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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날짜 : 2010.10.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성경본문 : 요한 1서 5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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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중 게티스버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863년 7월4일 리 장군 휘하의 남군은 북군의 총공세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다가 포토맥 강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밤새껏 내린 폭우로 강이 범람하여 도저히 건널수가 없었습니다. 리 장군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들 뒤로 의기 충천한 북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어서 항복할 도리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군을 궤멸시켜 전쟁을 종결할 호기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즉시 특사까지 파견하여, 미드 장군에게 작전 회의 같은 건 생략하고 즉시 남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미드 장군은 링컨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작전 회의를 열어 시간을 지체했고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즉각적인 공격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넘쳐흐르던 강물은 줄어들었고 남군은 유유히 강을 건너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격노한 링컨은 미드 장군에게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미드 장군님께;
나는 리 장군의 탈출로 비롯될 앞으로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중요성을 장군께서는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적은 바로 우리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그들을 추격했더라면 전쟁을 종결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기회를 상실한 현재로서는 전쟁의 종결을 기대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 병력의 3분의 2 정도도 사용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장군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장군께서는 너무도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 역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드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 보고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이젠 모가지구나?(짤리게 되었구나?)” 그러나 그는 전역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미드 장군은 이 편지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는 부쳐지지 않았습니다. 링컨의 사후에 그의 서류함 속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왜 부치지 않았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단지 많은 추측만 난무합니다.
교우 여러분도 한번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링컨은 편지를 부치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 누구도 알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볼까 합니다. 링컨이 훌륭한 크리스챤이었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크리스챤들이면 가져야할 두 가지 중요한 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링컨은 이 두가지 면을 다 갖춘 사람이었을줄 압니다. 1절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사도요한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 와서 그렇지 처음 이 말씀을 듣는다고 가정하십시다. 얼마나 혁신적인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동안 육신의 부모님만 우리를 낳으신 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실제로 우리를 낳으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부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부모를 소유한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될까요?
사도요한은 또 말씀하시길,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사랑합니다” 하는 자마다 아버지에게서 난 자들을 또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새로운 혁명적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챤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부모를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이웃사랑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무거울리가 없죠. 모든 이웃이 다 하나님에게서 낳았는데 곧 같은 형제 자매인데 무거울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으로 링컨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고 말씀드렸는데, 링컨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신 분입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링컨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실마리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로 인해서 편지를 부치지 않게 하지 않았을까요? 잠시 후 이 실마리에 대해서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면 이외에 그 무엇이 링컨을 링컨되게 하였을까요? 두번째 실마리는 4, 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4절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의 두번째 특징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증거는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5절말씀에는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세상의 승리자는 한 그룹의 사람들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만이 세상의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들에게는 승리는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들의 이름은 바뀝니다. ‘승리자.’ 지금 사도요한은 크리스챤의 두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이웃사랑과 승리자.’
그러면 여기서 어느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승리를 보장합니까? 믿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죠? 여기에서 승리자의 정의가 필요합니다. 승리를 하였기에 승리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승리자이기에 승리를 하는 것인가?
질문을 좀 바꿔 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기에 승리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어떻게 승리자가 됩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전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실패와 패배를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셨습니다. 이미 실패와 패배를 승리로 뒤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실패와 패배는 승리의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실패와 패배를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보다 먼저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승리의 도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실패와 조롱이 우리를 좇아 올 때 우리는 이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바로 링컨이 소유한 신앙이었을줄 압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링컨의 수수께끼를 잠시 풀어 보겠습니다. 링컨이 격노한 가운데 편지를 쓰고 왜 부치지 않았겠는가? 물론 저 나름대로의 씨나리오입니다.
이웃을 늘 사랑하는 링컨은 대통령의 편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편지 하나가 한 사람의 장래를 크게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받는 사람의 가슴에 얼마나 큰 못을 박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 이런 습관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쓴 후에는 결코 그냥 부치지 않는다. 최소한 2, 3일 기다려 본다.’
요즘은 편지보다는 이멜을 많이 사용하시는줄 압니다. 만일 링컨이 요즘 대통령이었더라면 이멜로 편지를 쓰고는 임시 보관함에 아마 쎄이브해 놓곤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이웃 사랑의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이멜이나 편지는 한 시가 급하게 부쳐야겠죠. 반면 좋지 않은 내용의 편지나 이멜은 당장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이틀 아니면 한 두주 기다려 보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첫걸음일줄 압니다. 아마도 링컨시대에 콤퓨터가 있었다면 그의 콤퓨터를 그의 사후에 점검해 보면 임시 보관함에 들어 있는 멧세지가 수없이 많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우 여러분, 써 놓고 못 보낸 편지, 임시 보관함에 쎄이브된 이멜의 수가 많을수록 이웃사랑의 실천자가 아닐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이 아닐까요?

