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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한 사람

날짜 : 2011.06.0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소중한 한 사람
성경본문 : 마태복음 18장 1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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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사실, 잘 아시겠지만, 세 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태종의 뒤를 잇는 이조 제 4대 왕이 되었습니다. 세째 아들이지만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비가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어느 날 문밖에서 들었습니다.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누가 아니랍니까. 충녕이 맏이었어야 하는데.”
충녕은 세째 아들이고 양녕은 첫째 아들입니다. 그 후 큰아들인 양녕대군이 사람만 보면 히죽히죽 웃어대고 미친 사람처럼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종 임금의 맏아들로서, 앞으로 임금자리에 오를 왕세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습니다. 양녕은 그럴수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대궐 담을 뛰어 넘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오가는 사람을 때려 눕히기 일쑤였습니다.
양녕이 미친 짓을 하자 둘째 효령은 자기에게 세자책봉의 기회가 올줄 알고 눈가림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양녕은 어느 날 밤, 어둠을 타고 몰래 효령의 처소를 찾았습니다. 효령을 나무라며 자신이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충녕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고는 양녕이 물었습니다.
“앞으로 자네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효령은 말 없이 손을 모아 인사를 합니다. 불교에 심취합니다. 산속으로 사라집니다. 결국 세째 아들인 충녕이 왕세자가 되고 후에 임금이 됩니다. 한글 창시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세종대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 수요여성공부에서 제가 드린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민족의 조상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답하시길 ‘당파싸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파싸움이 우리 한 민족의 삶에 많은 피해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당파싸움의 혼란한 틈바구니 사이에 또한 곳곳에 귀한 보석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중 한글창시가 귀중한 보석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빛나는 보석은 바로 세째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한 두 형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이 어쩌면 한글을 창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세종대왕도 형들이 자리를 양보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더욱 훌륭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두 형들이 위대한 왕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형들은 성공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왕족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세종대왕의 두 형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수는 없을까요? 우리 주변에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삶을 살수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는 세종대왕의 두 형들보다 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먼저 15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권고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지금 주님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가 충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성공적 삶을 살려면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찾아가서 대면하며 권고하십시요. 성공적 삶의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실패할까봐 감히 시도를 못합니다.
그러면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해야죠? 실패할 경우에 대해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권고를 안 들으면 거기서 포기하지 말고 한 두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와 함께 두세 증인을 이루어 권고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면 도합 두 세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포함되니까. 결국 나 말고 한 두 사람, 나 포함해서 두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개는 여기서 해결이 되겠죠. 그러나 해결이 안 되었을 경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두 세 사람으로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아예 상대를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얻지는 못했어도 이렇게만 하면 그것이 바로 성공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최소한 성공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도전을 하였고 두세 증인으로 도전을 하였고 끝으로 교회를 통해서 도전을 해 보았으니 성공적 삶의 일면을 누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웃의 죄에 대해서 잘 대처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문맥 그대로 생각하면 ‘땅에서 맨다’ 곧 이웃의 죄를 땅에서 매면 곧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고 땅에서 풀면 곧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한다 라는 맥락으로 밖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의 죄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부러 매어서는 안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두 세사람이 모여서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도 매이니까요. 이렇게 당황해 하고 있는데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순간 어리벙벙해집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해 봅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무엇을 해도 어떤 일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이웃 정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정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정죄하여야 하지만 실로 두 사람의 소중함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있는 곳은 주님이 계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더불어 이웃을 정죄하는 것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도리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당시 사람들은 종종 한두 사람을 찾아 나서곤 하였습니다. 언제, 무엇을 위해서요? 이웃을 정죄하려고…. 