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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날짜 : 2010.10.1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성경본문 : 누가복음 15장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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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가 친구 아이들과 놀다가 아빠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니가 먼저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최고야.”
동생이 덧붙입니다.
“그래 우리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에 질세라 듣고 있던 한 친구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지붕에도 올라갈 수 있어.”
언니가 대꾸합니다.
“우리 아빠는 한 손으로 지붕에 올라갈 수 있어.”
다른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이야기를 말하는 분이야.”
순간 자매는 서로를 쳐다봅니다. 말싸움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동생이 먼저 말합니다.
“그래? 우리 아빠는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할 수 있어. 우리 아빠는 매일 밤 동물 인형 이야기를 만들어 내셔.”
이제 언니가 덧붙입니다.
“호랑이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너희도 한번 들어 봐야되. 들어 봐. 우리 아빠와 내가 정글에 있었지. 무척 위험한 정글이었어. 갑자기 호랑이가 튀어 나오면서 우리를 놀라게 했어. 그런데 그 호랑이는 착한 호랑이였어, 우리들의 친구가 되길 원하는…. 밤에는 인형이 되어 나와 함께 잠을 자기 시작했지.”
이제 자매는 아빠 자랑에 이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한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전쟁에 참가했었지. 아빠는 아주 나쁜 사람인 히틀러(Hitler)를 무너뜨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지. 우리 아빠는 훈장을 받았어.”
자매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최고인 것 같은데 더 이상 증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말싸움에서는 졌습니다. 그러나 자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빠가 최고입니다.

이 자매의 아빠가 이 대화를 들었더라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물론 마지막에는 할 말을 잃은 딸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겠지만, 끝까지 아빠를 최고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딸들의 아빠는 최고로 행복한 아빠임에는 틀림이 없을줄 압니다.
아빠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행복한 자녀들이 될줄 압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아버지를 자랑하는 깊은 마음이 있으면 무척 행복한 사람일줄 압니다. 아빠나 자녀나 모두 행복해집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에 소개된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탕자의 비유인데, 사실 요즘 신학자들은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기를 싫어합니다. 탕자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행한 가정의 비유’라고 붙이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제목을 붙이면 불행한 가정이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 되는가 생각하면서 이 비유를 접하게 될줄 압니다. 지금 이 시간 ‘탕자의 비유’라는 생각을 지워주시고 오늘만이라도 ‘불행한 가정의 비유’라고 생각하시고 말씀을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아셔서 자세히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곧 동생이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먼저 달라고 합니다. 이 때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졌을 줄 압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안 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 아들과 대화도 별로 통하지 않았고, 그것도 괜찮은데 늘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아이들 하고 놀 때 아이들이 서로 자기 아버지 자랑을 하면 이 아들은 도리어 아버지 흉을 보곤 했던 아들이었습니다. “너희 아빠는 그렇게 훌륭하구나. 우리 아빠는 돈만 좋아해!” 이러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설득합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다 컸잖아요. 이제 제 발로 살아가야죠. 이 농장은 형님 것 아닙니까? 저의 분깃을 지금 주시면 제가 그것으로 사업을 크게 해서 아버지께 효도해 드릴 겁니다.” 아버지는 이 말에 속아 넘어 갔을까요? 아버지는 속아 넘어가는 척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내줍니다. 그러나 전혀 기대는 걸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흉보고 다녔던 아들입니다. 돈을 안 주고 같이 살아 봤자 아들로부터 불평만 더 커질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언젠가 줄 돈인데 언젠가 없어질 돈인데 당신이 살아있을 때 빨리 탕진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내어줍니다.
이제 일하기를 싫어하는 아들 곧 아버지가 시키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아들인데 돈을 가지고 밖에 나갔으니 그 돈을 탕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아는 아버지는 시간만 있으면 밖에 나가서 아들이 오나 기다립니다. 이처럼 전혀 아들이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걸지 않은 것을 20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돈을 다 써 버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거지처럼 돌아 오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 오늘일까 내일일까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상한대로 아들이 돌아옵니다. 뛰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자기는 구두쇠가 아닌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제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자기를 험담하는 것은 중단할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새롭게 부자지간의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꿈에 졌습니다. 아버지는 그토록 바라던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생일대의 소원성취를 합니다.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데 불현듯 걱정이 앞섭니다. 큰 아들 생각이 납니다. 큰 아들은 늘 같이 지내곤 있었지만 큰 아들도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은 아들이 밖에 나가서 “우리 아버지는 돈만 좋아해” 말하게 된 이유는 바로 형 때문이었습니다. 형이 늘 동생에게 그렇게 투덜거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형이 돌아오다가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형은 도리어 분노합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자기의 재산까지 또 돌아온 동생에게 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였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또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때는 밖에서 기다렸다가 기쁨으로 달려나간 반면에 첫 번째 아들에게는 잔치자리에 앉아 있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집 밖으로 나옵니다. 불쌍한 아버지입니다. 불평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소연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이것으로 비유는 끝납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독자에게 맡겨집니다.

