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문안하라

날짜 : 2011.01.2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문안하라
성경본문 : 로마서 16장 1-16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10123.wmv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 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추장은 궁금해하는 손자에게 설명했습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동정, 죄의식, 열등감, 거짓, 자만, 우월감,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답하였습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듣고 어떤 것을 읽고 어떤 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화냐 기쁨이냐 질투냐 평안이냐 슬픔이냐 사랑이냐를 결정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듣고 읽고 본 것에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하루의 삶이 대개 결정이 될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꼭 QT를 하자고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루 종일 QT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치 하고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생활하다 보면 또 듣게 되고 보게 되고 읽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늘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읽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은 먹이만 골라서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위대한 과학자 토마스 에디슨은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그가 왜 그토록 인류역사의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소년 시절에 열차 안에서 신문을 팔며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기차의 차장은 에디슨에게 화물열차의 한구석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에디슨은 자기가 좋아하는 화학 실험을 위하여 구석에다 약품을 진열해 놓고 자기 나름대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기차가 커브 길을 속도를 내서 달리다가 에디슨의 화학약품이 떨어지며 차 안에 불이 붙었습니다. 불을 간신히 끄고 나자 화가 난 차장은 에디슨의 화학실험 약품을 창밖으로 다 내던지고 에디슨의 따귀를 한차례 때렸습니다. 그로 인해 에디슨은 나중에 거의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에드슨의 친구들은 에드슨에게 전문 의사에게 수술을 받도록 권면하였으나 좀처럼 허락하지 않다가 마침내 수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귀 수술을 받기로 한 약속 시간이 되었으나 에디슨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에드슨은 그 시간에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수술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귀머거리로 그대로 있는 것이 바깥세상의 시끄러움과 복잡함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되어 연구생활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발명왕이기 전에 실패의왕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11만 번의 실험에 실패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한번 성공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전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축전기를 발명하기도 한 것뿐입니다. 그 많은 실패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발명가가 되게 한 것인줄 압니다.
그런데 만일 세상의 소리를 잘 들었더라면 그는 몇 번 실패하고는 손을 놓았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가 그토록 실패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소리에 예민하였더라면 그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아우성에 도중하차하지 않았을까요? 에디슨은 그야말로 무엇을 먹어야할지를 잘 결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귀를 막고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에디슨처럼 세상의 귀를 막고 살아야 하나요? 세상의 것을 다 듣고 보고 읽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삶을 살수 없을까요? 물론 쉽지는 않을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방법을 말씀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문안하라.” 영어로는 “Greet.”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귀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입을 열어야 합니다. 문안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로마서가 우리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아마도 성경 66권중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당시 기준으로 의하면 방대한 책입니다. 16장이라는 분량보다도 그 내용으로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진주로 가득 찬 책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신학을 묶어 놓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대한 책을 마치면서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문안하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바울신학’ 이라는 과목을 들었었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끝나면서 학생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멋진 강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사도바울은 그 교수님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끝내길 원했을까요?
“사도바울 신학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문안입니다. 함께 문안합시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한 자들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안하라.”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문안하라고 사도바울이 권면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 2절 말씀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여기에는 문안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영접하고 그가 필요하는 것을 공급해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이 뵈뵈가 로마서 편지를 들고 로마로 간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분은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분을 영접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hospitality를 베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말로 문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찾아온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리는 것이 바로 문안하는 방법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이행하는 첫 번째 길인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13절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 말씀을 쓴 후 이 말씀을 읽은 자들에게 첫 번째 대상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겐그레아 교회에서 이 편지를 사도바울이 쓴 이 편지를 손에 들고 온 자매 뵈뵈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그네를 영접하십시다.

그러면 두 번째 문안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3, 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아주 유명한 부부입니다. 부부가 함께 복음에 헌신한 대표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 놓은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목숨까지도 내 놓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신앙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과연 문안이 필요할까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5, 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사도바울이 그 어려움 가운데서 디도가 옴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는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였다는 것입니다. 디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신앙이 아주 돈독하여 목숨까지 내 놓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이러한 문안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말씀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아볼로라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는데 요한의 세례만 가르치기 때문에 따로 불러서 아볼로에게 성경을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곧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말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문안. 아무리 신앙적으로 훌륭해 보여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문안.

그러면 세 번째로 문안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대표적인 사람 몇 사람만 나열해 드립니다.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많은 사람들이 이 당시 소외되어 있는 여성성도분들이었습니다. 곧 소외된 성도들에게 문안할 것을 사도바울은 종용하고 있습니다. 외롭게 주님을 섬기다가 받는 문안은 놀라운 힘이 있음을 사도바울은 익히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분들을 찾아 문안드리십시다.

