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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십자가

날짜 : 2011.03.1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구약의 십자가
성경본문 : 사무엘하 7장 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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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텔랜트 최불암씨를 아시는 분이 많을 줄 압니다. 그가 주연을 맡았던 어느 연극에서 실패한 뒤 도망치듯 군에 입대합니다. 훈련 중 날아온 오발탄으로 병을 얻어 우울한 상태에서 자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때 한 선배의 말이 떠오릅니다. “불암아 노인역은 너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배의 한 마디 말로 인해 그는 최고의 텔랜트가 됩니다.
한 사람 예를 더 들까요? 이제 막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사순절하면 생각나는 화가는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그가 그렇게 훌륭한 화가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 그의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넌 무슨 일이든 해낼수 있어. 할머니는 너를 믿는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나를 나로 만들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감사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과연 아무도 안 계실까요? 오늘 함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놀라운 말을 찾아 가 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다윗을 다윗되게 하는 장면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말씀으로 인해서 위대한 다윗이 되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7: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위치한 곳은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모든 강대국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평화로운 왕국을 이룩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너무나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마음으로만 감사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선지자 나단을 부릅니다. 2절 말씀입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곧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로서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것을 사용하겠다고 성직자에게 와서 말한다면 이를 거부할 성직자가 어디있겠습니까? 나단도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당연히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그냥 성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기뻐 받으실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좀 시작이 안 좋죠. 그렇지만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을 성전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성전을 지으라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성전을지나 안 지나 상관없이 위대한 왕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직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쯤 와서는 혼자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성전을 안 지어드려도 이처럼 나를 크게 축복하시겠다고 하시니 도리어 나는 아주 멋진 성전을 지어 드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단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지만, 12절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자신의 아들을 통해 자신의 위대한 나라가 이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더더욱 신이 납니다. ‘내 아들을 통해 내 나라가 더욱 견고해진다면, 기왕이면 지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배나 더 크게 성전을 지어드려야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흥분 가운데 있는데, 13절 말씀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처음부터 낌새가 좀 이상했는데 혹시가 역시입니다. 자기가 손수 짓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위대한 이름이 될뿐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해 나라가 더욱 견고해 지니 말입니다. 섭섭해 하고 있는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성전은 안 지었어도 자기의 나라가 영원히 보전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크게 감격합니다. 다윗은 크게 감격은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지만 한편 다윗은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을줄 압니다. 큰 실망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거절 앞에 크게 실망합니다.

물론 본문에는 다윗이 실망했다라는 말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실망했으리라는 것을 두 가지 근거로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순서에 있습니다. 다윗이 실망할 것 같지 않았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야 야, 너는 안 되. 네 아들이 성전을 지을거야.” 대신 이런 말 저런말로 구슬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이 지을거야.”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당시 중동지방의 문화는 왕이 나라를 평정하면 자기가 그 나라의 왕임을 증명하는 방법에 그 땅의 신의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왕이 성전을 지을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왕들이 나라를 평정하면 어느 왕이나 성전을 지었으니 다윗도 얼마나 짓길 원했겠습니까?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고 나단도 그것은 당연지사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정중한 거절을 하십니다. 반면 정중한 거절을 받았지만 다윗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축복을 받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다윗은 인간적으로는 큰 실망을 가슴에 담지만 한편으로는 최고의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다윗 되게하는 위대한 말을 주신 것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더 좌절됩니다. 다윗을 향하여 하나님은 너무도 멋진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노인역은 너 따라갈 사람이 없다”라는 선배의 말 조차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더라면 우리도 다윗같이 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불만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해 주실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너무 엄청난가요?
신학적으로는 보면, 이 말씀은 메시야 왕국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메시야 왕국의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자들은 메시야 왕국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저는 신학적인 지식은 없지만, 그래도 다윗은 나단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들었으니 다윗을 위한 말씀이 되었지 어떻게 우리까지 포함시킬 수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쇄뇌 당하는 기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는데요. 아니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작은 요구도 무수히 하나님께 거절당하곤 하는데요. 이제는 더 이상 기도할 재미도 없습니다. 하도 많이 거절 당해서요.”

