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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날짜 : 2010.08.0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에바다
성경본문 : 마가복음 7장 31-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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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포브스 (Forbes) 잡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글을 쓴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읽고 나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 글은 일반인들에게 투자를 삼갈 것을 종용하는 글이었습니다. 자꾸 많은 사람들이 투자해야지 자기 잡지회사에 더 도움이 될텐데 반대로 일반인들의 흥행심을 꺽는 글이었습니다.
저자는 원래 심리학을 전공하길 원했는데 결국은 교수님의 추천으로 비지니스를 공부합니다. 실상 증권을 투자하는 일반인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학자가 됩니다. 그는 한 마디로 증권투자 하는 많은 사람들은 허황된 자신감에 차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자기는 잘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이 허황된 착각을 운전 실력과 비교하면서 설명합니다.
학생들에게 각자의 운전 실력을 체크하라고 하였습니다. 평균이상, 평균, 평균이하 (Above average, average, below average.) 이 시간 먼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생각하셨으면…, 그러면 그 학생들은 어디에 제일 많이 체크하였을까요? Average일까요?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average가 제일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의 모두 above average. 몇몇 학생들이 average를 체크했는데, 그 중 한 여학생은 그동안 사고를 세 번 내어서 곧 운전 정지를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어디에 체크했다고요? Average. 이런 사람들이 average라면 지금쯤 거리는 한산할 것입니다. 평균수준의 운전자들은 운전 정지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더 이상 증권에 투자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운전에 대한 평가 결과를 보고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면서 살고 있겠나?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세가지중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한번 혼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좋은 말을 더 많이 하는 편이다. 나는 좋은 말 나쁜 말 반반이다. 나는 나쁜 말을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이것도 한번쯤 대학생들에게 조사해 볼만한 것 같습니다.

요즘 휴스턴 텍사스 (Houston Texas)에서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 목회를 하는 조엘 오스틴 (Joel Osteen)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아버지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존 오스틴 (John Osteen) 목사입니다.
John목사님이 어느 날은 친구 교회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뒷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앉아 있는 한 젊은이가 눈에 띄였습니다. 아주 힘들어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예배 후 그 친구를 도와야겠다 생각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젊은이는 급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래도 그를 찾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하고 예배당을 샅샅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찾질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가 보았습니다. 마침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목사님은 젊은이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입니다.” 젊은이가 답변합니다.
“나의 삶은 완전히 엉망입니다. 나는 마약중독자입니다.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제가 가지고 있는 독약을 먹을 계획입니다.”
이 젊은이는 불쑥 나타난 이름 모를 나그네의 말을 가슴에 담습니다. 30년이 지난 후 지금 이 젊은이는 휴스턴에 있는 수 천명이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분명 존 오스틴 목사님의 말은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되어야지 나는 좋은 말하는 사람이다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Above average이다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말 한 마디로 사람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만 먹는다고 이런 사람이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지역을 다니시다가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오랫만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3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궁금한 점은 그 사람만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안수하시면 되는데 따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아마 환자는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중증은 중증인가봐.” 아니면 “나를 특별 대우 해주시네 그러니 낫게 되면 정말로 멋진 삶을 살아 봐야지.” 그런데 잠시 후 양 손이 귀에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분의 손이 닿았으니 소리가 들리겠군.” 그런데 손이 빠졌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잠시 실망하고 있는데 침을 탁 뱉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당신의 손에 뱉으셨습니다. 일단 침은 자기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입을 열라는 시늉을 합니다. 순종하며 입을 엽니다. 말만 할 수 있게 된다면야 무슨 짓을 못합니까? 그래도 자기 입에는 침은 안 뱉겠지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침을 뱉은 손을 그의 혀에 댑니다. 눈을 꽉 감고 예수님의 침을 받습니다. 요즘에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어떻겠습니까? 사이비 종교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죠. 그래도 환자는 상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귀가 열리고 입만 열리면 되니 무슨 일이라도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한 가지의 기대를 안고 예수님의 침을 받습니다. 받으면 아니 먹으면 말문이 트일까 하고…. 그야말로 눈 딱 감고 꿀꺽 삼켰습니다. 침이 목구멍 속으로 넘어 갔습니다. 이 때다 하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혀는 꼼짝달싹 안 합니다. 예수님도 당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최소한 환자는 그렇게 보았을 것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에바다(열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5절 말씀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드디어 귀가 열렸고 혀가 풀렸습니다. ‘에바다’의 외침과 함께 그토록 소원이었던 귀가 뚫리고 혀가 풀리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귀찮게 하셨지만 상관없습니다. 평생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3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그런데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 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 좀 의아합니다. 빨리 이 소식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좀 이해가 안 갑니다만, 성경 말씀은 때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그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것도 아주 좋은 해석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서 몰래 하려고 하였지만 또 많은 사람이 숨어서 따라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기다렸었는데 끝까지 보고 싶었겠죠. 그리고 이들은 곧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가지 궁금한 생각을 들게 합니다. 하나는 그토록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한 마디로 ‘에바다’하면 다 되시고도 남으시는 예수님이 왜 그토록 힘들게 하시면서 고치셨는가? 침까지 뱉으시면서…. 또 하나는 왜 몰래 고치시려고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 두 가지는 좀 이해가 안 갑니다.