네 번째로 문안이 필요한 사람은 없을까요? 1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끝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과 문안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교인들에게 벌써 세계의 모든 교회는 문안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있으니 너희도 서로 문안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사도바울은 친히 자기를 통해 로마교인들에게 보내는 문안 인사를 대신 21-23절에 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레오날드 스윗(Leonard Sweet)이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려면 50억 ‘교인’을 잠재적 회중으로 인식하면서 목회를 시작해야 한다.”
저는 조금 표현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려면 50억 교인들에게 문안하는 목회를 하여야 한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수없이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좋은 먹이만 먹으려하면 에디슨처럼 청각 장애인이 되던지 헬렌켈러처럼 청각뿐 아니라 시각 장애인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로 서로 좋은 것을 퍼주어야 합니다. 좋은 말을 들려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곧 끝없이 서로서로 문안하여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15장까지의 방대한 신학적 편지를 마친 후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한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서로 서로 좋은 것을 먹여야 함을 알았습니다. 서로 문안하여야 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지난 일 년간 몇 번 로마서의 말씀으로 설교를 하였나 찾아 보았습니다. 4번을 하였었습니다. 4번을 하였는데 이 4번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위해서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이었다고요? ‘성도의 문안.’ 성도의 문안이 없이는 들은 말씀도 잃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했던 로마서 설교가 두 주전에 드렸던 8장을 본문으로 했던 설교입니다. 키 본문만 다시 봉독해 드리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크리스챤들에게 최고의 축복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2011이라는 오아시스를 주셨는데 그 오아시스에는 주님이 함께 계시고 또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이 충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실험을 해 보진 않았지만 상상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 주간에 어느 교우님은 열 번 문안을 받았거나 문안을 했습니다. 다른 교우님은 한 번도 문안을 하거나 받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누가 삶이 변하였겠습니까? 성도의 문안을 받은 사람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성도의 문안은 우리들의 마음 밭에 내리는 촉촉한 이슬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촉촉히 젖은 땅에 말씀이 뿌려질 때 아름다운 결실이 맺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누가 나에게 문안 안 하나 전화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요? 계속 이메일을 체크하던가 우편배달원을 기다려야 하나요?
지난주는 우리 모두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이상 이에 대해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입관 및 추모예배를 준비해야 했고 또 주일 설교를 준비하여야 했습니다. 주일 설교 준비를 하는데 유혹이 생겼습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려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설교 준비 전에 한통의 짧은 편지를 쓰곤 합니다. 도저히 편지를 쓸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누구에게 쓸지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만 양해를 구하자’ 하면서 그냥 설교 준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또 다른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써야지.”
보통은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는 이메일로 간단히 써서 보냈습니다. 보스톤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에게 보냈습니다. 한 문장만 소개해 드립니다.
“목사님으로 인해 이곳 보스톤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알고 계시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을 쓴 후, 제가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안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문안을 통해서 먼저 내가 스스로에게 좋은 먹이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받으시는 분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기에 사도바울이 그토록 ‘문안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문안할 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선물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써도 답장을 못받을까봐 꺼려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1년에 수십 통의 문안편지를 보내지만 제가 보낸 분으로부터 받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분들로 부터 자주 받곤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편지를 쓰는 사람에게 위로가 넘쳐납니다. 한편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러니 그야말로 문안은 일석이조의 아름다운 역사를 창출합니다. 게다가 답장까지 보내주면 1석 4조가 되는 것이겠죠.

교우 여러분, 2011년도의 오아시스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이를 더 아름답게 하시기 원하시지 않습니까? 함께 문안하십시다. 서로 하는 문안을 통하여 우리의 오아시스에 흐르는 샘물은 더욱 맛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주에는 1년간 연수를 마치시고 한국에 가신 교우님으로부터 문안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지내고 있던 저에게는 오아시스의 샘물이었습니다. 한 부분만 읽어드리면,
“귀국 후 이런 감사의 글을 보내려 했던게 벌써 반년이 지나갔군요. 아직도 아쉬운 게 있다면, 교회 건축 완공을 보지 못하고 온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알게 되어 행복한 보스톤 유학 기간이었고 교회를 통해서도 많은 걸 배웠음을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기회 되는 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문안드리십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좋은 먹이를 허락하십시다. 서로에게 좋은 먹이를 허락하십시다. 일주일에 한번 꼭 이웃에게 문안하는 삶을 사십시다. 우리는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발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전세계 교인들이 오늘 이 시간 보스톤 한인교회 교우님들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