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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날짜 : 2011.03.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성경본문 : 이사야 65장 17-25절, 5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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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이 지은 ‘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얼마전 가게를 처분하고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이태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아무도 살지 않은 옛 어머니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 의자에 앉아서 쓸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다시 힘을 내야지. 어머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그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면서 의자를 쓰다듬습니다. 그 의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손수 나무로 만드신 것인데, 어머니는 늘 이 의자에 앉아 텃밭 위로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곤 하셨습니다. 그는 옛집을 떠나면서 의자를 차에 실었습니다. 집에 와 의자를 깨끗이 씻어 베란다에 내 놓았습니다.
“아니 무슨 이런 지저분한 걸 가져왔어요?”
그의 아내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오히려 의자에 앉을 때마다 어머니의 온기가 따스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흐린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백화점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오후입니다. 울적한 마음에 딱 한잔만 하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앉을 때마다 의자가 자꾸 뒤뚱거립니다.
“아니 이 의자가 왜 이렇게 흔들거리지? 이런 의자에 엄마가 평생을 앉아 계셨단 말이야?”
그는 술기운 때문인지 의자가 자꾸 뒤뚱거리자 짜증이 났습니다.
“에이, 다리를 잘라내든지 해야지 안 되겠어. 다리의 길이가 고르지 못하니까 이 모양인 게야.”
그는 집안을 뒤져 톱을 꺼내 의자의 한쪽 다리 끝을 조금 짤라냈습니다. 그러나 의자는 여전히 뒤뚱거렸습니다.
“아니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다시 다른 쪽 의자 다리를 조금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의자가 뒤뚱거립니다.
“허, 그것 참 이상하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또 다른 쪽 다리를 잘라보았습니다. 그래도 의자는 여전히 뒤뚱거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아, 이거, 내 톱질 솜씨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잘될 때까지 어디 끝까지 한번 해보자.”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대중을 해가며 네 군데나 되는 의자 다리를 골고루 잘랐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보면 의자는 여전히 어느 한쪽이 짧아 자꾸 뒤뚱거립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술기운 탓도 있지만 이 정도 의자 하나 제대로 해놓지 못한다 싶어 더욱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이대로 의자를 베란다 밖으로 확 집어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유품이나 다름 없는 의자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뚱거리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날은 더욱 흐렸습니다. 어느새 창밖에는 비가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자를 한쪽 구석으로 밀치고 슬며시 지친 몸을 베란다 바닥에 눕힙니다. 처량한 빗소리가 그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네 다리 길이가 고르지 않아서 의자가 뒤뚱거린 게 아니라 베란다 바닥이 고르지 않기 때문에 의자가 자꾸 뒤뚱거렸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까지도 알지 못하고 줄곧 빗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인생의 우매함을 풍자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란다 바닥이 고르지 못해서 의자가 뒤뚱거렸는데 애꿎은 의자 다리만 자르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주 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로 지킵니다. 사순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의자의 다리를 짤라서 고르게 하는 절기일까요?
사순절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지키기 시작한 것인데 사순절기간 행하여지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 및 참회, 금식 및 절제, 마지막으로 구제입니다. 간단히 참회와 절제와 구제라고 표현할까요? 참회와 절제와 구제는 마치 의자의 다리를 자르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참회는 죄를 자르는 것이고 절제는 몸을 자르는 것이고 구제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자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의 전통으로 생각한다면 사순절은 자르는 기간인 것 같습니다. 참회와 절제와 구제의 세 다리를 골고루 자르는 것이 사순절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잘 자른다고 할지라도 베란다가 온전치 못하면 계속 뒤뚱거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란다를 고쳐야 하나요? 그것은 너무도 큰 작업인데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순절의 전통은 잠깐 뒷전에 밀어 놓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참 사순절의 정신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찾아 봐야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특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역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의 대표적 주제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가지 주제는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7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 것은 헌 하늘 헌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 창조는 없어지고 새 창조의 세계가 펼쳐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새로운 창조를 하실까요? 1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을 보고 누가 기뻐합니까?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인간을 위해서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또한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마지막으로는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인간이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과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꽤 소중한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홍종명 화백의 그림입니다. 화가들에게 이러한 그림이 있다고 얘기하면 모두들 아주 소중한 작품이고 현 싯가로도 꽤 나갈 것이라고들 말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그중에서 어느 화가는 말하기를 그림을 그린 화가가 세상을 떠나면 그 값이 더 오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연지사겠죠. 더 이상 그 분의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담은 그림이 탄생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 집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띄는 곳에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이런 소중한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그런 생각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여 뿌듯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화가들에게 그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저는 그 그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홍종명 화백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선생님이셨습니다. 평범한 미술선생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저의 형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를 당신의 방으로 부르셨습니다. 저의 형님에게 당신의 그림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림 한 점을 집어 드시기에 알겠다고 하면서 제가 달랑 손에 들고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그림을 소중하게 다루어야지 하면서 구석구석 찾으시면서 그림을 싸 갈 종이를 찾으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냥 들고 가면 되지 무슨 종이에 싸나 생각하면서, 결국은 종이에 싼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 분의 그림을 평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미국에 와서 들은 소식인데 그분의 그림을 훔치기 위해서 그분 화랑에 강도가 침입해서 화백님의 머리를 무기로 내리 쳤다는 소식까지 접해 들었습니다. 