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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의 나그네

날짜 : 2010.04.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엠마오의 나그네
성경본문 : 누가복음 24장 13-35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00404.wmv

어느 화창한 봄날, 어느 남자는 뉴욕의 공원에서 한 부랑자를 보았습니다. 그 부랑자는 ‘I am blind (나는 장님입니다)’라고 적힌 푯말을 목에 걸고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에게 적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쳐 갈 뿐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부랑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부랑자가 목에 걸고 있던 ‘I am blind’ 라는 글씨를 바꾸어 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부랑자는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를 챘습니다.
‘이상한데…?’ ‘이상해…! 지금까지는 누구 한 사람도 돈을 주지 않았는데, 그 남자가 오고 간 다음부터는 갑자기 적선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적선 통에는 어느 순간 동전이 넘쳐흐르고, 사람들마다 동정하는 소리를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그 남자가 행운을 주고 간 것인가? 그 남자는 마법사인가?”
그 남자는 마법사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남자는 ‘I am blind’ 라고 적혀 있는 푯말의 글귀를 이렇게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머지 않아 봄이 찾아 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두 가지 생각에 잠시 잠겼었습니다. 하나는 이 남자의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같은 것을 봐도 저렇게 다르게 볼 수가 있구나.’ 곧 이어 뒤쫓아 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의 뇌리에 ‘Homeless (노숙자)’라고 써 붙이고 복잡한 사거리에서 서 있곤 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그 동안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Homeless’ 라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연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Homeless 가 저에게 가까이 오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면 ‘뒷차 때문에’ 핑계를 대고 악셀을 밟습니다. 계속 빨간불로 되어 있으면 창문을 열고 쿼터나 일불짜리 지폐를 건네 줍니다. 잠시 자선을 베푼 자만감에 젖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homeless’라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어 본적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Homeless라는 푯말을 바꾸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한번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이곳에는 저의 집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원한 집은 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도와주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예배로 드립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보게 하는 날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곧 부활의 눈을 소유하게 되는 날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활의 눈을 가지고 시각장애인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예배를 통하여 모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부활의 눈을 소유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어두운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불법입국을 하다가 많은 분들이 경찰에 붙잡히곤 합니다. 마리오 (Mario)라는 멕시코 사람이 에리조나 사막에서 붙잡혀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막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지평선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순간 헬리콥터에서 레이저 빛이 우리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우리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리콥터는 우리 위를 빙빙 돌면서 마치 소나 돼지처럼 저희를 몰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야만 하나 절망에 빠졌습니다. 순간 헬리콥터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한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La Cucaracha.’ 그처럼 수치스러운 경험은 생전 처음 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구에서 제일 비천한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장면도 부활의 시각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하여튼 저는 La Cucaracha의 뜻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서 저희 교회와 작년에 같이 선교를 갔던 히스패닉교회의 호라치오 (Horacio) 장로님에게 이멜을 보내 보았습니다. 곧 답장이 왔는데, 첫 번째 하는 말씀이 이 노래는 설교에는 맞는 노래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것을 물어보냐고 합니다. 그래도 번역하겠다고 하면서 친절히 그 노래 가사 전체를 번역해서 보내왔습니다. 저도 그 번역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같이 따라 불렀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였습니다. La Cucaracha의 뜻은 ‘바퀴벌레.’ 한국 가요에 ‘개똥벌레’는 있는데 ‘바퀴벌레’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우님들, 가라오께로 ‘개똥벌레’ 부르시는 분들 종종 계시지 않습니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La Cucaracha의 가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사를 알게 되면 더 기가 막힙니다.
La cucaracha, (the cockroach)
La cucaracha ,(the cockroach)
ya no puede caminar, (it can not walk)
porque le falta (because its missing)
porque no tiene (because it does not have)
una pata para andar (one leg to walk)………………:)
“바퀴벌레, 바퀴벌레, 너는 걸을수 없네. 다리가 하나 부러져서 너는 걸을 수 없네.”

