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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의 때?

날짜 : 2011.07.10
예배명 :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무화과의 때?
성경본문 : 마가복음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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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베리가 지은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어린 왕자가 말합니다.
“내 장미꽃 하나만으로 수천 수만의 장미꽃을 당하고도 남아. 그건 내가 물을 준 꽃이니까. 내가 고깔을 씌워 주고, 병풍으로 바람을 막아 주고, 벌레를 잡아 준 것이 그 꽃이었으니까. 그리고 원망하는 소리나 자랑하는 말 혹은 점잖게 있는 것까지도 다 들어 준 것이 그 꽃이었으니까. 그건 내 장미 꽃이니까.”

자기가 손수 키운 꽃은 수많은 다른 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한 대사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장미꽃은 이제는 자기의 가슴에 함께 살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장미꽃은 자기가 돌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장미가 자기를 돌보았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원망하는 소리나 자랑하는 말까지 점잖게 잘 들어주는 최고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아니 행복에 겨워 말합니다.
“그건 내 장미꽃이니까.”
이런 장미꽃을 가지신 분들은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무화과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꽃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아시는 것이 본문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금방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입니다. 호산나 찬송을 받으시면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날은 곧바로 베다니라는 마을로 가서 하루밤을 쉬셨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마감하시는 마지막 1주일이 막 시작된 것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소중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1주일임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이튿날이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지 이튿날을 의미합니다. 첫날 베다니에서 머물고 이튿날 베다니를 나오시는데 갑자기 허기지셨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가 보였습니다. 종종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 먹으셨던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보이길래 가까이 가 보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열매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를 당황케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무화과 철이 아닌데 예수님은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많은 제자들이 듣는 자리에서. 제자들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한 적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제자들은 많은 의혹을 안게 되었지만 저주를 뒤로하시고 떠나시는 주님을 멍청히 바라만 봅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성 안에서 또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애꿎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한채 이상한 하루를 보냅니다. 3년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대한 것입니다. 이제 일을 다 치루시고 다시 성밖으로 나가십니다. 19절말씀입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래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다시 베다니로 가는 길입니다. 놀라운 사건을 목격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채 마른 것을 보고.”
아침에 저주했던 나무가 뿌리채 말라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요? 예수님이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고 했는데 열매가 없어서 홧김에(?) 라고 할까요? 저주하셨습니다. 저녁에 다시 와 보니 말라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똥그레집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의 질문의 포인트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죽은 자도 살리시던 예수님을 늘 가까이 하던 베드로인데 나무 하나가 말라죽는것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의 능력을 잘 압니다. 주님께서 축복하면 복이 내려오고 저주하면 저주가 내려 옴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는 아직 때가 아니라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애꿎은 무화과를 주님께서 저주하셨는데 이제야 여쭙니다만, 좀 이해가 안 됩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런 무화과나무에게 정말 저주가 떨어졌군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22-2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베드로는 더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질문의 포인트를 제대로 잡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궁금한 것은 기도의 능력이 아니라 왜 애꿎은 무화과를 죽였는냐는데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엉뚱하게 믿음의 기도가 얼마나 능력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왜 예수님은 기도의 능력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셨는지우리도 궁금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줄 압니다. 말라죽은 나무도 온 세상에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이제는 가 본지 오래라서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이스라엘 땅은 비가 잘 안 와서 말라 비틀어진 나무를 어디든지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마른 나무에게 축복한 후 다시 살아나게 하신 후에도 똑같은 말씀을 할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죽은 나무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살아난 나무를 제자들이 본후에 달려와 말합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신 나무가 살아났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렇게 하셨더라면 성질이 급한 베드로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잘 아실텐데 왜 하필 반대로 일을 벌이셨나요?