교우 여러분, 왜 우리는 다윗 같은 위대한 말을 들을수 없을까요? 다윗 같은 위대한 말은 커녕 번번히 “No”라는 말씀만을 듣곤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일 많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생각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NO.” 다윗이 받은 응답과는 너무도 차이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제일 많이 들은 응답이 이것이지 않습니까? “NO.” ‘NO’의 응답에 저려 있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받은 말씀은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할줄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도 그 위대한 응답을 받기 전에 받은 응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NO”였습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YES’하실줄 알았습니다. 혼자서 많은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을 것입니다. 나단에게 말하니 나단도 당연하다는 듯이 성전건축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흥분해서 잠도 설치면서 어떻게 성전을 지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잠도 잘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 느닷없이 나단이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좋은 소식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져 온 첫 응답은 ‘NO’였습니다. 큰 상처를 받습니다. 물론 끝은 좋았지만….. 사실 다윗도 ‘NO’의 상처 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상처와 비교도 안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받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큰 실망의 No가 엄청난 YES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NO”라는 응답을 수없이 받아 오신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도 “No”라는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윗과 우리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No’라고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잠시 후 위대한 약속을 아니 엄청난 약속을 주셨을 때 거기에 대해 감히 ‘YES’로 응답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 아니겠습니까? 저 같으면 하나님께 이렇게 답변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것은 너무 엄청납니다. 그런 축복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성전만 짓게 해주세요. 그래서 제가 나라를 통일한 것을 모든 후손들이 알게 해주세요.”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대답하죠? 오늘 본문 말씀 다음 귀절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은 그 엄청난 약속에 “YES”하면서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이 놀라운 믿음을 우리 함께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잠시 주제를 바꿔서,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들이 우리 말을 안 들을 때?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가 무엇을 간절히 원할 때 그러나 그것을 줄수가 없을 때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것을 구하더라도 자녀가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가 ‘NO’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지금 다윗이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나라를 평정했으면 당연히 성전을 지을 권리 내지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NO’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구약을 읽다가 보면 자주 이야기가 점프를 하곤 합니다. 물론 믿음으로 아멘 하면서 받으면 되지만 그래도 신학적으로 너무 점프를 할 때가 있곤 합니다. 이야기에 빈 칸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이면 열 점프하는 곳 바로 이 빈 칸들은 십자가로 연결이 되곤 합니다.
오늘의 다윗의 이야기도 큰 점프가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에게 NO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생각도 할 수 없는 약속을 하십니다.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터무니가 없는 이 약속을 다윗은 냉큼 믿고 받아드립니다. 다윗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본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무엘하 기자가 빠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다윗은 당신에게 “NO”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안에서 큰 고통의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이 직설적으로 ‘NO’하지 못하고 이 말 저 말로 질질 끌다가 ‘No’라는 말씀을 하실 때부터 느꼈을지 모릅니다. ‘No’하시는 하나님은 무척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바로 2000년 후 십자가에서 확인이 된 것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No안에서 도리어 십자가의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필립 앤씨가 ‘하나님께 실망’이라는 책을 썼죠. 서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실망’이라는 책을 쓴다고 어느 모임에서 이야기하였더니,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자기의 이야기를 전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실망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NO”라는 응답을 수시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애꿎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수없이 “NO”를 하고 계실까요? 이것을 즐거워하시나요? 그럴리는 없으시겠죠. 다윗의 축복에 동참케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은 회개와 절제와 구제의 기간입니다. 아울러 이 기간 우리는 전보다 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게 됩니다. 아니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회개와 절제와 구제의 향기와 어울려져서 하나님께 드려 올려지는 절기입니다.
저도 언젠간 하루도 빠짐 없이 사순절 기간 새벽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나름대로 저의 진로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순절만 지나면 아니 사순절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무엇인가 환히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이 왔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사순절을 보냈습니다. 40일 후 받은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NO.’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큰 실망이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다윗에게 ‘NO’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NO’하십니다. 그 이유는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에게 주신 엄청난 약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올 해 연초에 많은 것을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몇 가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응답이 없으십니다. 아직도 응답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No’를 많이 받은만큼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더 많이 만난 것입니다. 영원한 축복을 더 많이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사순절은 어떻게 보낼까요? 수없이 많은 기도제목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올릴까요? 그래서 더 많은 ‘No’를 받고 더 많은 축복을 받도록 말입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기도 제목이 있으면 사순절 기간 마음껏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두 가지 기도제목이면 족합니다. 한 두 가지 기도를 올린 후 남은 시간은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번 사순절 묵상집을 보시면, 마지막 기도제목으로 Brookline주민들을 위한 기도제목을 넣었습니다. Brookline주민들을 위해서 기도드리십시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사회적 명망과 부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No’로 응답되어도 그것은 ‘No’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함께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마지막 결론부분에서 영성가 놀위치의 쥴리안 (Julian of Norwich)의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마지막 부분만 다시 소개해 드리면,
“피가 계속 흐르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으로 인해 나는 주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더욱 친절하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후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쥴리안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게 된 사회적 정황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에 흑사병이 심하게 돌았습니다. 아울러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둘로 갈라져서 교황이 둘이 생겨난 때였습니다. 이 당시 모든 크리스챤이면 기도했던 제목은 이 두 가지입니다.
쥴리안도 당연히 이 두 가지 정황으로 인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NO,’ 하지만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나는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교회가 갈라져도 그는 절망치 않습니다. 기도가 응답이 안 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십시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십시다. 때로 우리들의 기도제목이 아직 응답 안 된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보다 더 큰 더 고통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다. 주님 앞에 나오시는 분들에게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아니 우리들뿐 아니라 우리가 위해서 기도드리는 분들에게 주십니다. Brookline 주민들에게 주십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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