멕시코 사람들은 이 가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개똥벌레 가사를 알고 있듯이….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다 잡힌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요? “용용 죽겠지. 너는 걷지 못하는 바퀴벌레다.”
이 장면을 부활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떤 장면이 연출될까요? “예수 부활하셨네”와 “La Cucaracha,” 과연 어울리나요? 물론 우리는 더 크게 “예수 부활하셨네”를 불러야 합니다. 사막에서 잡힌 불법 이민자들에게도 우리는 아름다운 생각을 안고 불러야 할줄압니다. ‘당신들은 바퀴벌레가 아니요’ 불러야 할줄 압니다. 그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일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La Cucaracha’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멕시코인이 아니고 바로 너희가 바퀴벌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헬리콥터에 앉아 있는 경찰들에게 쏘아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활의 시각을 가진 자들은 어떤 자세로 이들을 대하여야 하나요?

남은 시간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오늘의 이런 상황에 부활의 눈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삶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13절 시작을 보니 ‘그 날에’ 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서 분명히 이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바로 전 귀절들을 보면 부활하신 날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날에 이미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두 제자도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물론 12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소한 70명의 제자를 가르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이들은 부활의 소문을 들었는데도 엠마오로 가야만 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죽었으니 다시금 세상 직업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도 다시 어부로 잠시 돌아갔었지 않습니까? 이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셔서 묻습니다. 물론 당장은 몰랐지만 이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두 제자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줍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자기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믿었는데 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러나 지금 부활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꾸짖으시면서 성경공부를 다시 가르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어야 한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였나 봅니다. 어느덧 때가 저물어 그들은 여관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떡을 떼시면서 축사하십니다. 30, 31절 말씀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계속해서 33, 34절 말씀입니다.
“곧 그 때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제자는 엠마오의 길에서 돌아가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제자들 모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부활의 공동체를 만난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나그네의 모습에서 진정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의 모습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자기들과 길에서 만나신 분이 바로 사흘전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인 것을 깨달은 즉시 그들은 다시 여관을 박차고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용무는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밤의 무서움도 잊어 버렸습니다. 오던 길을 180도 선회하여서 돌아갔습니다. 가던 방향은 180도 바뀌었지만 그들의 삶은 360도 전체가 바뀐 것입니다. 밤이면 자야 되고 어두우면 안전한 곳을 찾아야 되고 생활을 위해서 일해야 하고 하는 모든 관념들이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삶을 보는 눈이 360도 바뀐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밤이 대낮이 되었고 위험한 곳이 안전한 곳으로 느껴졌고, 민생고조차 부활의 주님 앞에서는 작은 웃음거리로 밖에 느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던 길을 180도 선회해서 돌아 갔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부활을 체험한 수많은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서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선회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볼까요? 처음 말씀드린 두 가지 이야기를 소재로 제가 상상해 보았습니다. 분명 이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났을 줄 압니다. 얼마큼 가다가 ‘I am blind’라는 푯말을 목에 걸고 서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물론 이들은 푯말을 고쳐줍니다.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사실 이 두 제자는 전에 엠마오로 내려오는 길에 이 사람을 만났었습니다. 이들은 ‘I am blind’라고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이 사람을 만났을 때 주머니에서 $1을 건네주면서 오늘의 구제는 다 했다고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구제를 안 하지” 불평을 하면서 내려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변하였습니다. 푯말까지 고쳐준 것입니다. 부활의 눈을 소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가다가 보니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문둥병자를 향하여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La Cucaracha’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먹다가 남은 음식이 주머니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배가 고파지면 먹으려고 싸온 것입니다. 문둥병자와 더불어 그 음식을 나눕니다. 문둥병자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사흘 전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오늘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음식입니다. 함께 드십시다. 용기를 가지세요. 당신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한편 문둥병자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기겁을 합니다. 이들은 두 제자에게도 소리를 지릅니다. “너희도 문둥병자다. 너희도 발이 부러진 바퀴벌레다. 문둥병자와 밥먹는 놈들도 다 문둥병자야.” 그리고 두 제자에게도 돌을 던집니다. 이 때 두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하였을까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사실 전에 엠마오로 내려오는 길에도 이 문둥병자를 만났었습니다. 그 때는 문둥병자에게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서 내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돌은 던지지 않은 것뿐입니다. 사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고마왔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거기에 문둥병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다시 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꾸러 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습니다. 자기를 어떻게든 도왔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들에게도 돌을 던집니다. 함께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이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21세기 미국 버젼으로 표현한다면, 멕시칸들을 돕는 우리에게 같은 불법을 행하였다고 조롱하면 ‘바퀴벌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경찰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가 바퀴벌레가 아니고 진짜 바퀴벌레는 당신들이요.”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의 노래일까요? 물론 마음속에서는 이것이 튀쳐 나오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360도 삶이 바뀐 자들의 노래는 아닐 줄 압니다.

