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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

날짜 : 2010.04.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거룩한 분노
성경본문 : 사도행전 17장 16-34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00425.wmv

에버렛 하워드 (Everett Howard)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결단을 합니다. 작은 교회 강단 아래서 무릅을 꿇고 결단의 글을 써내려 갑니다.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써내려 갑니다.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다 작성한 후에 싸인을 하고 강댓상에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크게 실망합니다. 결국 좀 더 기록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 하나님의 음성을 느끼는 듯합니다. 종이를 찢으라는 듯 느낌을 받습니다. 종이를 찢고 대신 하나님이 그 종이에 기록하도록 하게 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 잘 아시니 하나님께서 최고의 것으로 기록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가 쓴 종이를 찢고 빈 종이를 꺼냅니다. 빈 종이에 싸인합니다. 그것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 몫이라는 것입니다.
어느덧 36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그 후 매일 하나님께서 36년간 빈 공간을 채우셨다고 합니다. 36년간 하나님께서 채우신 최고의 것은 바쁜 사역, 병, 기근, 궁핍…. 36년간 힘든 선교사역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채우실지 몰랐던 것이 좋았었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시 종이에 쓰라고 한다면 또 다시 빈 종이에 싸인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어려운 사역 가운데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을 누렸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로 하여금 두 가지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먼저 저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이 분처럼 하나님 앞에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헌신한 후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생각을 하였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평신도로서 최고의 헌신을 하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마음의 종이에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저의 마음의 종이에 기록을 하셨고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실 저는 저의 인생의 황금기를 보스톤에서 목회생활로 보내게 해달라고 기록하기는 커녕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곧 저도 결과적으로는 빈 종이에 싸인만 한 셈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빈 종이를 매일 채워가셨습니다. 제가 감당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 좋은 일과 궂은 일을 잘 조화시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워드 선교사님의 생각에 동감합니다. 빈 종이에 싸인만 했던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다른 한 가지 생각이 든 것은 ECC건축입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희 교회가 2003년에 첫 희년을 지켰습니다. 교육시설의 확충도 필요하던 차에 희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어느 장로님댁에서 휴무 시무 장로님들이 모두 모여서 건축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때가 2002년도 초였습니다. 그리고는 저희 나름대로 종이에다가 계획을 세웠습니다. 건축완공 목표일은 그 다음 해인 2003년도 첫희년 기념 예배였습니다. 또한 예산도 세웠습니다. 150만불이면 족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종이에다가 이것저것 적고 싸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저희들이 적은 것은 거들 떠 보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저희들이 적은 것은 다 지워 버리시고 딱 한 가지 싸인한 것만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그 빈칸을 메워 가시고 계십니다. 그동안 순조로운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150만불의 예산은 420만불로 올랐고, 완공일은 2003년 11월 창립기념 주일에서 7년이 지난 2010년 5월 이후로 미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빈칸을 채워가시되 저희들이 예상치 못한 일들로 채워가셨습니다. 그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말씀드리려면 몇주에 걸친 설교시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하여튼 더 이상 예상치 못할 일들이 안 생기길 바랍니다만, 요즘 종종 건축하시는 분들을 보면 좋은 말을 듣습니다. “끝이 보입니다.”