계속 시나리오를 펼쳐가 보겠습니다. 링컨은 자신의 원칙대로-물론 제가 만든 씨나리오입니다만- 2, 3일이 지난 후 편지를 부치기 전 다시 읽어 봅니다. 편지를 쓸 때 떠오르지 않았던 미드 장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때는 자기의 명령에 불복하는 장군의 모습에 격노하였는데, 이제 차분히 돌아보건데…. 그동안 전투에서 수고했던 장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모습이 떠 오릅니다. 그리고 자기는 전쟁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점차 자신의 참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그토록 격분했던 이유는 자기의 자존심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더 깊게 숨겨져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부하 장군이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했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의 문제였습니다. 링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음을 새삼느낍니다.
남북 전쟁은 눈에 보이는 전쟁입니다. 한편 눈에 보이는 전쟁 가운데 수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곧 자신은 잠시 자존심의 전쟁에 휘말렸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보이는 전쟁은 장군에게 맡깁니다. 대신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먼저 승리합니다. 편지를 부치지 않음으로서 그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자존심의 전쟁에 먼저 승리자가 되어갑니다.
자존심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된 링컨은 두번째 승리를 체험합니다. 보이는 전쟁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자체가 바로 승리임을 체험합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상관없습니다. 자기를 낳으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승리 그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자들은 져도 이기고 이겨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결국 보이는 전쟁에도 승리자가 되어 갔습니다. 그야말로 링컨은 승리자였습니다. 한편 그의 승리는 외로운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웃 사랑과 함께 어우러지는 승리였습니다. 그는 미드 장군과 함께 승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니 미드 장군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승리의 길로 가게 한 것이 아닐까요?
링컨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링컨은 빨리 승리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격노한 가운데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쓴 편지를 설합에 넣고 생각해 봅니다. 미드 장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웃 사랑없는 승리는 전혀 의미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랑의 흐름에 자신을 맡깁니다. 진정한 삶의 승리가 찾아 왔습니다. 세상 전쟁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세상 전쟁에 관계 없이 자신은 승리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전쟁도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는 이런 멋진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기를 낳은 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낳은 이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셨다면 두 가지를 잊지 마십시요. 이웃 사랑과 승리의 삶.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승리의 삶이 절실히 필요한 때 살고 있습니다. 1991년도 조사한 자료를 소개해 드립니다. 20년전 자료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자료일줄 압니다.

미국인들 중에 13%만 십계명을 믿는다고 합니다.
열명중에 아홉명은 정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중에 5분의 1이 13살 전에 동정을 잃는다고 합니다.
천만불만 주면 7%의 사람들이 살인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Aids 환자의 3분의 일이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0년 보다 지금이 더 악해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악해도 세상은 세상입니다. 세상이 이길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을 결코 이길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사도요한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그러면 왜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승리의 통쾌함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승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위한 승리를 구할 때 참으로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삽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들의 이름은 승리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과 승리는 동전의 양면인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승리는 참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골프에 ‘홀인원(Hole in one)’이란게 있죠. 아마츄어들은 평생에 한번 할까말까의 챤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혼자 필드에 나가서 홀인원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혼자서 가슴알이만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참 승리도 이웃과 어울어질 때 이루워집니다. 승리를 함께 나눌 때 참 승리를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에게 승리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승리 그 자체입니다. 나머지는 그 승리를 삶 속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이웃사랑입니다. 마음껏 이웃 사랑을 하십시다. 우리는 이웃과 어우러져 참 승리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중국 고전에 기록된 우화입니다. 기주 지방에는 둘레가 280km,나 되는 태형산과 왕옥산이 있었습니다. 그 산 곁에 우공이라는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이 두 산이 자기네 교통에 불편을 끼치고 있다 생각하고 그 산을 옮겨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바로 그 날부터 우공의 온 식구가 동원되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일 년 동안에 두 번 그 산의 흙을 퍼다가 멀리 바다에 버리고 돌와왔습니다. 우공의 친구는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은가? 죽음이 코앞에 닥친 사람이 이 엄청난 산을 옮기겠다니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우공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어리석은 것은 자넬세. 산이 불어나는 법이 있던가? 그러나 우리 자손들은 영원히 번창할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내 후손들이 계속 이 산을 파 나르며 제까짓 태산인들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우공의 이 말을 듣고 있던 산신령은 두려움을 느껴 떨게 되었고 즉시 옥황상제에게 호소하여 태형산과 왕공산을 다른 지방으로 옮겨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옥황상제는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결국 이 두산을 고스란히 다른 지방으로 옮겨 주었고 그 결과 기주 지방은 끝없는 평야를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화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옥황상제는 사람들의 일을 거들어줍니다. 조그마한 수고를 큰 역사로 바꿉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언제 거들어주시나요?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들의 작은 믿음을 가지고 큰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대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승리의 자세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무슨 일에도 믿음으로 임하십시다. 세상은 놀라 도망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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