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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

날짜 : 2012.04.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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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한 분이 사형장에 임석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사형수에게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간절히 권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성경 말씀으로 강권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잘 안 통하자, 이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우편에서 죽었던 강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참회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더욱 마음은 굳어져 보였습니다. 또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는데, 이 때 사형수는 대꾸합니다.
“신부, 이제 그만 하시오. 난 3분 후에 당신 우두머리하고 얘기하고 있을테니까….”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독일 루터란 교회는 부활절 설교는 늘 농담으로 시작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언가 모르게 우리를 슬며시 웃게 만듭니다. 왜 웃게 만들죠? 이 이야기에는 부활이라는 주제가 스며져 있습니다. 부활의 이야기는 어떤 형태이던 우리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설교를 농담으로 시작하는 전통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한편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루터교는 종교개혁 이후 마틴루터의 가르침을 통해서 생긴 최초 개신교단인데, 아마도 구교인 카톨릭 교회에서 너무 부활을 엄숙한 사건으로 아니 모든 기독교 교리를 엄숙하고 무겁게 만들었기에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부활절은 통쾌하게 웃어 보자는 전통이 생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교회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웃음은 사회의 전유물로 전락된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실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요? 현대 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의 동생 정세영 씨가 고려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입학시험을 치고 돌아온 정세영 씨는 형에게 아무래도 합격은 힘들 것 같다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동생의 말에 정주영 회장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야, 이놈아! 나도 고대에 들어갔는데, 네가 왜 못 들어가니?”
아시다시피 정 회장은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입니다. 그가 고대에 들어갔다는 말은 대학교 건물을 지을 때 막노동자로 들어갔다는 말이었습니다. 형제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정회장은 자신이 고대 건물을 짓는 막노동자로 일했다는 사실 하나로 멋진 웃음을 만들어 나가신 분입니다.
이처럼 정회장은 자신의 하찮은 삶의 발자취로 멋진 유머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 크리스챤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보고 웃고 있나요? 본인이 유머를 창조하긴 커녕 남이 만드는 유머를 구경하느라 덧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온 인류 역사에 최고의 웃기는 사건이 2000년전에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는 자들에게는 삶 전체에 웃음 꽃이 피어납니다. 그런데 왜 요즘 많은 크리스챤들이 웃음을 잃고 있나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웃음을 쉽게 잃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두 가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살아나느냐’, 또 하나는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크리스챤들이 놀라운 부활의 진리를 알면서도 웃음을 잃어가는 이유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어떻게’라는 질문입니다. 요즘 처럼 지식이 판치는 시대에는 ‘어떻게’라는 질문이 소중합니다. ‘어떻게’가 오늘 과학의 발전에 근간이 된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답변하죠? 36절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먼저 답변의 시작을 “어리석은 자여”로 시작합니다. “어떻게”라는 질문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게”라는 질문 앞에 “어리석은 자여”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극히 단순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단순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두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각자 손에 씨앗이 들려져 있습니다. 한 아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씨앗을 땅에 심습니다. 반면 한 아이는 엄마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이 씨앗이 어떻게 싹이나고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않으면 씨를 못 뿌리겠어. 나는 꼭 알아야 해. 엄마 어떻게 이 씨앗이 싹이 나는거야?”
엄마는 처음에는 기특하다는 듯이 아는대로 조금 말합니다.
“씨앗은 땅 속에 들어가서 따뜻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산소만 있으면 싻이 난단다.”
아이는 계속 질문합니다.
“왜 온도가 따뜻해야 되, 왜 습도가 필요해…. 산소는 왜 필요하고.”
엄마는 말합니다.
“나도 더 이상 몰라 우선 올해는 그냥 씨를 뿌리자. 나머지는 네가 커서 배워.”
아이는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싻이 나오는지 알지 않으면 안 뿌려. 그것은 낭비야.”
그 아이는 평생 한번도 씨앗을 뿌리지 못합니다. 반면 다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씨를 뿌리며 자라나는 식물과 평생 재미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새싻이 나올 때마다 그의 삶은 환한 웃음바다가 됩니다.