“끝이 보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묘한 생각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보던 눈에서 미래를 보게 하였습니다. 새로운 빈 종이를 보게 하였습니다. 이제 ECC의 완공과 함께 어떤 일들이 전개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매일 매일 그 빈 종이를 메꾸실 것인가? 나의 개인적인 삶에도 그렇고 건축에도 그렇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기쁨과 아울러 당황함을 주시곤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어떤 일들을 그 새 종이에 기록하실 것인가? 7년간 예상치 못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으니 이제는 순탄대로만 남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그래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마는 앞으로 되어질 사역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차피 우리들이 쓴 종이를 찢어버리시는 하나님께서 새로 쓰시는데 준비할 필요가 뭐 있는가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빈 종이를 내미는 자들에게는 빈 종이를 채우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최선을 다해서 쓴 사람에게 다시 빈 종이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끝이 보이는 시점에서 다시금 종이에다가 정성껏 기록하여야 할줄 압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우리가 마련한 종이에다가 새롭게 쓰실줄 압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일들을 써 가실지도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일들을 매일 써 내려가실지 모르는데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건축 후의 사역에 임하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길 원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새로운 도전에 임하여야 할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 선교하다가 일어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이 기록된 부분은 2차 선교여행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의 선교여행도 하나님께서 빈 종이에 채우시는 역사의 반복이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3차에 걸쳐서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간단히 본문 말씀이 기록된 사건까지의 선교 여행을 요약해 드리면, 사도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은 현재 터키지역인 소아시아 지역을 다녀옵니다. 1차 여행은 바울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계획이나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안식의 시간을 가진 후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계획합니다. 2차 선교여행은 1차에 세운 교회들을 돌보는 목적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 계획서에 기록하였습니다. ‘1차 여행에서 세운 교회를 돌아보자.’ 그리고는 1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그 계획서를 사정없이 찢으십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바울에게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유롭 선교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순종하고 유롭으로 건너갑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차례로 방문하며 선교를 합니다. 그 다음부터가 오늘 본문 말씀의 장면입니다. 다시한번 16절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2차 선교여행 중에 지금 아덴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덴에 도착하였는데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합니다. 바울은 한 마디로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분노에 찬 모습을 상상하며 11절을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격분한 가운데 닥치는대로 만나는 사람과 변론을 합니다. “나는 크게 실망하였소. 지성과 철학의 도시 아테네인들에요. 어찌 미련하게 우상들을 섬기오.” 한편 이곳 사람들은 격분한 바울의 모습이 귀여웠나 봅니다. 호기심이 더 가득해져서 바울의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아레오바고는 이 당시 종교와 도덕에 관한 문제를 강론하고 재판하던 장소입니다.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법정 내지 대법원이라고 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니깐 그를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그를 붙들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치 죄수인냥 아니면 광대인냥 바울을 붙들어서 아레오바고에 세운 것입니다. 분노에 가득차서 떠드는 소리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분노에 가득찬 바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많도다.”
그리고는 일장 연설을 아니 설교를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말하지 않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을 전함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그 결과가 32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의 분노에 찬 설교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몇 사람은 믿었습니다. 그 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아레오바고 관리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 관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당연히 대단한 사건입니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아데네 사람들이 즐겨 모이는 곳의 관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 아레오바고는 지진을 맞은듯 하였을 것입니다. 아데네의 우상을 보면서 생긴 거룩한 분노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일반적인 분노와 거룩한 분노는 어떤 것인가 살펴 봐야겠습니다. 분노는 분노지 거룩한 분노가 있을 수 있는가? 20세기에 거룩한 분노를 소유하면 살았던 분 여러분이 계시겠지만 그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마틴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빗 아담스 (David Adams)라는 분이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심리분석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주장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분노’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시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분노의 특징을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는 낙관적인 확신을 소유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노는 바로 절망이요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무폭력저항을 강조하였는데 그가 무폭력저항을 강조한 이유는 그의 분노는 낙관적인 세계관 안에서의 분노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할 때 거룩한 분노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폭력이 나옵니다. 절망이 따라 옵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사실 예수님도 분노하시지 않았습니까? 특히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비둘기 장사들의 상을 뒤엎으시면서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거룩한 분노의 모습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망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성전이 회복할 것을 아시는 낙관적인 분노였습니다.
