있는고, 사랑하는 라키쉬.”
많은 대화와 깊은 질문을 통해서만이 말씀을 이해할수 있다는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말씀을 듣기도 묻기도 하게 됩니다. 실로 깊은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십시다. 소년 예수를 닮아가십시다. 소년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십시다. 우리의 참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십시다. 우리는 어떤 고난에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고백하십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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