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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르호봇

날짜 : 2012.06.0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바울의 르호봇
성경본문 : 빌립보서 4장 10-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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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방문 온 원로 세 사람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아십니까?”
첫째 사람이 대답합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구별해 볼수 있게 되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 것을 압니다.”
둘째 사람은 이렇게 답합니다.
“초원에 동물들의 형상이 보이면 어둠이 떠나고 밝은 낮이 찾아 온 것을 안다오.”
셋째 방문객은 방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가 서로 ‘자매’라 부르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형제’라 부르는 모습을 보면 비로서 어두운 밤이 걷히고 환한 낮이 온 것이오.”

첫 번째 두 번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낮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세 번째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낮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세계의 낮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 세상에 참 평화가 오는 것이 낮이 도래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세 번째 원로의 말대로라면 삶의 낮이 오는 것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온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와야 낮이 도래하는 것인데 과연 이런 사회가 언제 도래할까 조바심마저 들게 합니다. 좀 비관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낮을 맛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질문을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도바울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서신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아십니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감옥에서 나가는 때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에게 선물을 드린 것 같습니다. 말이 선물이지 감옥생활을 위한 위문품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위문품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위문품이 사도바울에게 낮과 같은 선물이었을까요? 아니 이 위문품이 사도바울을 밤에서 낮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감옥에서 받는 위문품이 좋기는 해도 밤에서 낮으로 옮기기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1,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분명한 것은 빌립보 교우님들의 위문품이 사도바울을 밤에서 낮으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도바울은 낮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이든지 자족함을 배운 분입니다. 감옥에서도 자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뿐이 아닙니다. 감옥 밖에서 살 때도 그는 삶의 비결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늘 대낮에 살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사도바울을 늘 낮의 사람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제 아무리 어두워도 그는 늘 낮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고백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시구나. 감옥 안에서도 이렇게 자족한 삶을 사는 분이니.” 아주 감탄해 마지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어, 그러면 우리가 보낸 위문품은 별로 필요가 없네. 이것 없이도 자족하면서 잘 지내시니?” 이러한 생각이 들 것을 사도바울이 알았는지 계속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위문품을 보낸 것이 잘 한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5, 16절 말씀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에게 보낸 선물을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안 보냈는데 빌립보 교회만 보낸 것을 언급합니다. 그것도 횟수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사도바울은 자기도 사람인지라 사랑의 선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좀 으쓱했을 것입니다. 자기네를 잘 기억하고 있고 횟수까지….
빌립보 교인들은 이제 눈을 더 크게 뜨고 그 다음 글을 읽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로부터 멋진 감사의 글을 기대하면서….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빌립보 교인들은 눈을 더 크게 떴을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기대한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그래도 한 마디라도 감사하다는 글을 은근히 기대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의 표현 안에 감사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면 담겨 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글자를 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자기네 교회 밖에 위문품을 보낸 교회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글을 읽고 또 읽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글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전과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들의 선물이 필요 없다는 뜻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더 보내라는 뜻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하여튼 간에 감사할줄 모르는 사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좀 안 내키지만 그래도 보낸 편지니 끝까지 읽어 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사도바울은 원래 풍부했는데 선물을 받으니 더욱 풍부해졌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 풍부의 축복은 자기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으니 하나님도 풍부를 느끼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자기들이 보낸 작은 선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을 접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도바울의 모습에서 갑자기 돌변합니다. 사도바울은 풍부함의 사도임을 느낍니다. 감옥이라는 열악한 곳에 갇혀 있지만, 그는 늘 자족한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조금만 자극이 와도 사도바울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이 있다면, “풍부하도다. 만족스럽도다.” 새로운 사도바울의 모습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의 작은 선물이 하나님께 풍성한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말에 확 정신을 잃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자기가 받은 이 선물이 자기에게 풍부함을 더한 것뿐 아니라 하나님께 풍부함의 즐거움을 드렸고 마지막으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풍성함의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양심에 작은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들도 힘든 생활 가운데서 겨우 위문품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늘 ‘부족하다. 부족하다’ 중얼거리며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자기네는 좀 나은지도 모릅니다. 많은 교회 교우님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없다. 없다.”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에 사도바울에게 그 어떤 교회도 생필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빌립보 교인들은 느낍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감옥에 있음을 느낍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도리어 풍부함의 삶, 대낮의 삶을 살고 있는 반면 자기들은 감옥 밖에서 부족함의 삶, 밤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늘 “부족하다” “작다” “없다”이었는데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풍족하다” “넓다” “있다” 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그 짧은 본문에 사도바울은 풍족하다는 단어를 여섯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대낮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들에게 대낮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풍족함’의 고백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두 주전 중고등부 학생들의 세례, 견신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날 저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로 전날에는 졸업생들과 함께 축하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세례, 견신을 받는 학생들과 졸업생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선사했습니다.
저희 교회 courtyard가 있는데 그 안에 멋지게 연못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르호봇의 우물’이라고 부르는데 그 우물 사진을 선물로 선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연못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도 대답을 못하더라구요. 저는 르호봇의 우물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했습니다. 다시 한번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물론 최근에 저희 교회 교우님이 되신 분들을 위해서도 다시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흉년이 들어서 그랄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입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서 거부가 되었는데, 이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그냥 놔둘리가 없습니다. 골짜기로 쫓아냅니다. 골짜기에서 이삭의 목자들이 우물을 팝니다. 그것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았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부릅니다.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시 팝니다. 또 다시 와서 빼았습니다. 그 우물을 ‘싯나’라고 부릅니다.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블레셋 목자들이 가만 놔둡니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부릅니다. 뜻은 ‘넓다.’ 사실 골짜기가 넓어 봤자 얼마나 넓겠습니까? 르호봇이라는 노래를 부른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다음과 같이 이삭을 축복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르호봇의 노래와 함께 낮이 찾아 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삭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저희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래합니다. ‘없다’ ‘적다’ ‘부족하다.’ 세상은 지금 부족함의 철학이 판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철학은 기독교의 철학은 부족함의 철학이 아닙니다. 풍부함의 철학입니다. 학교에서 세상에서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되십시요.”

