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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

날짜 : 2012.02.1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복 있는 자
성경본문 : 시편 32편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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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캇(John Stott) 목사님이 일리노이 대학의 정신의학과 교수님인 오르발 모우러(Orval Mowrer)박사님을 만났었습니다. 모우러박사님은 기독교인은 아닌데 교회와는 사랑싸움을 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회와 사랑 싸움을 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하게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우러 박사님이 청년 시절에 교회는 자기를 많이 실망시켰다고 합니다. 교회를 자기나름대로 꾀나 사랑하고 싶었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나 봅니다. 그뿐 아니라, 후에 이 분이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만나는데, 많은 환자들에게 교회가 자기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환자들이 자기처럼 교회로 인해서 많은 정신적 고충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비밀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캇 목사님은 이에 쇼크를 받습니다. 그동안 들었던 교회에 대한 비판 중에 가장 신랄한 비판이었다고 말합니다.

존 스캇 목사님이 이 비판으로 인해 쇼크를 받은 이유는 당연합니다. 교회의 생명이 공동체인데, 교회가 공동체의 비밀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스캇 목사님은 정신을 잃을 수 밖에…. 그것도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 말하니 더 할 말을 잃었을줄 압니다. 모우어 박사님이 기독교인이 아니니 성경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진단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의 진단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독교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잘 못되었기에 요즘 기독교는 공동체의 비밀을 배우지 못한 기형적 공동체가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줄 압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기독교적 공동체의 비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의 시라고 생각이 되는데 다윗은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사함 받기 전에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사함 받는 자들이야 말로 복있는 자들이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죄 사함 받은 자들이 복이 있는지 3, 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죄로 인해서 자기의 뼈가 쇠하는 고통을 느꼈고 또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뼈가 쇠하고 몸에 온 진액이 빠지는 고통 가운데 있는 것 정말로 힘든 고통일줄 압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나 많은 궁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해지기만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워싱톤에 살 때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많이 하였을 때인데 기도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하여 아침 금식과 함께 간식도 안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 이 것 저 것 권하니 간식을 안 먹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도 봐 주시겠지” 하면서 권하는 간식을 덥썩 받아 먹었습니다. 그 날은 이럭 저락 잘 지냈는데 다음 날부터 매일 하던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하고 불러도 전혀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정말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다는 다윗의 고백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 때부터 열심히 하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한 회개의 기도를 하니3일째 되는 날 드디어 풀렸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하나님도 봐 주시겠지”하면서 도둑질하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지금 다윗은 자복했더니 주님께서 죄악을 사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의 죄가 사함을 받았는지 알았겠습니까? 다윗은 고백을 하고 나니깐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뼈가 쇠하는 고통과 진액이 빠지는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이 고통이 사라짐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께 죄인임을 고백한 자들은 복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뼈가 쇠하는 고통과 몸에 진액이 빠지는 고통이 존재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에는 또 다른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수술도 받아야 하고 경제적으로 시달리기도 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죄로 인한 이러한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복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기도하는 축복을 얻게 되었고 기도를 하니 홍수도 막는 능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홍수가 왔을 때 기도를 했더니 홍해처럼 홍수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회개를 했더니 평소에 없던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주는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사실 자기는 죄인인데 이제는 구원의 노래가 자기를 감싸고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두 가지로 자신이 감싸져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홍수도 막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가 약 35년 전에 신학교 공부를 할 때 물론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웠습니다만, 그 당시 배운 것 중에 가장 저의 마음에 꽂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절 말씀 하반절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구약의 죄사함의 개념 중 하나가 가려진다는 개념입니다. 물론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가려진다는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보혈의 피로 죄가 씻어내려 갔다고도 표현을 합니다만, 저는 가려진다는 표현이 더 마음에 꽂혔습니다. 아니 가려진다는 표현이 더 가깝게 와 닿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아무리 죄가 씻어내려 갔다고 믿어도 많은 경우 어떻습니까?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자주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려진다는 표현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아직 죄가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는데 그것이 가려져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 느낌을 너무도 잘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하셨다고도 표현하시지만 죄를 가리셨다고도 표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까운을 입고 말씀을 전합니다. 찬양대도 까운을 입고 찬양을 합니다. 왜 까운을 입겠습니까? 물론 요즘 까운 안 입고 예배드리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더 현대적 감각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안 입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면 구태연한 전통에서 해방된 더 자유로운 느낌을 주어서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권위를 벗는 느낌이라서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
그런데 까운을 입는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리기 위함입니다. 목사도 찬양대원도 죄인인데 죄인이 어떻게 강단에 서고 또 찬양을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가리움을 받은 자들이기에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찬양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까운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까운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까운을 입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까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홍수를 막는 능력의 까운을 입고 있습니다. 구원의 노래의 까운을 입고 있습니다. 이 까운이 자신의 죄를 가리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조금 억지를 부려 볼까요? 저는 지금 홍수를 막는 능력의 까운을 입고 강단에 섰습니다. 우리 찬양대는 구원의 노래의 까운을 입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두 까운은 바로 여러분들의 까운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 두 까운을 모두 입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우리가 입고 있는 까운은 예수님의 보혈의 까운입니다. 그런데 이 까운은 그저 가리기만 하는 까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까운에는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홍수를 막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울러 구원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까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까운을 입고 있습니다.
이 두 까운을 입고 있는 다윗은 지금 사랑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권면의 말씀이 8-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다윗의 눈에는 모두가 까운을 입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의인들로 보였습니다. 모두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의인들의 공동체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직한 자들의 공동체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죄사함을 받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의인의 까운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모우어 박사님은 어떤 생각으로 교회는 공동체의 비밀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아니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비밀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비밀은 첫째는 우리는 모두 엄청난 고통에서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는 의인의 까운으로 가리움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의 까운은 놀랍게 아름답습니다. 놀라운 능력의 까운입니다.
그러면 진실로 복있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먼저 자신이 이 까운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이웃의 멋진 까운을 볼줄 아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웃의 허물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입히신 그 까운을 볼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 때면 우리들의 시력은 너무 좋아져서 까운을 뚫고 그 안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석상을 운영하는 한 사람이 유럽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 진귀한 보석을 거액의 돈을 주고 샀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살 때는 보지 못했던 작은 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이런 흠이 있었다니!”
감정가들도 그 흠이 보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했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보석을 본래 가치로 되돌릴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한 후에 그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석의 작은 흠에 장미꽃을 새기기로 한 것입니다. 흠에 새긴 장미꽃 하나로 보석의 가치는 몇 배 이상 뛰었습니다. 작은 흠에 장미꽃 옷을 입힌 것입니다.