하여튼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시고 쉽게 알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예수님의 깊은 생각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침 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환자의 모습을 먼저 상상해 볼까요?
고침을 받자마자 이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소리라도 듣기를 좋아합니다. 새소리가 들리면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듣습니다. 아마 새소리를 들은 때는 흉내를 내려고 애썼을지 모릅니다. 자기도 새소리를 내 보려고…. 얼마 전에 교육관을 둘러 보다가 열린 문을 통해 예쁜 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새가 저렇게 예쁜 소리를 내는가 듣고 싶어서 보았더니 눈에 흔히 보이는 새였습니다. 이름은 제가 알수 없습니다만, 그런데 제가 서서 듣는데 거의 열 가지 이상의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동안 서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맛보았습니다.
제가 그랬는데 이 환자는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감히 흉내 낼 생각도 안했는데 이 환자는 흉내도 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소리가 나는 것이 새뿐입니까? 시냇물 소리에 한번 잠기면 또 한참 빠져 있습니다. 폭포 소리에 넋을 잃습니다. 잠 잘 시간조차 없습니다. 시간이 아까와 잠도 못 잡니다. 그런데 자연의 소리뿐입니까? 사람들의 소리는 어떻습니까?
아기 우는 소리에 넋을 잃고 빠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뛰 노는 소리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들의 노래 소리를 진기하게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흉내를 내어 봅니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기 시작합니다. 좋은 말 나쁜 말 닥치는대로 듣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흉내냅니다. 좋은 말도 흉내내고 나쁜 말도 흉내내고….
교우 여러분, 여기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환자는 좋은 말뿐 아니라 나쁜 말도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아픔이 있었을 줄 압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비싼 돈을 들여서 불쌍한 벙어리를 고쳐 주었다고 생각하십시다. 이 벙어리가 나은 다음에 그 입에서 나쁜 말이 쏟아져 나온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매한 가지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도 당신이 낫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쁜 말이 쏟아져 나올 것을 좋아하셨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힘들게 어렵게 시간을 끌면서, 아니 침을 뱉아 가시면서 고치셨는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머거리요 벙어리를 고쳐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또한 큰 고통이 있으셨습니다. 귀를 뚫어 놓아주고 입을 열어 주었는데 이 귀와 입을 엉뚱하게 사용될까봐….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는데서 몰래 고쳐주시길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침까지 발라 주십니다. 이 혀를 가지고 나쁜데 사용하지 말라고 당신의 침으로 그녀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저의 상상입니다만….
예수님의 침이 나의 혀에 닿았다는 것은 나의 혀가 예수님의 혀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뇌리에 박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침을 발라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침을 바르신 후 마지막으로 “에바다”하신 것입니다. “열려라. 그리고 이제 이후로 예수의 혀를 소유한 자가 되어서 살아라.”

월트 디즈니가 사람들을 말하는 방식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독설가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을 낙심시키고, 그가 가진 창조성까지 짓밟으며,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관리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가 필요한 것만 돌보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마당의 잔디는 잘 깎지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마당을 떠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마지막은 상대방의 삶에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즉 새롭게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는 말을 자주 해서 그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 부류중 어느 부류에 속하십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힘들게 “에바다”하시면서 고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고쳐 놓았지만 독설가가 될까봐…, 아니면 자기관리자가 될까봐…, 그래도 예수님은 고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고치셨습니다. 상대방의 삶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바다’의 사람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치신 것입니다. “에바다.”
주님의 ‘에바다’의 함성을 들은 이 환자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이웃을 위하여 도움의 말을 하는 자가 되어가지 않았을까요?

물론 처음부터 “에바다” 외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에바다”의 외침이 귀를 쟁쟁 울리지만 자기의 입에서는 쉽게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에 쉽게 나오는 것은 아마도 이웃을 해하는 말들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3:13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아무리 예수님의 침이 묻혀진 혀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곧 독설가가 됩니다. 독설가의 삶을 살수록 예수님의 음성이 자꾸 들립니다. “에바다”
결국은 변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남을 위해서 “에바다” 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 관리자가 됩니다. 남을 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하여 “에바다” 외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해는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변화시키는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환자도 이 상황에 오랜 시간 지냈을 줄 압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침으로 자기의 혀에 닿게 하였던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어느 순간 그는 깨닫습니다. ‘아, 나의 혀가 나의 혀가 아니구나. 예수님의 혀로구나.’ 이제 그는 용기를 내서 예수님의 흉내를 내게 됩니다. 이웃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에바다.”
