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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후예

날짜 : 2012.03.14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삭의 후예
성경본문 : 창세기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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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거창고등학교라고 기독교 사립 학교가 있습니다. 얼마전 우연히 그 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명’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첫 세 계명만 말씀드리면,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여기까지 보면 한 마디로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9번째 계명까지 비슷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직업 선택에 있어서 이러한 계명을 따라 간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홉 가지도 쇽킹한데 마지막 10번째는 더 깜짝 놀라게 합니다.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직업 선택에 있어서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저도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계명은 직업 선택을 위한 계명인 것 보다는 사순절을 위한 계명인 것 같습니다.

사순절 첫째주일 설교시 말씀드렸습니다. 올 해 사순절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의 모습을 묵상하려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삭의 삶을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이삭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내려 가는데 바로 이 십계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주 흥미롭게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러던중 마지막 계명을 읽을 때 제 눈이 번쩍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는 18세쯤 되는데, 18세 청년들에게 ‘단두대’로 가라고 말하는 것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나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중에 한 분인 이삭은 18살이 되기 전에 단두대에 섰으니까 말입니다. 오늘 사순절 세번째 주일을 맞이 하여 이삭의 삶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처음 약속을 받은 후 25년만에 받은 것입니다. 백세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는 할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친아버지였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약속을 하시려나 큰 기대를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몹시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할수가 없습니다.
두 종과 이삭과 나귀와 함께 떠납니다. 제 삼일째 모리아산 가까이 왔습니다. 더 이상 나귀가 갈수 없는 좁은 산길이 되었나 봅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그곳에 나귀와 함께 남아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나귀를 놓고 오니 이제 나귀가 매었던 번제나무를 이삭에게 메웁니다. 한편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갑니다.
곧이어 모리아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들 이삭을 결박합니다. 결박한 아들 이삭을 제단 나무위에 올려 놓습니다.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지 전혀 알수 없지만 이삭도 자기의 몸을 아버지에게 그냥 맡긴 것 같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에게 내려치려고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다니다 하매.” 하나님의 사자가 계속 말씀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눈을 들어 보니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숫양을 가져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립니다. 이에 하나님은 너무도 감격하셨나 봅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며 큰 복을 주실 것을 재차 약속하십니다. 자, 아브라함은 아들을 단두대에 올렸기에 축복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단두대에 올라간 이삭은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이 이야기를 늘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생각해 왔지만 오늘은 이삭을 주인공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어느날 새벽 단잠을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깨웁니다. 멀리 가야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와 멀리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흥분된 마음으로 자기 짐을 챙기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삼일째 되는 날 멀리 모리아 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그 곳에 있으라고 하고는 나귀가 짐어 지었던 짐들을 자기에게 메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의 쥐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요. 이삭은 자기를 태울 번제나무를 메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일 칼과 이삭을 태울 번제나무를 손에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은 다 찢어져 흐느적 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걸어가는데 이삭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7절 이하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의 가슴은 더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삭은 또 말없이 아버지를 따라 갑니다. 사실 이삭이 나무가지를 짊어지고 아버지와 더불어 산을 오른 것을 보면 꽤 성장한 때였습니다. 이삭도 세상 돌아 가는 것을 얼마치 아는 나이였을 것입니다. 반면 아버지의 나이는 백세 하고 이삭의 나이를 합친 나이였습니다.
산 꼭대기에 올라 왔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결박으로 묶습니다. 여러분이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산으로 끌고 가서 결박한 후 칼로 잡으려고 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어쩌면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의 젊고 어린 몸을 아버지에게 맡깁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삭은 단두대에 올라간 것입니다. 아무 반항 없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세 하고 이삭의 나이를 합친 나이입니다. 이삭은 혼자서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를수 있을만큼의 건장한 청소년입니다. 그러니 뿌리치고 도망 갈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삭이 단두대에 올라가 있는 시간은 아마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칼이 자기 목에 꽂히길 기다립니다. 눈을 꼭 감았습니다.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 죽는다는게 이런거구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릅니다만, 아버지가 자기를 끌어 안고 제단에서 내립니다. 제단에서 내려 와 정신을 차려보니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 보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숫양을 잡아 자기 대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두 가지 큰 사건을 치룬 것입니다. 하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곧이어 자기 대신에 숫양이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됩니다. 이 잊을수 없는 두 사건을 불과 10살쯤 되어서 겪은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아마 이삭은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뇌리에서 떨칠래야 떨칠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살 이후 이삭의 뇌리에 늘 남아 있는 두 가지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시퍼런 칼과 숫양. 이 단두대의 사건이 이삭을 이삭이 되게 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의 손에 들린 시퍼런 칼, 수풀 속에 걸린 숫양,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바로 이삭을 이삭이 되게한 축복의 이미지입니다. 곧 자기가 받을 칼을 누군가가 대신하는 신비의 체험을 청소년 시기에 한 것입니다.