이 당시 주님은 이웃을 정죄하려고 한두 사람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동안 보스톤에서 공부하는 목사님들이 뉴욕에 가서 교회를 섬기시던 몇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한 세분쯤 된 것 같은데…. 금요일까지 공부하고 토요일에 뉴욕에 가서 주일까지 교회를 섬기고 주일 밤늦게 보스톤으로 차를 타고 올라오곤 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졸렸겠습니까? 졸음을 이기려고 통성기도도 해 보고 찬송도 크게 불러 보고 이것 저것 다 해 보았는데 그래도 계속 졸음이 몰려 오곤 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졸음을 이기는 비결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차 안에서 세 사람이 어느 교회내지 목회자를 비판하는 이야기만 하면 졸음이 쏵 도망가는 것을 체험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때 일을 회상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이웃을 정죄하는 것 요즘도 너무나 사람들이 흥미로워합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러면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이웃을 정죄하지 말라 두 세 사람이 모여 서로 위대한 사람이 되라’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이웃을 정죄하는 것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곧 서로서로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면서 모인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감싼다는 것은 최고의 모습을 이웃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서로서로 최고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은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십니다. 두 번째로는 서로가 위대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서로를 존경하기 때문에 아울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체험을 하기 원하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체험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한 사람입니다. 나 말고 한 사람만 더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소중한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사람을 빨리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석헌 선생님이 소중한 한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그 사람을 가지셨습니까? 그런데 이 그 사람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함께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일 때 바로 우리가 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바로 서로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모이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요?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여기시는 분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구역식구, 같은 위원회에 속하신 분, 늘 옆에 앉아 함께 예배를 드리시는 분 바로 그 분들이 그 사람이신 분들은 참으로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아니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지금 언급해드린 분들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분들을 만나시는 분들이 참으로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그 때 나도 또한 그 사람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이 시간 잠시 여러분과 주님 안에서 가장 자주 만나시는 분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서로서로를 위대하게 만드시는 분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를 보아도 같은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직 안 믿는 분까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직장일로 자주 만나시는 분 그로서리에서 자주 만나시는 분 그 분들이 바로 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한국 땅에서 최초로 순교하신 분이 대동강에서 순교하신 토마스 목사님이십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관으로 탑승하게 되어 한국으로 향합니다.
1866년 그는 성경을 최대한 많이 준비한 이후, 한국을 향했지만 그가 탄 배의 선원들이 한국 병사 3명을 죽게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배를 공격, 불에 태웠으며,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강으로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한국인에 의해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토마스도 자신의 성경을 가지고 물에 뛰어들어 뭍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그가 아는 한국말로 예수, 예수를 부르짖었습니다. 미쳐 뭍에 도달하기 전 그는 어느 한국 사람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그 때 토마스 선교사님을 죽인 병사 퇴교 박춘권은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후에 토마스 선교사님에게 성경책을 받은 박춘권은 전도사가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님은 죽어 가면서 성경책을 자기를 찌르는 박춘권에게 내어 민 것입니다. 박춘권이 바로 그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아마 토마스 선교사는 늘 두 세 명과 더불어 그 사람을 만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 한국의 그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끝내 자기의 목을 베는 박춘권에게 ‘그 사람’의 눈길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위한 ‘그 사람’이 탄생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서로 함께 그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전에는 이웃 안에 있는 잘못을 정죄하려고 ‘그 사람’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웃 안에 있는 위대한 모습을 그리면서 ‘그 사람’을 외치십시다. 특히 우리가 정죄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 사람들이 되어 가십시다. 정죄했던 사람들 안에 있는 아름다운 그 사람을 발견하십시다. 그 때 내가 정죄했던 사람도 내 안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주님 안에 한 형제 자매가 되어집니다. 우리는 서로서로가 소중한 한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그 사람으로 보는 훈련을 하십시다. 세상에 나가서 바로 그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십시다. ‘그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분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When you touch someone, you are touched by (누구를 터치할 때 당신은 동시에 터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 사람’이라는 눈으로 터치할 때 우리는 동시에 터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위대한 삶의 주인공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서로 ‘그 사람’이라는 눈길로 대하십시다. 공동체 밖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같은 눈길을 보내십시다. 우리 함께 그 사람들이 되십시다. 우리를 그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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