종종 이웃 교우님의 흠이 보이곤 하지 않습니까? 흠을 중심으로 해서 장미꽃 옷을 입히면 어떨까요? 이웃에게 장미꽃 까운을 입히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은 모두 화가가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입니다. 이웃의 흠을 도리어 멋진 장미꽃으로 변신시키는 놀라운 실력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멋진 장미꽃 그림이 박힌 까운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공동체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위해 이러한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최고의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이웃을 위해 멋진 그림을 그린 한국이 나은 참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상남도 남해군에 조덕삼이라는 부자와 가난한 이자익이란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자익 청년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집을 떠나 김제에 와서 어느 부잣집을 찾아가 사정합니다. 바로 그 주인이 조덕삼입니다. 주인은 그를 그 집 마부로 곧 머슴으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선교사가 전도해서 두 사람은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식한 이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한편 미국 선교사님의 수고로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주인 조덕삼과 함께 머슴 이자익이 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꾸 커져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주인과 머슴이 함께 장로 후보로 나왔습니다. 투표 결과 머슴인 이자익 교우가 장로로 피택이 되고 조덕삼 교우는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 때 조덕삼 교우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 교우님들,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려운데 이자익 교우를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교회를 잘 섬깁시다.”
얼마 후에 조덕삼 교우도 장로가 됐습니다. 장로가 된 다음 자기 집 머슴으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장로가 굉장히 총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분을 평양신학교에 보내 5년 동안 평양신학교를 다니게 합니다. 나중에는 이분을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모시고 평생 동안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아무리 이자익 청년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머슴은 머슴입니다. 흠과 허물을 찾을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덕삼 장로는 아마도 멋진 화가였던 것 같습니다. 가끔 발견되는 허물과 흠을 중심으로 장미꽃을 그리는 화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보다 먼저 장로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자기 집에서 머슴생활을 한 청년을 신학교로 보내고 그것도 못 다해서 담임 목사로 모셔 옵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자신이 죄사함 받고 얻은 축복을 너무도 잘 누린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 감격 가운데 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자신이 입고 있는 축복의 옷을 늘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입은 의인의 옷을 생각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아름다운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 교회는 최고의 공동체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들의 죄의 고통이 사라진 것으로 인해 늘 감사드리십시다. 아울러 허락하신 의의 옷으로 인해서 감격하십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멋진 화가가 되십시다. 우리 교회는 최고의 공동체가 되어 갈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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