광고사업을 하는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고에 성공하려면 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는 멋진 광고를 만들어서 그 상품에 매료되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방법을 채택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한 번 보고 나서 질리게 하는 광고라고 합니다. 아직도 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광고 하나가 있는데 아마 Wendy’s광고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햄버거를 손에 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Where is the beef?”
이 광고가 저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번 보고 질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이런 광고를 만들었지 생각하게 해서 늘 그 회사를 기억나게 했던 광고입니다. 나이드신 할머니를 모델로 했으니 모델료도 별로 비싸지 않았을줄 압니다. 그런데 최고의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살펴 보면 예수님께서 애꿎게 아무 죄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죽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무화과 나무를 말라 죽이게 함으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면 이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역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제 당신은 1주일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을 벌이셨는데 이상한 방법으로 벌이셨습니다.
저주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축복의 능력을 새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관심은 저주보다는 축복에 있음을 25절 말씀을 통해 은연중 알려주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기도는 사랑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꼬리표를 붙여 놓은 것일줄 압니다. 곧 축복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아니 도리어 혐의가 있는 자를 용서하라는 것은 바로 저주받을 자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 그룹의 제자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멍청한 제자들 같으면 멀쩡한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예수님의 흉내를 낸답시고…. 기도는 사랑의 기도여야 한다는 주님의 멧세지를 잊은 제자들입니다.그런데 아마 이런 제자들은 없었을줄 압니다.
두번째로 지혜로운 제자들 같으면 다음 부터는 말라 죽는 무화과나무를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축복합니다.
그중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신이 나서 매일 같이 말라 죽은 나무들을 찾아 다니면서 축복합니다. 또 축복합니다. 또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일도 계속하다 보니 신기한 맛이 없어집니다. 하루 이틀 게으름을 피웁니다. 말라 죽는 나무를 보면서도 그냥 지나칩니다. 전에는 쫓아 다니면서 찾았었는데….
어느날 밤입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지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을 봅니다. 모두 울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축복해 주길 바라며 점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베드로가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이웃을 축복하지 않는 삶이 바로 이웃을 저주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축복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저주하고 있는 삶인 것을 깨닫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제야 무릎을 치면서 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단순히 축복의 능력이 있음을 알려주심이 아니었습니다. 축복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저주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믿는 사람은 저주의 능력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할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지 않을 때 온 세상은 저주의 능력으로 가득찬다는 것입니다. 곧 일석이조의 교훈이 담겨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온 세상에 저주가 가득찬 이유는 우리가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남기고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처럼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 나는 너희를 떠나지만….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너희가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온 땅은 황폐해지리라.”

교우 여러분,
우리들에게는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런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세상은 황폐해집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능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오래 함께 할까요? 이 능력이 영원히 함께 할까요?

반딧불 벌레를 잘 아실줄 압니다. 반딧불은 어른 벌레뿐만 아니라 알이나 애벌레나 번데기 때에도 빛을 낸다고 합니다. 반디는 알일 때는 빛이 매우 약하고 어른 벌레처럼 깜빡거리지는 않지만 날이 갈수록 빛은 밝아 집니다. 알에서 나온 애벌레는 물속에 떨어져 기어다니면 다슬기를 먹고 살지만 여전히 몸에 빛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애벌레는 여섯 번이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비가 내리면 땅을 파고 들어가 땅속 벽에 몸에서 나오는 액체를 발라 방수를 하고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잡니다. 이때도 역시 빛을 냅니다. 몸은 번데기로 변했지만 빛은 여전히 나오고 애벌레 때보다 더 밝게 빛을 냅니다.
땅속에 들어간 지 40일쯤이 지나면 번데기는 몸을 계속 움직여서 얇은 허물을 벗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됩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한 하늘을 날며 반디는 초여름 어둠을 신선한 빛으로채웁니다. 12개월 정도를 지내며 알에서 애벌레로, 번데기로 성장한 뒤, 날개 달린 반디가 되어 날기 시작하면 단 15일 동안 일생 가운데 제일 밝은 빛을 낸 후 바로 숨을 거둡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날아다니는 반딧불은 단지 15일간 빛을 발합니다. 주어진 15일 동안 열심히 빛을 발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도 15일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도 빛이 주어져 있습니다.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나라에 가면 다른 빛이 주어지겠지만 이 땅을 비출수 있는 빛은 15일 동안 주어집니다.
15일 동안 우리는 산을 움직일수가 있습니다. 바다를 메꿀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를 죽일수가 있습니다. 아니 살릴수가 있습니다. 무성한 열매를 맺게 할수가 있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15일 동안만….