부활도 매한 가지가 아닐까요? 부활의 사건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찾아 오지 않습니다. 뿌린 씨앗에서 싻이 나오는 것을 믿는 정도의 단순한 지식만을 요구합니다. 곧 부활의 축복은 부활을 믿고 ‘Yes’하며 담대히 사는 자들에게 ‘Yes’로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이 들이 바로 복잡한 세상 가운데 웃는 자들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는 부활을 믿게 만드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후 단순한 마음으로 ‘Yes”로 임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축복은 꽃이 핍니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임할 때 부활의 축복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싹이 난 것을 본 후 봄 마다 씨를 심으면 싹이 나는 거지, 봄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심지 못합니다. 더욱이 거두지도 못하고요. 부활의 축복도 매한 가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얼마나 자주 여러분의 입에서 고백하십니까? 단순히 이 고백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십시다. 우리의 삶은 웃음바다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코메디언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어떻게’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째 ‘어떻게’라는 질문에 계속 답변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부활 시 어떤 몸이 되느냐가 무척 궁금했던 것입니다. 37, 38절 말씀을 보면,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것을 읽고 있는 고린도 교우들은 화가 났을지 모릅니다. 씨를 뿌린대로 나는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하면서, “이것을 말이라고 하나”하면서 화가 났을지 모릅니다. “우리를 초등학교도 못 나온 어린애로 아나?”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좀 복잡하고 철학적이면서 깊은 사색이 필요한 말을 듣기를 원했는데 너무나 쉬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도바울은 동요치 않고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대답하라. 내 말이 맞냐, 틀리냐? Yes or No?”
고린도 교우들은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Yes, 씨 뿌리는대로 하나님이 거두십니다.”
이 대답을 들은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41절 말씀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도바울은 계속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Yes or No?” 고린도 교우들은 또 대답합니다. “Yes.” 마음 속으로는 못 마땅합니다. 이걸 질문이라고 하나? 생각하면서…. 이제 고린도 교우들은 ‘Yes’가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한편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답변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한 ‘yes’ 답변을 받은 후 사도바울은 이제야 부활론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42절 이하 말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어느덧 고린도 교우님들의 입에는 “Yes”가 반복되어 튀어 나옵니다. 고린도 교우들의
“Yes”의 합창을 들으며 사도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에 고린도 교우님들은 모두 “아멘”하지 않았을까요?

사도바울은 이 당시 고린도 사람들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고 쉽게 “Yes” 하는 것 보다는 “How”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그들을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질문을 답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부활은 “어떻게”의 논리로는 찾아 갈수 없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오직 단순한 믿음 “Yes”냐 “No”냐가 중요함을 잘 알았습니다. 결국 “Yes냐 No”라는 대답을 요구하는 단순한 질문으로 사도바울은 그들을 부활의 축복의 삶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끝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답변을 하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단순한 질문에 “Yes”로 계속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부활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웃음 꽃이 환하게 피게 되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은 어쩌면 ‘Yes’ 와 ‘No’ 입니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입니다. ‘오늘 아침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입니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어떻게’는 삶의 결단을 회피하는 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수단일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도 늘 ‘Yes냐 No’의 삶의 연속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행동에는 ‘어떻게’가 없습니다. 행동에는 ‘하느냐 안 하느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사건’앞에서 우리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Yes냐 No냐’입니다. 삶에 ‘Yes’로 임하는 자들에게 웃음꽃이 피는 삶이 열립니다. 특히 주님의 부활 앞에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웃음 꽃이 환히 피고 있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제가 여러분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당신 뜻대로 모든 씨앗에게 그 형체를 주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른 것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Yes”하셨다면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피카소의 작품 중에 ‘황소머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화가인 피카소가 만든 유래 없는 조각입니다. 피카소가 길을 가다가 고철 더미에 버려진 자전거가 눈에 띄어서 화실에 가져옵니다. 자전거 안장 위에 핸들을 세우니 멋진 황소 머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투우가 유명한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가지고 멋진 황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얼마 전 약 3천만불에 경매 되었다고 합니다.
버려진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이 닿았을 때 3천만불짜리 황소 머리로 부활했습니다.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는 일입니까? 피카소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역시 피카소구나” 생각하며 작은 ‘Yes’의 탄성을 발합니다.
한편 자전거처럼 버려지고도 남을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작품이 되어 가겠습니까? 우리 모두 멋진 폭소를 터뜨릴 날이 오지 않을까요? 사실 피카소가 황소머리를 조각한 이유는 그는 스페인에 살면서 황소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누구 생각을 제일 많이 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생각 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도 어느새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YES.’ ‘How’로 가득 찬 세상에서 ‘Yes’로 노래하십시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웃기시려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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