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평강의 왕

날짜 : 2011.11.2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평강의 왕
성경본문 : 이사야 9장 1-6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video_master/Sermon_20111127.wmv

미국의 유명한 과학 출판업자인 존 브록맨(John Brockman)은 새로운 밀리니엄이 시작하기 전 유명한 과학자 11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은 과학자들의 대답은 첫번째가 인쇄기계, 인쇄가 아마도 현대문명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번째가 전기모터, 전기모터가 모든 공학발전에 기여한 것은 두 말할나위 없다고 봅니다. 그다음으로 비행기, 물론 비행기 중요하겠죠. 다음으로는 산아제한, 그리고 컴퓨터를 꼽고 있습니다. 저도 요즘 설교 준비는 콤퓨터 없이는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중 작가이며 평론가인 더글라스 러쉬코프(Douglas Rushkoff)는 뜻밖에도 ‘지우개’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답은 지우개다. 컴퓨터의 ‘delete’키, 화이트(수정액), 헌법 수정조항, 그밖에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을 꼽고 싶다. 이렇게 뒤로 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적 모델도 없었을 것이고 정부, 문화, 도덕도 없었을 것이다. 지우개는 우리의 참회소이자, 용서하는 자며,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그럴 법도 합니다. 지우개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는 우리의 실수로 가득차 있고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넣을 틈이 없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지난주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지난 일들을 송두리채 지워버리고 새 하얀 종이를 손에 쥐고 상상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절기일까요? 그것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이가 주어진다고 해도 실수 없이 잘 그릴수 있을까요? 물론 그림을 잘 그리시는 분들은 실수하면 새로운 종이에다가 다시 그리길 원하시겠죠. 저는 그림하면 아주 자신이 없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 하얀 종이만 보면 겁이 납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글을 쓰라고 하면 좀 쓰겠는데 그림은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지우개는 별로 큰 도움이 못 됩니다. 다 지우고 난 새 하얀 종이를 봐도 계속 겁이나니 말입니다.
한편 실수한 후 또 지우고 또 지우고 또 지우는 것 좋겠지만 문제는 평생 지우기만 하다가 주님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우개가 최고의 발명품은 아니라고 봅니다. 최소한 저의 의견입니다. 그러면 대강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대강절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예언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을 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8:22말씀입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역사를 지우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그라운드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은 지울 수 있어도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발자취는 지울 수 없지 않습니까?
이사야도 이 사실을 모를리 없습니다. 그는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망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고통 가운데서 예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울 수 없는 이들의 역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 첫 9:2절 말씀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빛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대강절은 지우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리어 밝히는 빛인 것 같습니다. 빛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밝혀집니다. 사실 저 보고 가장 중요한 발명품을 말하라 하면 저는 전기불을 말하고 싶습니다. 전기불로 인해 얼마나 우리 인생이 바꾸었습니까? 대강절은 어떻게 보면 빛입니다. 그래서 대강절에는 촛불을 밝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무엇을 비추었을까요? 3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두가지 이미지가 나옵니다. 환한 빛 가운데서 그들은 두 가지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추수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탈취물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추수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탈취물의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남의 열매를 거둔다는 뜻입니다.
먼저 추수의 기쁨부터 생각해 볼까요? 남들 보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어두움 가운데 지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씨를 뿌렸습니다. 대강절은 그동안 뿌린 씨들이 언젠가 추수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새롭게 하는 절기입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남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서 때로는 숨어서 씨를 뿌렸지만 언젠가 그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기대를 새롭게 하는 것이 대강절입니다. 어두웠던 시간을 지울 필요가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뿌렸던 씨앗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대강절은 곧 지나간 삶이 완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새롭게 하는 절기입니다. 씨가 싻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웃을 도울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왼손이 한 일이 드러날 날이 옵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의 빛이 비추일 때 모든 열매는 환히 빛날 것입니다. 삶은 완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어둠 가운데서 작은 씨앗들을 뿌리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았죠. 그러나 기뻐하십시요. 언젠가 거둘 것입니다. 기쁨으로 기다리십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도 작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완성으로 향하는 씨앗이었습니다. 대강절의 빛은 완성되어가는 우리의 삶의 열매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빛은 또 한 가지를 보게 해 줍니다. 이 빛 아래서 탈취물의 즐거움을 나누게 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미디안의 날이라는 것은 바로 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드온의 사건은 전무후무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300명군사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르고 탈취물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한번만 가능한 역사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이순신 장군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똑 같습니다. 초신자분들은 기드온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그 때 300명으로 뽑혔던 군인들을 모두 부러워하며 지었습니다. 