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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날짜 : 2010.11.0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성경본문 : 하박국 3장 16-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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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슈이치라는 일본 의사가 있습니다. 호스피스 곧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머무는 병원 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입니다. 환자들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매일 보면서 지내는 분입니다. 처음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을 때입니다. 일반 병원보다 우선 많은 환자를 보아야 했습니다. 약 4배의 환자를 치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표현하기를 죽는 사람들을 만드는 공장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표현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병원 직원들의 이직률은 높다고 합니다. 의사의 가장 큰 기쁨이란 환자가 웃는 얼굴로 퇴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인데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그런 기쁨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많은 직원들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만성 피로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때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입원하였습니다. 전망 좋은 병실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온화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평온한 시간 속에서 할머니는 편안한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회진 시간 슈이치 의사는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할머님, 좀 어떠세요?”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던 할머니는 천천히 눈을 뜨면서 말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혹시 불편하거나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저는 행복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온화함이 가득한 눈으로 방긋 웃습니다. 어떤 날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라며 두 손을 포개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도 했는데, 할머니의 인사를 들으면 직원들은 ‘행복 주사’라도 맞은 듯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곤했습니다. 직원들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할머니의 눈동자에서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있는 듯 영혼의 안식을 느끼곤 했습니다. 환자에게서 좀처럼 느껴보지 못하는 안온함이었습니다.
때로는 아들이 찾아오면 할머니는 말합니다.
“또 왔구나. 바쁠텐데, 엄마는 괜찮아. 많이 바쁘면 안 와도 된단다.”
“엄마는 그런 말이 어딨어?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건데.”
“괜찮아, 엄마는 진짜……., 엄마는 행복해.”
아들은 의사에게 말합니다.
“글쎄 저희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네 저희들에게도 항상 행복하다고 하세요. 그리고 스태프도 챙겨주시고요. ‘지금 바쁘지 않냐?’ ‘피곤하지 않냐?’ 하시면서요. 혹시 어머님이 예전부터 즐겨 쓰던 말이세요? ‘행복’이라는 말요?”
“글쎄요.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부쩍 행복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 같아요.”
“아 네. 근데 정말 듣기 좋은 말이에요.”
“하하하. 그러게요. 행복하다는 말, 들으면 기분은 좋지요.”
어느덧 사람들은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할머니의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치유 받고 싶어 병실을 더 자주 찾는 듯 했습니다. ‘행복’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행복의 인사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 곁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늘어나는 사람 수만큼 미소와 이야기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온기는 고스란히 병원 스태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할머니는 소천 받으셨고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행복의 인사를 남기고 떠난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눈물과 미소가 어우러진 작별 인사가 모두 끝났을 때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 하셨어요. 이렇게 저희 어머니를 돌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어머니와 저희들은 정말 행복했어요.”

온 세상을 행복으로 가득 차게 했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우울할 수 밖에 없는 호스피스에서 최고의 행복의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서 그 어두운 곳을 최고의 행복으로 가득 차게 한 삶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살아야할 삶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할머니가 늘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라의 큰 위기를 내다보면서 고백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에서 이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 보았습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패망 당하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리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은 두 가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이 쳐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16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또 하나를 알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 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곧 하박국이 보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벨론의 침략이요. 또 하나는 끝까지 말씀듣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입니다. 말씀 듣기를 거부하는 민족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그는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런데 두려워 떨고 있는 하박국에게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갑자기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두려워 떤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합니다. 최고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을 결단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기뻐할 것을 결단한다는 것은 바로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최고로 행복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하박국이 보여주는 행복의 모습은 기뻐하기로 결단만하면 기쁨이 생기는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려고 결단만 하면 기쁨이 생기는 삶 이것이 최고의 행복의 삶이 아닐까요? 그로인해 하박국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행복의 향기를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할머니처럼 말입니다.
하여튼 하박국은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어디선가 행복이 솟아 오릅니다. 희망이 솟아 오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보입니다. 바로 그 포도나무에 기쁨이라는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감람나무에 즐거움이라는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외양간에 좌정하고 계신 여호와의 모습이 보입니다. 외양간에 좌정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자기의 삶에 또한 좌정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무어라 이유를 알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기쁨을 결단할 수 있다는 것 이처럼 큰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행복에 젖은 그는 끝으로 최고의 고백을 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기에 자기의 발이 사슴의 발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최고로 멋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사슴이 뛰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에게 ‘사슴’하면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약 십년전에 스토니 포인트(Stony Point) 수양관에 갔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었습니다. 뒤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저의 인기척을 느꼈던지 사슴이 훌훌 뛰어서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보시면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교우님들 뒷마당에 종종 사슴이 나타날 텐데 그 모습은 사슴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넓은 언덕에서 훌훌 뛰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멋진 한 면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뛰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멋지게 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안에 들어오셔서 훌훌 뛰는 모습 이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금 하박국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최고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모습이 바로 처음 소개해드린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할머니 안에서 하나님께서 훌훌 뛰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장 우울할 수 밖에 없던 곳을 가장 행복한 곳으로 뒤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호스피스를 가장 높은 곳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호스피스를 행복의 집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축복을 받는가? 어떤 사람들이 하박국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기뻐하기로 결단만 하면 기뻐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할머니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드문 부친이 목사님이셨습니다. 할머니를 소개하는 슈이치 의사는 할머니에게 배어있는 기독교인의 향기를 언급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임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박국처럼 사슴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4절 말씀이 한 실마리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 짐이니이다.”