사실 ‘부족하다’라는 표현은 그 시대마다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프랭크 퓨레디(Frank Furedi)라는 기자가 영국 신문에 ‘at risk’(위험, 내지 위기)라는 표현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1994년에는 2,037번 나왔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해는 배로 뛰었다고 합니다. 곧 1995년에는 약 4,000번. 그 다음 해인 1996년에는 약 6,000번, 2000년도에는 무려 18,000번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6년 동안에 9배 뛴 것입니다.
6년간 세상은 아홉배나 더 위험해 졌나요? 6년 만에 9배로 위험해 진다면 지금은 18년이 지났으니 6년이 세번 지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9X9X9하면 1994년보다 729배 위험해졌을 거라는 통계가 나옵니다.
1994년은 저에게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해입니다. 그리고 1995년에 본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본 교회를 섬긴지 17년이 지났는데 그 때와 지금과의 세상 살이 위험도는 729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보다 운전사고도 훨씬 많아야 하고 전쟁의 위험, 기근의 위험등이 훨씬 많아야 합니다. 물론 그 후 9/11 사태가 생겨서 많이 위험해 지긴 했어도 729배 정도는 아닙니다. 두세배 아니면 정 많이 잡아도 5배정도나 될까요? 그런데 6년만에 9배로 더 위험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많이 하는지 통계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20배는 되지 않을까요?
이 통계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더 어두워진 것입니다. “좁다, 적다, 없다.”의 고백이 9배 20배 700배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가면 갈수록 어두워 보입니다. 세상은 어두운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언제 낮이 찾아올까요?

이삭은 좁은 골짜기에서 ‘르호봇’이라고 외침을 통해서 낮의 삶을 맛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두운 감옥 속에서도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그는 감옥 안에서 ‘르호봇’을 외친 것입니다. 그는 낮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낮의 삶은 이미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르호봇’의 고백을 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섹’과 ‘싯나’의 노래가 홍수를 이루고 있어도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르호봇’의 고백이 늘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르호봇의 고백의 주인공이십니다. 장정 5000명과 수많은 여인과 아이들이 빈들에서 배고파 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개를 보여주면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택도 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손에 드시고 노래를 부르신 것입니다. ‘르호봇.’ “풍성하다.” 이에 풍성함의 축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대낮의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에섹’과 ‘싯나’의 노래가 범람하고 있는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길 원하십니다.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게 되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르호봇의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은 다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르호봇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요즘 저희 자녀들의 장래를 많은 분들이 걱정합니다. 저희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섹’과 ‘싯나’인듯 합니다. 갈수록 취업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들이 늘 “부족하다” “없다”를 노래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의 위기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새로운 빛을 발하는 기회입니다. 르호봇의 노래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부족함을 풍요함으로 바꿀 것입니다. 나만 풍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풍요해집니다. 이웃과 함께 풍요해집니다. 정말로 최고의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것입니다. 대낮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는 노래 가사는 ‘부족’과 ‘좁다’라는 가사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가사는 ‘많다’와 ‘넓다’라는 가사입니다. 어느 가사를 택하시겠습니까?

이삭은 좁은 골짜기에서 외쳤습니다. “르호봇”.
사도바울은 좁은 감옥에서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어릴 때 이모와 구두점에 갔습니다. 구두방 주인이 묻습니다. “모가난 구두와 둥근 구두중 어느 것을 신을래?” 레이건 소년은 결정을 못했습니다. 몇 일후 길거리에서 구두방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이 묻습니다. “결정했니?”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말합니다. “이틀 후에 찾으러 와. 준비해 놓고 있을테니.”
이틀 후에 가니 신발 두개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모난 구두와 둥근 구두.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한가지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줄게. 네 스스로 결정을 못 내리면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후 소년 레이건은 큰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결정을 못 내리면 다른 사람의 결정에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리들의 노래 가사를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대신 선택해 줄 것입니다. 그 가사를 부르시겠습니까? 낮은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이삭의 노래 사도바울의 노래, 주님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르호봇 (넓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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