그것은 1회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강절의 빛은 우리의 이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기드온 사건은 1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곧 기드온이 탈취물을 나눈 즐거움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의 사건이 1회적 사건이 아닌 것을 이미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0:9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서 미디안 군대를 무찔렀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기드온 사건은 민10:9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지 그 때만 있었던 1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곧 인생은 통쾌한 한판의 승리극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 완전한 승리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10:9절 말씀을 기드온이 우리를 위하여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삶의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원수가 쳐들어 옵니까? 그럴수록 나팔을 부세요.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탈취물을 나누는 날이 올 것입니다. 대적 앞에서 나팔을 불면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드온 사건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일들을 무수히 계획하시고 계십니다. 인생은 백전백승이라는 것입니다. 곧 대강절의 밝은 빛은 온전한 승리의 날을 비추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어두움 가운데서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원수들 앞에서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기드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해 볼까요. 대강절은 자신이 어두운 가운데 뿌린 씨앗이 열매 맺기를 확신하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완성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원수들 앞에서 나팔을 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드온과 같이 영원한 승리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러한 대강절의 삶을 살았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접할수 있었습니다. 2007년 TED(Technology Entertainment and Design) Conference가 탄자니아에서 열렸습니다. 연사들로는 빌 클린턴(Bill Clinton)대통령, 빌 게이츠(Bill Gates), 그리고 노벨 수상자들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 중 열아홉 살 청년이 연단에 올랐습니다. 이 청년의 연설이 끝나자 회의장은 박수와 환호로 뒤덮였습니다. 이 청년은 아프리카 말라위의 농촌에 살고 있는 위리엄 캄쾀바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오래 전에 1년 치 학비 80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났고 대신 하루 종일 옥수수 밭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겐 감사할 게 많다고 고백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꽃도 주셨고, 산도 주셨고, 그리고 바람도 주셨어요. 말라위 하늘에는 항상 바람이 있어요.”
일을 마치면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가던 이 소년. 14살 때에 미국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책속에서 처음으로 풍차를 보았고 바람을 이용해서 전기를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부터 풍차를 만들기 위해 쓰레기장을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만드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마드느냐고 미쳤다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마을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주어모은 트랙터의 fan, 자동차 부품, 자전거 본체, 플라스틱 파이프, 오래된 자전거 발전기를 활용하여 발전기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전등 하나뿐이었지만 나중에는 다양한 전기장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요즈음에 집 앞에 핸드폰 충전을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말합니다. 청년은 고백합니다.
“내가 속한 환경이 아니라 내가 택한 감사가 날 꿈꾸게 했어요.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놀라운 일을 해난다고요. 감사와 함께 내 꿈은 지금도 자라고 있어요.”
이 청년은 2009년 아마존닷컴 선정 2009년 올해의 책 10권에 들어있는 책인’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뿌린 감사와 노력의 씨앗이 빛을 받았을 때 추수의 기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과거의 삶은 지우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계속 삶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전한 승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강절의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기다림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는 이러한 아기가 탄생될 것을 예언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700년 전에 대강절의 축복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지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를 대강절의 축복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의 모습이 보여주는 가장 강한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완성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아기의 모든 것은, 먹고 웃고 울고 뛰고 장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성장하기 위함입니다. 완성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아기예수는 완성으로 향하는 기쁨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아기예수와 더불어 완성으로 향하는 기쁨과 기다림이 곧 대강절의 축복입니다. 곧 인생은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 그대로 완성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대강절을 맞이하여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사랑의 씨앗을 뿌리십시다. 어두움 가운데서도 실패 가운데서도 승리의 나팔을 부십시다. 대강절은 한 손으로 씨앗을 뿌리고 한 손으로 나팔을 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찾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뿌린 사랑의 씨앗과 우리가 분 나팔소리는 언젠가 놀라운 축복으로 우리를 찾아 올 것입니다. 완성의 그 날을 기다리십시다. 주님 안에 완성된 우리 자신을 볼 것입니다. 대강절의 빛으로 나오는 자들은 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강절의 빛을 바라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룬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를 많은 분들이 보시는 줄 압니다. 저도 잠시 본 적이 있는데 세종대왕에게 원수를 갚으려던 어느 청년이 세종대왕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지금은 태평세대가 아닙니까?”
이 때 세종대왕은 또 큰 소리로 답변합니다.
“나라가 태평세대가 되려면 왕의 마음은 많은 번민과 고통이 가득차게 되느니라.”

물론 드라마입니다. 이 말을 세종대왕이 했다고 아무도 안 믿을 줄 압니다. 저는 잠깐 이 대화를 들으면서 “야, 이 작가 대단하네. 뭘 좀 아네.” 생각했습니다. 순간 모든 리더들의 아픔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저의 이 마음은 끝내 주님에게 가서 멈추었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태평세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한편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들의 이 지저분한 삶을 다 지우지 않고 도리어 온전히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초를 겪으셨겠습니까? 지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저분한 것들 사이에서 귀한 씨앗을 골라 완성시키는 것은 많은 고뇌와 고통을 요구합니다.
교우 여러분, 대강절은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번민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오시는 아기예수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수고는 열매 맺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탈취물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에는 평화가 가득찰 것입니다. 이사야의 노래와 함께 나팔을 불며 아기예수를 기다리십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