처음에 Above average, average, below average를 말씀을 드렸는데, 독설가는 Below average, 자기 관리자는 Average, 이웃을 위한 자가 Above average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서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독설가의 시간이 있었고 자기 관리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웃을 위하여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에바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단계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에바다”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일단 독설가의 삶을 삽니다. Below average. 세월이 흐르며 많은 단련을 받습니다. 그래도 고작 되어진 것은 ‘자기 관리자’입니다. Average. 다행히 이 때는 남은 괴롭히지 않습니다. 더 오랜 시간 상처도 받고 좌절도 해 가면서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습니다. 아니 어느 순간 예수님의 침이 닿았던 자기의 혀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외치는 자가 됩니다. 이웃을 향하여, “에바다.” 이웃을 향하여 에바다 외칠 때 이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Above average. 그리고 에바다를 들은 사람은 에바다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한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립니다.
생명과학자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1999년도 생명과학계를 뒤집어 놓은 계기가 있습니다. 그해 휴먼 제놈 (human genome)이 발표되었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유전자, 곧 30억 개의 글자로 된 DNA 지도가 발표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역사적인 발견이기에 백악관에서 클린톤 대통령과 함께 두 과학자가 배석한 가운데 발표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이 영국의 블레어 수상에게 위성중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human genome을 두 과학자가 주도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유전학계의 거장 프란시스 콜린스 (Francis Collins)박사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크레이그 벤터 (Craig Venter) 박사입니다. 이 두 박사들이 배석한 채 클린톤 대통령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언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클린톤 대통령의 이 말이 가슴에 남았는지 후에 Collins박사는 ‘The Language of God (하나님의 언어)’ 라는 책을 펴냅니다. 그의 자서전적인 신앙 간증이 담긴 책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해 관심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무신론자가 되어 갑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나중에 의사가 되어 노스 케롤라이나 (North Carolina)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한 환자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그 환자는 고칠 수 없는 아주 심한 심장병 환자였습니다. 환자가 묻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리고는 그 환자는 자기의 신앙을 피력하였습니다. 그 후 젊은 의사인 Collins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부러 종교를 피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느낍니다. Collins 박사는 죽어 가는 환자로부터 ‘에바다”를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느 목사님을 찾아 갑니다. 목사님이 C.S 루이스 (C.S. Lewis) 의 책을 소개해 줍니다. 아니 C.S. Lewis의 논리에 완전히 굴복합니다. 그 후 그는 신앙인으로서 과학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 과정 가운데서 human genome을 풀어 가는데 혁혁한 공헌을 세움니다. 그리고는 The language of God이라는 책을 펴냄으로 최고의 과학자가 최고의 에바다의 주인공이 되어 감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 책을 통하여 과학자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바다.”
그런데 그가 “에바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두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심한 심장병환자였고 또 한 사람은 C.S. Lewis였습니다. C.S. Lewis의 이름은 그 책에 밝혀져 있지만 환자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 C.S.Lewis의 책을 읽게 한 장본인은 바로 이 이름 모를 심장병 환자였습니다. 이 이름 모를 환자의 외침 ‘에바다’가 있었기에 그는 기독인 과학자로서 당당히 클린톤 대통령 옆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는 삶을 통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에바다.” 그는 자기의 혀는 예수님의 혀인 것을 삶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혀는 예수님의 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혀를 통해 나오는 말들을 소홀히 다루실까요? 우리들의 입의 말을 낱낱히 다 기억하십니다. 어떤 때는 당장 우리들의 ‘에바다’를 사용하십니다. 어떤 때는 모아 두셨다가 때가 되었을 때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의 ‘에바다’를 언제 어떻게 사용하실 것은 하나님 몫입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외치는 것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모두 함께 ‘에바다’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여러분이 전공하고 있는 분야에서 에바다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평범한 이웃과의 만남 가운데서 에바다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혼자 있을 때도 에바다의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들의 혀는 예수님의 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백인 목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종종 이웃을 초대하곤 합니다. 한 번은 세 명의 베트남 여인을 초대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부담 없이 자주 집으로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이 먼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베트남인들이 2만 명 살고 있었습니다. 세 여인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베트남인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기도 요청을 합니다. 용감하게 베트남인들에게 “에바다” 외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가 예수님의 혀가 된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함께 이웃을 초청하십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의 외침을 들려주십시다. 아니 예수님의 외침을 들려주십시다. “에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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