지난 6월마지막 주간에는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저는 총회에 다녀 오느라고 참관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 100명의 자녀들이 참여하였고 선생님들과 도우미들이 학생들의 반이 되는 50명이 뜻 깊은 시간에 동참하였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의 섬김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동안 ECC의 완공과 더불어 국내선교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네 차례 이웃 주민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B40곧 부르크라인 주민의 40%가 주님을 섬기게 되는 날을 사모하면서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 수고는 반듯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바다를 메우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 보스톤 지역은 원래 바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Back Bay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것은 한 때 바다였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보스톤에는 이미 바다가 메꿔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또 한번 일어날 것입니다.
올해는 해외선교를 두군데 다녀오게 됩니다. 이미 봄에 콜롬비아를 치과팀이 다녀왔으며 곧 이어 교육팀이 다녀 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니카라과에 선교팀이 파송됩니다. 산이 움직이고 바다가 메워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이외에 간과하면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게 하고 원동력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들 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쉽게 간과할수 있는 모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반이 있습니다. 구역모임이 있습니다. 최근에 시작한 은사공동체가 있습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반과 구역모임과 은사공동체는 또 다른 우리들의 장미꽃입니다. 우리들의 축복을 기다리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이 공동체가 잘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떽쥐베리의 장미꽃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들려드릴까요?
“내 장미꽃 하나만으로 수천 수만의 장미꽃을 당하고도 남아. 그건 내가 물을 준 꽃이니까. 내가 고깔을 씌워 주고, 병풍으로 바람을 막아 주고, 벌레를 잡아 준 것이 그 꽃이었으니까. 그리고 원망하는 소리나 자랑하는 말 혹은 점잖게 있는 것까지도 다 들어 준 것이 그 꽃이었으니까. 그건 내 장미 꽃이니까.”
소그룹은, 구역 모임은, 은사공동체는 여러분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장미꽃은 우리가 준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우리들에게 되돌려 줄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는 산이 움직이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다가 메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능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공동체에는 때가 없습니다. 언제나 때입니다. 이 공동체와 더불어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하십시다. 15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깐요.

말씀을 거둡니다.
남은 15일을 한국을 위하셔 사용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그는 26살에 한국에 대한 소명을 안고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가 한 일들을 이 시간 다 소개할수는 없습니다. 그의 한국에 대한 꿈이 담긴 말을 소개해드리고져 합니다.
“나는 오늘 내 눈앞에서 새로운 한국을 명약자명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새 한국은 악정과 무지와 미신의 굴레로부터 정치적,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히 해방된 그런 나라, 곧 크리스천 코리아입니다.”
그의 한국에 대한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축복의 기도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의 산이 움직였으며 바다가 메워졌습니다. 그분의 능력의 기도는 역사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5일을 한국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는 15일간 한국을 위해 빛을 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15일간만 살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15일은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15일을 저희들의 자녀들을 위해 사용하십시다. 이웃주민들 특히 Brookline 주민들과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 사용하십시다. 니카라과와 콜롬비아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끝으로 우리들의 소그룹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하십시다. 성인성경공부, 구역, 은사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십시다. 우리도 산을 움직일 것입니다. 나무를 무성하게 할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15일간 사랑의 빛을 발하십시다.
우리가 만일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자녀들은, 부르클라인 주민들은, 니카라과와 콜롬비아주민들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믿음의 소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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