율법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을 통탄해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박국이 가슴 아파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임박한 유다왕국의 멸망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더 큰 아픔이었을줄 압니다. 율법에 해이해진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켜 멸망한다면, 반대로 율법을 지키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래도 많은 사람이 율법을 안 지키면 이스라엘이 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사슴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도 사슴의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하박국은 이미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멸망 앞에서 도리어 사슴의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은 멸망하지만 그 안에서 자기처럼 사슴의 춤을 추는 자들이 되자고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높은 곳으로 가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결단을 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곧 은연중에 하박국은 어디에 처해 있던 말씀으로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사슴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민족은 망해도 율법을 지키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켜야 하는 율법 중에 어느 율법이 제일 중요할까요? 어느 율법이 사슴의 발을 소유케 할까요? 어떤 신학자는 구약의 율법의 수가 600개가 넘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여튼 500개 이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이 해이해졌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것으로 예언을 시작하였는데 마지막에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양과 소의 이야기로 마치고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물질의 이야기로 마치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물질에 관한 것 말고도 수없이 많은데…. 그렇게 많은 율법 중에 지금 하박국은 물질에 대한 예를 들고 있다는 것은 좀 생각해 볼만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온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될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고백할 수 있는데 하박국은 가족이 아니라 물질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에 대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모든 율법을 지키는데 가장 쉬운 관문이기에 기본적인 관문이기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정신은 십계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십계명을 불러 드릴테니 이중에 물질에 관한 십계명이 어떤 계명인지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셋째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넷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다섯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 일곱번째는 ‘간음하지 말라.’ 여덟째는 ‘도적질하지 말라.’ 아홉째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 열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에 물질에 관한 것이 최소한 두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덟째 계명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또 하나는 마지막 열 번째 계명입니다. 열 번째 계명을 전체 그대로 읽어드리면,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 중에 두 계명이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계명이 물질에 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 중 어떻게 보면 제일 마지막 계명이 제일 소홀히 해도 되는 계명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제일 지키기 쉬운 계명일줄 압니다. 제일 쉬운 계명부터 차례로 지켜 나갈 때 점차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삶을 살 때 사슴의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 사실을 하박국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쉬운 계명부터 잘 지켜 나갔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계명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어느 날 민족의 큰 환난을 앞에 두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는데 놀라운 평안이 찾아옴을 체험합니다. 기쁨에 대한 결단만 하면 기쁨이 샘솟는 것을 체험합니다. 사슴의 발을 소유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에 찬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오늘은 청지기 헌신주일로 지킵니다. 청지기 헌신주일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주일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행복해” 노래하는 자가 되기 위한 말씀을 듣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가던 그 곳을 행복의 전당으로 바꾸게 하는 참 신자가 되자고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이 참 행복자의 삶의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요? 말씀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율법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말씀이 무엇일까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물질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삶에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쁨과 즐거움은 외부적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내부적 사건입니다. 기쁨의 결단만 하면 기쁨이 오게되어있습니다. 즐거움의 결단만 하면 즐거움이 옵니다. 이 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이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잎 클로바와 네 잎 클로바가 있습니다. 이 두 클로바의 꽃 명은 다릅니다. 세 잎 클로바의 꽃 명은 ‘행복’입니다. 네 잎 클로바의 꽃명은 ‘행운’입니다. 행복과 행운 중에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두 클로바를 가지고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행운을 찾기 위해 행복을 짓밟는다.’ 네 잎 클로바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선 클로바 밭에 가야죠. 가서 어떻게 합니까? 가면 세 잎 클로바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네 잎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 하죠? 세 잎 클로바를 밟으면서 찾지 않습니까? 네 잎 클로바의 꽃명이 뭐라구요? ‘행운.’ 세 잎 클로바의 꽃명은, ‘행복.’ 곧 행운을 찾기 위해서 ‘행복’을 짓밟으면서 인간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행운을 바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느덧 행복을 잃어갑니다. 행복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행운은 차지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을 잃지 않습니다. 이들은 행운을 쫓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사슴의 발을 소유하게 됩니다. 행복한 사슴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우 여러분, 행운보다는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사슴의 발을 소유한 자가 되어 가십시다. 참 행복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역경도 우리의 행복을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는 행복의 결정체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함께 행복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자녀들의 성인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큰 삶의 계곡을 만나기도 한다. 그 때 점프(Jump)하라. 네가 생각한 것처럼 넓지 않을 것이다.”
아주 귀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점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슴의 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행복자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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