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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날짜 : 2012.04.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성경본문 : 시편 8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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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방금 운전면허증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목사님인데, 목사인 아버지에게 자동차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의 서재로 데리고 가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거래를 하고 싶어. 내가 요구하는 3가지를 모두 하면 그때 가서 자동차 운전을 하도록 할 수 있어. 첫째는 학교성적을 올리고, 둘째는 성경을 읽으며, 세째는 긴 머리를 자를 것, 이 세 가지다.”
한 달이 지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왔습니다. 아버지에게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하자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또 다시 서재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나는 너에 대하여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너는 학교 성적을 올렸고, 성경도 열심히 공부했구나. 그런데 너는 머리는 아직도 자르지 않았구나!”
아들은 잠깐 머뭇하다가 대답합니다.
“아버지, 알겠어요. 머리 자르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삼손도 긴 머리를 했고, 모세도 긴 머리를 했으며 노아도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도 긴 머리를 하고 다녔지 않아요….”
이 말에 목사인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삼손도, 모세도, 노아도 그리고 예수님도 어디를 가나 걸어서 다녔지!”

오늘은 전 세계가 지키는 지구의 날(Earth Day)입니다. 첫번째 지구의 날은 1970년 4월 20일이었습니다. 곧 오늘이 43번째 지구의 날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구의 날이 시작된 것은 공해로 인해서 지구가 파괴되어 감을 느끼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당시 전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 8기통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개스를 마시면서 다닌 셈입니다. 그러던 중 위스콘신(Wisconsin)주 상원의원인 개이로드 넬슨(Gaylord Nelson)씨가 바로 전년도인 1969년도 Santa Barbara에서 대대적인 기름 유출 사건을 목격하고는 지구의 날 행사를 계획합니다.
행사는 성공적이었습니다. 2천만명의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습니다. 특히 공해를 조성하는 공장이나 하수구 시설 앞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2천만명이 거리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43번째 지구의 날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공해가 거의 사라질만 하지 않았을까요? 첫해 2천만명이 거리에 나왔고 그 해 미국 정부는 지구의 날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이제 43년이 지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겠지만, 지구의 공해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2010년도 미국 정부가 발표한 전 세계 국가의 CO2 공해 수치가 있습니다. 10개 나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 많은 나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위 중국, 2위 미국, 3위 인도, 4위 러시아, 5위 일본, 6위 독일, 7위 이란, 8위 한국(남한), 9위 카나다, 10위 사우디 순입니다.
저희 교회 교우님들과 관계되는 두 나라가 모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2위, 한국이 8위입니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갓 벗어나서 그렇다치고 미국은 왜 이럴까요? 그것도 43년 전에 2천만명이 거리로 뛰쳐 나왔는데 말입니다. 공해를 막자고 거리를 뛰쳐 나와도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환경운동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할지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어느 시편보다도 자주 성경에 인용이 된 시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아이들로부터 “호산나” 찬송을 받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이 화를 내니깐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바로 2절 말씀입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한편 4, 5절은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고난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인용이 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처럼 한번은 주님이 직접 인용하셨고, 또 한 번은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인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아주 신학적으로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신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담긴 이 시는 과연 어떤 시인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예상과 달리 무거운 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인은 온 땅과 하늘에 주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 보면서 깊은 시상에 젖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세계와 예수님의 고난이 어떻게 관계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하여튼 곧이어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리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문맥상으로는 맞지 않아 보이지만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3절 말씀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3절은 시의 시작 곧 1절과 다시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지금 육안으로 하늘과 달과 별을 보면서 감격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친근한 솜씨를 자연세계에서 느꼈는지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시인은 지금 창조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4, 5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후에 인용을 한 것인데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말고 이 부분을 읽으면…, 아니 일단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일단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사실은 모른다고 하고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연을 보면서 시인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3절의 마지막 귀절이 이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연결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의 웅장한 창조세계를 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새삼 느낀 것입니다. 아니 놀라운 창조세계를 보면서 이 창조세계는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가슴으로부터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은 존귀로 관을 쓰고 있는 느낌에 사로 잡힙니다. 그뿐 아닙니다. 6-8절 말씀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이 엄청난 자연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아니 자기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엄청난 세계를 보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기에게 맡겨진 창조세계가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요 노래였던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해서 받은 영감으로 쓴 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를 확증하는 것은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동일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렇다면 이 시는 정말로 귀한 멧세지가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연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데 자기도 모르게 우리 주님의 모습을 동시에 노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랜 시간 후 예수님은 2절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고 갈 당신을 찬양하는 어린 심령들을 보았던 것이고, 4, 5절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의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자연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통해서 어느새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뿐 아니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곧 시인은 자연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앞으로 오실 주님의 모습을 만난 것이 아닐까요?