교우 여러분, 이 후 이 첫째 아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둘 중에 하나이겠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집에 들어가 잔치에 참여하던지 아니면 들어가기를 거부하던지…. 여러분은 어떻게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아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자기 아버지 자랑을 실컷하게 되었을줄 압니다. “우리 아빠 최고” 떠들며 돌아다닙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첫째 아들입니다. 형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진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될까요? 단지 동생의 축제에 참여함을 통해서 아버지의 참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아버지와 형은 같이 살아도 물과 기름으로 산 것입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이 갖고 있었던 큰 차이를 살펴보면 첫째 아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그 차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29절 말씀에서 아들의 견해를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사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첫째 아들은 바로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첫 째 아들의 이 말이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아들은 아버지와 일방적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율법대로 살면 당연히 아버지는 자기를 위해 축제를 벌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삶은 자기의 행위에 근거한 축제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31절에 나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여기에서 아버지는 그동안 물과 기름의 관계이었던 아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진정 나와 함께 있었더라면 너는 나의 것이 모두 너의 것이었음을 알았을텐데…,” 아픔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은 아버지와 늘 함께 거했지만 실제로 함께 거하지 못했습니다. 형은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 하나님의 것이 전부 나의 것이 되는데 한번 해 봄직하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 거합니까? 율법대로 살면 되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첫째 아들이 거기에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아야 할 줄 압니다. ‘내 것과 네 것이 구분이 분명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그렇지 않은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내 것은 내 것, 네 것은 네 것,’ 아니면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아니면 ‘내 것은 네 것, 네 것도 네 것.’ 여러가지 말이 나올 수 있을 줄 압니다. 하여튼 아들의 것과 아버지의 것이 구분이 없는 것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비유에 나오는 가정이 불행한 가정이 된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것이 모두 아들의 것으로 인정하지만 아들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먼저 돈을 받고 집을 나갔습니다. 형은 열심히 일해서 자기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아주 불행한 가정입니다. 불행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는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러면 아버지와 함께 거한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해 졌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곧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것을 소유하시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십시요. 아니 하나님께 드리십시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때 우리는 바리새인이 됩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갚음을 받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축제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나요? 갑자기 은행 통장에 끊임없이 돈이 넘쳐나게 하시나요? 몇 번 이런 마음을 품어 보았는데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주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우리 각자를 통해서 일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다 나의 것이 되는 확신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는 자들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소명대로 사는 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십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그러기에 그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살아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축제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한 가족된 삶입니다.

사 계(The four seasons)라는 유명한 바이올린 콘체르토(violin concerto)를 잘 아실 줄 압니다. 작곡가는 비발디(Vivaldi)인데 비발디는 신부였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신부가 되게 합니다. 비발디가 건강이 안 좋은 것이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워낙 음악에 소질이 있었지만 어머니로 인해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된 후 가슴이 늘 아파왔다고 합니다. 신부의 일을 그만 두고 다시 작곡자의 길을 걷습니다. 가슴이 아팠던 것이 멈추고 훌륭한 사계를 비롯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신부가 되어 율법의 명령에 매인 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발디에게 원하셨던 것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소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명을 행할 때 그는 하나님의 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최고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길 원했습니다. 신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참 소명을 주셨습니다. 대 음악가가 되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을 모두 소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교우 여러분, 소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되는 축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고를 열고 쏟아 부어주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여러분은 “하나님 최고” 소리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한 가족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넘치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은 무궁무진함을 체험하십시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온 세상을 가득채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자가 되십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에는 신부로 소명을 받은 사람의 글을 소개해드릴까요? 브라질의 카마라(Camara)라는 신부의 글입니다.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고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고 축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고 신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신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나는 8살 때부터 그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주신 생각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는 건축업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교회에 일 년에 한번이나 나갈까 말까 하는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겁에 질려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신부가 된다고 말하는데 신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줄 아니? 신부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단지 신앙과 가르치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야.’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알아요. 그래서 나는 신부가 되는 거예요.’”
그는 최고의 신부의 생활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이처럼 글에 담은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최고의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소유한 사람이 아닐까요? 이 때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소명의 삶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한 가족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기 전 진정한 소명의 삶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소명에 관해서 아드리엔느 본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언제나 우리들의 삶에 메아리친다.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그 소명은 교회의 어느 사역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명을 소유한 사람들을 교회 안에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늘 소명을 지키도록 기도드려야 한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소명의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드리십시다. 끝까지 그 소명을 지키는 자가 되도록 기도드리십시다. 소명대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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