그 때야 저는 조금씩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그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다리가 고르지 않은 쓸모 없는 의자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다리가 고르지 않은 우리들을 위해서 멋진 세계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만드십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사순절은 우리의 몸을 자르기 전에 우리의 몸을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절기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19절 이하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닌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모습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늘 눈물과 울부짖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20절에 보면 일찍 죽는 어린아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소원은 바로 오래 사는 것이었습니다. 21절에 보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 것이라고 하였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 당시 이들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는 자기들이 지은 집에 남들이 와 살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기 손으로 지은 집에 살고 싶었겠습니까? 하여튼 이러한 상징적인 말들이 24절까지 이어집니다.
곧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너무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을 그대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원을 고치거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이루시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마음껏 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스운 얘기 하나만 해드릴까요?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셔서 하늘나라에서는 골프를 마음껏 칠 수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너무도 기뻤습니다. 기뻐하는 그에게 곧 하는 말이 내일 아침 하늘나라 골프장에 티 타임이 정해져 있다 말하였다고 합니다.
내일아침 티타임이 정해진 것은 별로지만 하늘나라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다.
하여튼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좋아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마음의 소원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니 말입니다. 이처럼 행복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카드 한 장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들의 예상을 뒤엎는 새 하늘과 새땅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들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까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자기들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지만 상상을 초월해서 이뤄지는 놀라운 곳임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자기들이 꿈꾸어 왔던 것보다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신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들의 꿈은 하나님의 꿈과는 비교도 안되는 것을 알게됩니다. 골프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자기들의 꿈은 사라집니다. 골프의 꿈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이 놀라운 세계 안에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것임을 깨닫고 감격해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언젠가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세상에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의 기쁨의 백성이 되어서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의자의 다리를 자르듯 철저하게 자신을 자른 사람들이 이 좋은 곳으로 들어갈까요?
이사야서에는 크게 세 가지 주제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가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하신다는 주제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의 타락입니다. 이사야서 전체에 곳곳에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한 장이 멀다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수 있을까요?
여기에 세 번째 이사야서의 주제를 살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입니다. 고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53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타락한 죄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는 고난 받는 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바로 고난 받는 메시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 신화가 나옵니다. 신화에 따르면 프로크루테스는 그리스 아티카의 강도로 아테네 교외의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강도질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침대에는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 신화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기의 침대에 맞는 사람들을 찾았는데 물론 아무도 그 침대에 맞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하나님도 어떻게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와 비슷한 점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크게 다른 점은 하나님은 죄인들을 침대에 놓고 짜르신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메시야를 침대에 눕히시고 짜르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하도록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 대신 침대에 누우셔서 팔과 다리가 절단이 되는 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팔과 다리가 절단이 되셨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가장 최고의 창조의 세계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이 주님을 깊게 만나십시다. 절단된 팔과 다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주님의 피를 체험하십시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만큼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당신의 기쁨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기간 우리는 참회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을 통해 팔과 다리가 짤리는 작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만이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들의 작은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고통에 잠시 동참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고통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신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들의 이 모습으로 인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노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나눕니다.
“주님의 머리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피가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가시면류관으로 인해 피는 파편처럼 튕기고 있었습니다. 피덩어리는 금방 혈관에서 나온듯 보였습니다. 피가 계속 흐르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으로 인해 나는 주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더욱 친절하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기간 주님을 만나십시다. 주님의 짤린 팔과 다리에서 흐르는 주님의 피를 체험하십시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참회와 절제와 구제를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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