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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을 찾은 자들

날짜 : 2010.03.0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라합을 찾은 자들
성경본문 : 여호수아 2장 1-7, 15-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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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 곧 1700년도 말에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이름은 만덕이지만 여자입니다. 만덕의 부모님은 일찍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네 여인의 주선으로 기생의 집에서 기생으로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만덕은 본시 자신의 가족이 양반임을 내세워 관가에 나가 기적에서 곧 기생의 명단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원해 그 허락을 받아낸 후 독립합니다.
그녀는 타고난 사업가의 기량을 살려 제주도의 주요지에서 여관을 경영해 거금을 모읍니다. 만덕은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무역업에 손을 대고 물자를 교역하면서 큰 사업가가 됩니다.
만덕은 제주도에 서너 해 겹쳐 일어난 흉년으로 제주도민이 아사지경에 빠지자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제주도민을 살려냅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당시 거듭된 제주도의 흉년은 조정에서조차 구호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덕은 모아둔 천금의 돈을 풀어 큰 배를 세내어 육지에서 양곡을 실어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덕은 실어온 양곡의 10분의 1은 직접 안면이 있는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10분의 9는 제주도 관가에 보내 관가에서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주도민은 기아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덕의 이 자선사업은 조정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실상을 전해 들은 정조가 만덕에게 대궐의 ‘내의원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내리고 특별알현을 허락했습니다. 임금은 만덕을 보고 칭찬합니다.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심을 발하여 천여 명의 도민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로다.”
그리고는 상을 후하게 내렸습니다. 그런 연후에 만덕은 평생 소원이던 금강산을 구경하고 서울을 경유해서 제주도로 되돌아왔습니다.
제주도 출신이신 분들은 만덕을 잘 아실줄 압니다만 1977년 제주도민들은 한라산 사라봉 공원에 만덕관을 건립하여 만덕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만덕상을 제정하여 매년 10월에 열리는 한라문화제 때에 그녀를 기념합니다. 전생애를 근검과 절약으로 역경을 이겨내 성공한 후 사회를 위해 공헌한 모범 여성 한 사람을 선정하여 만덕상을 주며 그녀를 기리고 있습니다. 한 때는 기생의 집에서 생활할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한라산 높은 곳에 만덕관이 건립되어 그녀의 아름다운 삶을 기념하게 된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기생이었지만 역사의 길이 남는 위대한 인물이 된 한 여인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의 삶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을 때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여호수아는 먼저 두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냅니다. 그런데 두 정탐꾼은 여리고로 들어가자마자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기생의 집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쉽게 생각하면 기생의 집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생의 집은 열려 있는 집인 것은 확실한데 왜 하필이면 라합의 집이었을까요? 이 때 기생의 집이 라합의 집밖에 없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뭔가가 있었을줄 압니다. 이면은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적발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여리고왕에게 알리니 왕은 사람을 보내어 라합에게 정탐꾼을 내어 놓으라고 말합니다. 이때 라합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4, 5절 말씀입니다.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 잡으리라 하였으나.”
아주 대단히 용감한 여인입니다. 6절을 보면 이미 지붕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이 보낸 자들이 꼼짝 없이 속습니다.
하여튼 왕이 보낸 사람들을 보낸 후 라합은 자기의 소원을 정탐군들에게 말합니다. 8-14절에 소원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소식을 잘 알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로 인해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침공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을 살려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에 서로 돕기로 하고 헤어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는데 창문에서 줄로 타고 내려가게 합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약속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두 정탐꾼은 자기를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놓으면 그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참고삼아 결과를 말씀드리면 6:2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결국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김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라합은 정말로 복이 많은 여인입니다. 어떤 이유로인지 기생이 되었기 때문에 정탐꾼을 만났고 정탐꾼을 숨겼기 때문에 자신뿐이 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기생이 된 것이 더 잘 된 것입니다. 어릴 때 친구들은 라합을 비웃곤 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라합을 부러워할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삶의 모든 한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라합이 받은 축복에 만분의 일도 안됩니다. 여호수아서를 넘어서 성경 전체에 비친 라합의 모습을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지금 하늘나라에 가서 입이 제일 벌어져 있을 사람을 찾는다면 그중에 라합이 분명히 끼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라합에 대한 기사 몇 군데를 찾아볼까요? 먼저 마태복음 1:5, 6절 말씀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태복음 기자는 이 라합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정확히는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됩니다. 하여튼 라합은 이스라엘 역사에 아니 세계 구원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라합과 처음 소개해 드린 김만덕을 비교해 볼까요? 누가 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되십니까? 라합은 어찌되었던 기생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라합이 행한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민족을 배반한 것뿐입니다. 반면 김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자기 민족 곧 제주도민을 구한 위인입니다. 객관적인 면으로 평가한다면 김만덕이 훨씬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제주도민을 위한 위인으로 남아 있는 반면 라합은 온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역사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보기에는 김만덕이 훨씬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왜 라합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인류 구원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나요? 성경 한군데 더 찾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31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라.” 여기에 좀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을 믿음의 여인으로 아니 순종의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합의 순종이 라합을 믿음의 위인들의 반열에 서게 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을 하였다는데 무엇을 순종하였는지 좀 궁금합니다. 무엇을 순종하였죠? 우리도 그것을 알면 우리도 예수님의 조상이 될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은 예수님의 조상이 될수 없는 시절에 우리가 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합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정탐꾼들을 맞이 하였나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본문에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무엇을 순종하였는가 생각하면서 다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시간상 제가 해당 되는 부분을 봉독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21절 말씀입니다.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매라고 했고 이에 라합이 순종했습니다. 순종하여 붉은 줄을 맨 것입니다. 그러면 정탐꾼들이 붉은 줄을 매라고 할 때 라합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이당시 문화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생집에 붉은 줄을 맨다는 것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웬만한 기생같으면 “싫어요” 하지 않겠어요? 남들이 기생집인줄 다 아는데 왜 붉은 줄을 매게 합니까? 그런데 라합은 순종합니다. 라합은 무조건 순종하여 부끄러움의 줄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줄이 바로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알리는 줄이 된 것입니다. 무조건 순종하여 부끄러움의 줄을 내렸기에 라합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어 갔습니다.
