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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업적이…

날짜 : 2010.07.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들의 업적이…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14장 13-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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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이 멤피스에서 암살당하기 바로 전 날 “나는 약속의 땅을 보노라”라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내가 만일 역사의 시작에 서 있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시면서, 나에게 어느 역사에 다시 태어나길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리고는 당신의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고백을 합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생각은 애굽에서 시작하여 홍해의 사건을 지나서 광야의 사건, 아니 그것을 넘어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 역사가 놀랍고 귀해도 나의 생각은 거기에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찬란한 역사 속으로 잠입하면서 플라톤 (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화려한 로마를 지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역사를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흑인 노예 해방 역사와 함께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잠시 주시하겠지만 거기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 후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20세기 후반에 아주 짧은 시절 살게 하신다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둡지만 어두운 이때가 별이 가장 밝게 비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연설문입니다. 이 연설문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되고 도전이 되곤 하였습니다. 특히 제가 이민 목회를 하면서 늘 저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연설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된 이유가 바로 이 연설문 안에 잘 밝혀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자기가 사는 시대가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바로 자기가 태어난 20세기에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바로 이 시대가 가장 위대한 시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1세기가 가장 위대한 시기입니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20세기 말로 시작해서 21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에 다시 태어나시길 원하십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는 지금 21세기가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가장 위대한 시기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시절이 가장 위대한 시기이고 그러기에 그 시기에 다시 태어나길 원할까요? 여러분도 이러한 확신과 고백 가운데 살고 싶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이 자기가 사는 시대를 가장 위대한 시대로 여기고 살아가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요한 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갇혀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 13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보면 한 목소리와 성령이 서로 주고 받고 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하나님인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시던가 아니면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의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우리 모두 복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느냐?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 믿다가 그냥 죽는 것을 말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사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은 순교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예수 믿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사실 요한 계시록은 핍박이 오면 순교할지언정 변절하지 말라는 목적에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곧 순교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화답합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복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쉬게 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곧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신 후 쉼의 시간을 갖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안식의 축복 아닙니까? 이러한 안식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는 더 큰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수고는 언제나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는 결코 헛되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겠습니까? 일을 잔뜩 했는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에 참 복은 행한 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순교자들의 업적은 어떻게 남게 될까요? 14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인자 같은 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이 선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흰 구름위에 주님이 금 면류관을 쓰고 낫을 들고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낫을 대서 거두어 들이십시오. 땅에 있는 곡식이 무르익어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곧 추수 때가 되었다고 천사가 외친 것입니다.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주님을 향하여. 16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둘러서, 땅에 있는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 순교자들의 업적이 대충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낫을 들고 추수하시는 분이십니다. 순교자들은 추수 때까지 주님의 농사를 도운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업적은 언제나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업적은 주님의 곡간에 영원히 남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 절 말씀들을 보면 이들의 업적이 더 빛이 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 그도 역시 날이 선 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천사가 낫을 들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불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 천사였습니다. 날이 선 낫을 들고 잇는 천사에게 큰소리로 ‘날이 선 낫을 대서, 땅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아까는 곡식이 익었었는데 이제는 포도가 익었다고 말합니다. 포도가 익었다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좋은 뜻일 것도 같은데…. 19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를 만드는 술틀에다가 던졌습니다.” 여기에서의 포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익었다는 뜻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술틀은 성밖에 있었고, 거기에서 포도가 짓밟혔습니다. 그 술틀에서부터 피가 흘러 나와서 말 굴레의 높이까지 닿고, 거의 천육백 스타디온이나 퍼져 나갔습니다.” 1600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어느 주석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덮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완전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의 낫으로 추수되지 못한 자들이 아닙니까? 주님의 낫으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완전한 진노의 낫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교자들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들의 업적은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진노의 낫에서 구원하여 주님의 추수의 낫을 맛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곧 주님의 알곡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업적은 커지고 또 커지고 또 커져서 주님이 오시는 날 놀랍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성령은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피를 흘리고 순교하는 자들만 업적이 남는 것인가? 주님을 위해 평생 살다가 편안하게 주님의 품에 안기는 자들의 수고는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대표적인 분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마지막에 순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병환으로 소천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순교의 정의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유명한 부활의 장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순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순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번만 할 수 있는 순교가 있고 계속 할 수 있는 순교가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는 주기철 목사님처럼 피 흘리며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부활의 장에서 두 번째 순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매일 죽는 순교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가지 순교를 다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첫 번째 순교를 하기 전에는 늘 두 번째 순교를 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순교는 매일 육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과 온갖 자랑 그리고 죄성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순교도 첫 번째 순교만큼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는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반면에 두 번째 순교는 매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매일 순교를 한다면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순교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일줄 압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순교는 놀라운 업적이 되어 남아 있게 됩니다.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우리들의 삶을 주님은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뿐 아닙니다. 처음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기가 사는 20세기가 가장 위대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매일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인해 자기가 사는 그 시대가 가장 위대한 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곧 순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사는 시대를 가장 위대한 시대로 여깁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 시대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놀라운 업적을 세웁니다.

교우 여러분,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을 때입니까? 인간의 이성이 깨기 시작한 르네상스시대입니까?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산업혁명이 시작한 때입니까?
사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을 때 보다 더 복잡해진 시대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어느 때보다 더 커져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수많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자신은 사회 부조리와 부정의에 피해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최악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정신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위대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신문을 첫 글자에서 마지막 글자까지 읽는 분이셨습니다. 신문을 보면서 늘 통탄합니다. 늘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개탄합니다. 정치인들을 비난합니다. 자기가 정치를 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텐데 중얼거리십니다. 그는 최악의 시대에 사신 것입니다.
반면 가장 위대한 시대에 사시는 분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날마다 죽노라”의 고백의 주인공들이 아닐까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위대한 시대는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창조한 위대한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랬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들의 발자취를 뒤따를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니카라과 단기 선교단 파송예배로 드립니다. 단기 선교에 직접 참여하시는 분이나 뒤에서 이모 저모로 도우시는 분들 모두 작은 순교의 축복을 누리는 분들이십니다. 어제 약품 포장하러 오신 분들은 작은 순교에 동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시면서 작은 죽음에 동참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순교를 주님은 간과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낫을 들어서 여러분의 수고를 추수하실 것입니다. 추수한 곡식들은 진노의 때에서 벗어나 영원한 축복의 나라로 옮겨 질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작은 순교가 이 시대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새삼 보게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얼마나 밝게 만들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선교를 다녀 오신 후 아마도 킹목사와 비슷한 고백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21세기 초반에 살게 하신다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킬케골이 19세기 교회가 세상적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말한다. ‘poor man’; 부인이 부정한 삶을 살면 세상은 말한다. ‘poor man’;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핍박 받는 사람에게 세상은 말한다. ‘poor man’;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말한다. ‘poor man.’ 그러나 진짜로 불쌍한 것은 세상이다. ‘poor world’.”
킬케골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킬케골이 마지막을 이렇게 마쳤다면 어떨까요? “But it is a wonderful world (그러나 이 세상은 위대한 세상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세상은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는 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It is a wonderful world, no matter what.”
누가 이런 외침을 외칠 수 있을까요? 매일 작은 순교를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작은 순교의 삶을 위해 단기선교를 떠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뒤에서 기도로 물질로 시간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선교단원 여러분, 여러분들의 작은 섬김이 니카라과를 위대하기 만듭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21세기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의 업적은 길이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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