말씀드린대로 오늘은 43차 지구의 날입니다. 43차 지구의 날을 지켜 오는 미국이 왜 세계 제2의 이산화탄소 공장이 되어야만 합니까? 미국인들에게는- 아니 이제는 우리 한국인도 포함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도 8위이니 말입니다- 미국인이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하나의 착취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대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해를 아무리 줄이려 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연과의 만남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연을 착취하게된 가장 큰 이유를 철학자 데카르트와 과학자 뉴톤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 두 학자들이 자연을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구의 날은 자연과의 만남의 회복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할줄 압니다. 자연과의 화해 없이는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해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오늘날까지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자연과 깊은 대화를 나눈 사람들입니다. 몇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작업은 너무나 위대하고 경이로워서, 이성적인 동물인 인간뿐 아니라, 심지어 가장 조그마한 곤충들도 놀라움과 창조주에 대한 찬양 없이는 주의 깊게 고려될 수 없다.”
성 어거스틴은 작은 곤충을 통해서 창조주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성 프란시스코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요! 찬미와 영광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리쥬의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내 앞에 자연이라는 책을 놓아 두었다. 나는 그가 창조한 온갖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장미의 화려함과 백합의 순백이 조그마한 제비꽃의 향기 혹은 데이지의 애교스러운 단순함의 가치를 어떻게 줄이지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의 세상 즉 예수님의 정원 속에 있다. 그는 백합과 장미에 비교할 만한 위대한 영혼을 창조했으나 좀더 작은 영혼들도 창조했으며 이러한 영혼들은 하나님이 그의 발을 내려다볼 때 기쁨을 주는 운명을 가진 데이지 혹은 제비꽃이 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성가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그 때 땅이 천국에 이르는 사닥다리가 될 것이다.
감성은 그 길을 알려 줄 것이다.
창조물 모두는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한편 뉴잉글랜드가 낳은 대 부흥사 조나단 애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탁월함, 그의 지혜, 그의 순수와 사랑은 모든 사람에 나타나는 것 같다. 태양, 달 그리고 별들에, 구름과 푸른 하늘에, 풀, 꽃, 나무들에서, 물 그리고 모든 자연 속에서, 이것은 내 마음을 정하는 데에 중대하게 이용된 것, 나는 종종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대낮에는, 구름과 하늘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멋진 영광을 보기 위해 이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자들이 많아질 때 진정 공해문제는 뒷전에 미루어지지 않을까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야기입니다. 1976년도 어느날 테네시주 멤피스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피넛버터와 바나나 그리고 베이컨을 끼워 만든 샌드위치였습니다. 이것을 먹으려고 콜로라도주의 덴버까지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5,500갤론의 개스를 써서 다녀 온 것입니다. 과연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그런데 이것을 소개하는 분이 계속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무게 54kg의 사람이 빵 한 덩이나 베이컨 1파운드를 사려고 근처 편의점에 무게 1,600kg짜리 차를 몰고 가는 현실은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후자의 에너지 효율은 엘비스의 경우보다도 더 낭비이며, 이를 승객 1인당 1마일을 이동하는데 드는 수송 원가로 비교하면 초음속 콩코드 제트기를 이용한 국제 여행보다도 나쁜 수준이다.”
곧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한 번 탈 때마다 그냥 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할 때 타는 거고, 또 감사한 마음으로 타야하지 않을까요? 꼭 필요할 때 자동차를 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지어야할 작고도 작은 십자가가 아닐까요? 이 작은 십자가를 지는 자들은 자연세계를 보면서 시인의 고백을 하지 않을까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저의 집 사람이 어머님 간호 차 한국에 가 있어서 제가 장을 보곤 합니다. 건강진단을 하곤 하면 가끔 포타시움(potassium)이 적게 나온다고 해서 오렌지 쥬스를 자주 마십니다. 그래서 다른 장은 안 보더라도 오렌지 쥬스는 꼭 사야만 합니다. 한 두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주중에 교회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저희교회 주변을 산책하곤 합니다.
지난 주 어느날 산책겸 오렌지 쥬스를 사러 교회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Stop& Shop에 갔습니다. 마침 오렌지 쥬스가 세일이었습니다. Basket에 네 병을 넣으려 하는데 금방 생각이 드는 것이 차를 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두 병만 사고 다시 교회로 걸어 갔습니다. 보통 산책할 때 보다는 거리도 멀게 느껴졌습니다. 교회에 도착하여 뒷문으로 들어 오려는데 마침 튜립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튜립이 무언가 말하는듯 들렸습니다. 뭐라고 들렸겠습니까? “Thank you.”
튜립과 대화하기 원하십니까? 가급적 공해를 피해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편 튜립과 대화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게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우리의 입에는 시인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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