계속 상상의 날개를 펴 가겠습니다. 자기에게 돌이 날라 오는 순간 그들의 뇌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두 강도 사이에서 절규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순간 눈을 떠 보니 자기들에게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그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부활의 무한한 능력이 임재함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계속 예루살렘을 향하여 부활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걸어갑니다. 부활의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갑니다. 어두운 밤이지만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길에 꽃이 활짝 피어있음을 봅니다. 부활의 꽃으로 활짝 핀 길을 걸어갑니다. 아니 자기들이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꽃이 피어남을 체험합니다.
그래도 아직 한 가지는 남아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문둥병자, 바퀴벌레’ 라고 부른 그 사람들의 모습은 뇌리에서 씻겨지지 않습니다. 한 가지 어두움을 안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모두들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간증합니다. 한 사람씩 차례로 간증합니다. 모두 다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들도 엠마오로 가다가 만난 주님의 모습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의 능력이 방 안을 가득 메웁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기들에게 ‘문둥병자, 바퀴벌레’라고 불렀던 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입에서도 무엇인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들도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La cucaracha’는 사라지고 “예수 부활하셨네”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언젠가 그들도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감격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더욱 드 높아진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더욱 결심합니다. 죄가 있는 곳을 다니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대신 전할 것을 결심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나그네가 되길 결심합니다. 더 이상 엠마오의 나그네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세계로 부활의 나그네가 되어서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부활의 주님을 높이는 도구에 불가하다는 확신과 함께 나그네 길을 떠나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을 문둥병자나 바퀴벌레라고 조롱하는 자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그들의 죄가 크면 클수록 부활의 영광은 더욱 밝게 빛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언젠가 함께 “예수 부활하셨네” 찬양하게 될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자기가 바로 이웃을 향하여 ‘바퀴벌레’라고 조롱하던 자임을 깨닫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나그네의 길을 가는 자들은 자기를 해치는 자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해치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La Cucaracha’를 부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자는 부활의 노래입니다. 부활의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함께 이 부활의 나그네 길을 떠나 가십시다. ‘La Cucaracha’로 가득찬 이 세상에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 사순절 설교 준비를 위해서 가까운 신학교 서점에 가 보았습니다. 좋은 책이 있길래 구입하려고 카운터에 가지고 왔더니 그곳에서 일하는 분이, 물론 신학생입니다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말을 하면서 그 책을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역시 내가 책 보는 눈이 있구나’ 흐믓한 생각을 하며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 후 여행을 다닐 때면 저희 교회 사순절 묵상집과 함께 꼭 같이 가지고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아주 깊은 내용의 책입니다. 사순절기간 매일 하루에 하나씩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절 설교 준비를 하려고 부활절날에는 어떤 글이 있나 펴 보았는데, 부활절날 묵상의 글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없었습니다. 왜 빠뜨렸는지 알고 싶어 저자에게 이멜을 보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자의 뜻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여기까지 안내해주면 됐지, 부활의 글은 각자가 알아서 쓰세요.’
교우 여러분,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가 각자가 알아서 써야할 줄 압니다. 그동안 우리는 엠마오의 나그네 길도 가 보았습니다. 거꾸로 예루살렘으로도 가 보았습니다. 이제는 부활의 소식을 안고 각자 세상을 향하여 나그네가 되어서 떠나십시다. 때로는 그 길이 외로울지도 모릅니다. 아니 힘들 것입니다. 힘들 때마다 부활의 공동체로 돌아오십시다.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부활의 나그네 길을 가십시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나그네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나그네들이 이번 주 할 수 있는 한 가지만 제안해드릴까요? 오늘 부터 시작해서 일주일간 혹시 식당에 가시면 팁을 주시지 않습니까? 팁을 다른 때 보다 듬뿍 드리십시다. 그리고 영수증에 이렇게 큰 글씨로 쓰시면 어떻겠습니까?
“Happy Easter!”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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