한번쯤 생각해 볼만 합니다. 만일 이삭이 자기 힘으로 백살이 넘은 아버지를 밀치고 단두대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이 놀라운 경험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곧 이삭은 놀라운 축복의 길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밀치고 달아날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결코 약속의 자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숫양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단두대를 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시퍼런 칼을 보았습니다. 아울러 자기를 위해 피를 흘리는 숫양을 보았습니다.

오늘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 기간 매일 매일 우리에게는 갈림길이 주어집니다. 왕관이냐 단두대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고 계십니까?
그동안 우리는 왕관을 차지하려고 동분서주 뛰어 다니지 않았습니까? 남은 사순절 분주했던 우리들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차분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살펴 보십시다. 왕관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단두대로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삭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단두대에 스스로 선다면 우리는 놀라운 체험을 할 것입니다. 이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체험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대신에 시퍼런 칼에 맞으시는 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시퍼런 칼에 맞으셨습니다. 찔렸습니다. 그래서 피를 철철 흘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칼에 맞으시면서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 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꼭 단두대에 올라서야 합니까? 단두대에 서지 않고도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수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을 비교해 보십시다. 한 사람은 단두대에서 자기에게 향하던 시퍼런 칼을 보았습니다. 순간 그 칼이 다른 사람의 목을 찔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하여 시퍼런 칼이 내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칼은 옆 옆에 있는 사람의 목을 찔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경험을 하였겠습니까? 첫번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단두대에 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을 새로이 만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이삭과 더불어 말 없이 나의 단두대에 오르는 절기입니다. 왕관을 쓰려고 애쓰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자기의 단두대에 오르는 절기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기를 향하여 내리치는 시퍼런 칼을 보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하여 내리치는 칼을 보는 순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이 음성과 함께 우리는 시퍼런 칼이 십자가의 주님께 내려쳐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 아이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 산 참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단두대에 올라온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곧 이삭의 단두대는 하나님의 자녀가 거하는 왕좌로 변한 것입니다.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삭이 숫양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물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단두대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그 때 우리가 거하는 자리는 왕좌가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왕관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갑니다. 곧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자들이 가는 곳은 바로 왕좌로 변하게 됩니다. 왕들이 거하는 곳이 됩니다.

‘르호봇’이라는 말을 오래된 교우님들은 많이 들으셨을줄 압니다. 저희 교회 가운데 있는 분수의 이름을 ‘르호봇’의 우물이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르호봇은 ‘넓다’라는 뜻인데, 좁은 courtyard에 있는 작은 분수를 ‘르호봇’의 우물이라고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쫓겨서 그랄 골짜기에 살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우물을 팠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을 ‘다툼’이라는 의미로 ‘에섹’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새 우물을 팠습니다. 또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 우물 이름을 ‘대적함’이라는 의미로 ‘싯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 새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 우물 이름을 ‘넓다’라는 뜻으로 ‘르호봇’이라고 부릅니다.
‘르호봇’은 바로 왕들의 노래가 아닐까요? 왕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요? 이삭은 왕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조그마한 우물도 르호봇의 우물이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우물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곧 사순절은 이삭의 아름다운 모습을 흉내내는 절기 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삭의 후예가 된 것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이삭의 후예가 되어서 왕관보다는 단두대를 사모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단두대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단두대에 오르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가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립니다. 우리는 어느새 왕관을 소유한 자가 되어 갑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우리들의 단두대에 오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으십시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말씀을 거둡니다.
“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하거라.”
아들이 입은 고급 상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든 부부는 아들을 다그쳤습니다.
“죄송해요. 그만 지갑을 훔쳤어요.”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됬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들의 탈선에 마음 아파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재판장에서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합니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주세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저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드디어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불처분입니다.”
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판결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자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훌륭한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자녀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자주 자주 자신의 단두대에 오르십시다. 우리의 단두대에 올라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울러 주님의 음성은 다음과 같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귓전을 울릴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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