하나님도 분노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구약에 보면 한 챕터가 멀다하고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분노도 거룩한 분노 낙관적인 분노였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관리를 예수 믿게 한 이유는 그의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낙관적인 분노였습니다. 제 아무리 아데네에 우상이 가득 찼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아데네에 보내신 데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남을 알았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생겼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까? 이제 ECC건축을 앞둔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곳에도 밚은 우상이 있는데 우리가 격분합니까? 오늘 교회 오시는데 러쉬아워에 막히신 분 계십니까? 아주 신나게 달려 오시지 않으셨습니가? 그렇다면 우리는 분노해야 할줄 압니다. 주일에 예배는 안드리고 다른 고세 가던가 집에 있으니 러쉬아워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룩한 분노가 생길까요? 바울은 어떻게 해서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가 되었는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바울이 왜 아데네에 오자마자 거룩한 분노가 생겼을까요? 우연은 아닐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데네로 바울을 보내기 전에 미리 거룩한 분노의 사람이 되도록 사전에 준비를 해 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낙관적인 분노의 사람이 이미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목회 경험을 빌어 말씀드린다면 오늘 제가 하는 목회는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때 젊을 때 화끈했던 시간들을 통해 얻은 것만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되어진 모든 것을 안고 목회에 임합니다. 최근 있었던 일들이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아데네에 오긴 전까지 모든 일이 바로 바울을 거룩한 분노의 사람으로 만들게 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빌립보 감옥의 사건입니다. 이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체험하였습니다. 환상을 통하여 감옥문이 열리는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 체험이 바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이 체험을 안고 데살로니가를 지나 베뢰아를 지나 그 유명한 아덴에 도착한 것입니다. 우상이 득실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절망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희망의 분노였습니다. 감옥에서 그 놀라운 일을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에 근거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빌립보의 놀라운 체험이 바울로 인하여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로 만들었습니다. 제 아무리 많은 우상을 섬길지라도 언젠가 이 우상들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낙관적 분노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도바울의 거룩한 분노와 저희 교회의 ECC건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감히 확신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일줄 압니다. 낙관적인 분노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일줄 압니다. 우리는 그동안의 건축 과정에서 기가 막힌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체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번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 더 확신이 서야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어려움이 오면 ‘이번만은…’ 하면서 의심의 그림자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이번에도’였습니다. ‘이번에도 해결하셨습니다.’ 건축 중에 수없이 ‘이번에도’이신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오래하다 보니 이젠 낙관적이 되어 버린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끝이 보입니다. 사실 건축보다도 이제 더 멋진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멋진 사건들은 처음에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건축에서 만난 것과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해야 할 줄 압니다.

ECC는 곧 교육 및 사회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해서는 더 나은 공간이 생기기에 너무 기쁘고 기대가 큽니다.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은 동양인들로서 어떻게 이 지성과 권력과 부가 우상이 된 부르클라인 (Brookline)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역에 잘 감당하느냐 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수많은 우상이 깔린 이 타운에서 사역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오랜 시간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분노를 소유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거룩한 분노를 안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요즘 튜립 (tulip)이 활짝 피었습니다. 튜립 옆을 지나가다가 보면 어느새 넋을 잃고 서 있곤 하는 저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얼마 전에 튜립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하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튜립의 꽃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은 뿌리, 곧 bulb가 어릴 때 어떤 자극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저희가 건축을 통하여 받은 여러 상처들이 도리어 ECC를 통하여 아름답게 꽃피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분노를 소유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거룩한 기대를 안고 우리를 ECC의 완공을 기다립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을 당할 때 우리의 기대는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는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품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교육관을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들의 자녀들은 훌륭한 인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Brookline에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때로는 거룩한 분노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를 위하여, Brookline 주민들을 위하여…

말씀을 거둡니다. 니엔 쳉 (Nien Cheng)이라는 중국여인이 상하이에 살았는데,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감옥에 갇힙니다. 이유는 서구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녀는 서양교육을 받았고 미국석유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전구하나만 켜진 곳에서 혼자 갇혀지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콩알만한 거미가 천정으로 올라가더니 거미줄을 멋지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기가막힌 디자인으로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I thanked Him for what I had seen. It helped me to see that God was in control. I felt a renewal of hope and confidence.”
(나는 거미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거미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확신에 가득찼습니다.)
그 후 그녀는 중국정부에 굽히지 않고 6년간 감옥생활을 견디어냅니다.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가 6년간을 견딜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안에 있는 거룩한 분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적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펼쳐 가십니다. 거룩한 분노를 소유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우리는 ECC건축을 통하여 낙관적 분노 거룩한 분노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주일날 러쉬아워가 생기게 되는 때까지 거룩한 분노의 소유자가 되십시다. 우리들의 거룩한 분노는 수많은 우상을 부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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