여기서 잠시 신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붉은 줄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오시기 이 삼천년에 이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릅니다. 하여튼 이 붉은 줄은 신학적으로는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만일 라합이 이것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피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주 쉽게 붉은 줄을 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 삼천 년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보았을 때야 비로서 붉은 줄이 메시야의 피를 상징하는구나 알았을 것입니다. 곧 붉은 줄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한편 그 순간에는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순종입니다. 분명한 것은 라합이 붉은 불을 내릴 때 그녀는 순종으로 인해 무조건 내린 것입니다.
사실 김만덕이 행한 것에 비하면 좀 보잘 것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김만덕이 해 낼수 없는 것을 해 냈습니다. 부끄러움의 붉은 줄을 내렸습니다. 믿음으로 내렸습니다. 부끄러움의 줄이 그를 위대한 믿음의 위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붉은 줄을 내릴 때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어떻게 보면 붉은 줄을 내리는 절기입니다. 우리 자신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도 순종함으로 붉은 줄을 내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지 모릅니다. 요즘 같이 바쁜 때 언제 기도하고 언제 금식이나 절제하고 언제 구제하느냐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붉은 줄을 내리는 자들은 믿음의 축복을 받습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습니다. 붉은 줄이 라합의 운명을 바꾸었는데 라합은 어떻게 이들을 믿고 순종하여 붉은 줄을 내리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 무조건 순종하였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존심이 조금만 남아 있으면 도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부끄러움의 상징인 붉은 줄을 내립니까? 만일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주위에 붉은 줄을 내리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붉은 줄을 내리게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서 성령 안에서 건전한 추측을 해 볼수 있습니다. 함께 건전한 추측을 해 볼까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송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파송할 때 여호수아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곳은 위험한 곳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았지만 그것은 40년 전 일입니다. 강산도 4번 변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다른 충고는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얼마 전 모세가 자기에게 한 말을 가슴에 담고 있는데 그 말만 하였을 것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을 두 정탐꾼 파송식에서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이 말씀을 가슴에 안고 여리고로 들어갑니다. 이들 가슴에는 확신이 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한 사람을 예비해 두셨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을 안고 여리고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확신 위에 이러한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첫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겠습니다. 그의 외모나 직업이나 아무 것도 보지 않겠습니다. 바로 당신께서 만나게 해주는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바로 그 분으로 믿겠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기생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쁜 라합이라는 여인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눈에는 예쁜 여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 이스라엘을 도울 자로 보입니다.
순간 라합도 자못 놀랍니다. 여느 남자들의 눈빛과는 다릅니다. 전혀 다른 빛을 느낍니다. 자기를 위대한 여인으로 보는 눈길임을 느낍니다. 순간 이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니 어떤 일을 감수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생처음 자신을 위대한 눈으로 본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곧이어 이들은 정탐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탐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자기를 그토록 위대한 눈으로 보아준 것에 대해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지붕에 숨깁니다.
순간 왕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자기를 깔보는 듯한 눈길을 보내면서 묻습니다. 라합은 태연하게 아니 조금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들이 금방 떠나갔음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지붕에 올라갈 생각도 않고 자리를 떠납니다. 언젠가 이 집에 놀러 와야 하는데 괜히 귀찮게 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창문에 줄을 매어달아 정탐꾼들을 내려 보냅니다. 정탐꾼들은 다음에 자기들이 올 때 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놓으라고 말하며 밧줄을 타고 내려갑니다. 라합은 잠깐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하필 붉은 줄이지?”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정탐꾼들이 밧줄 타고 내려가는 소리는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로 들립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위대한 여인이라오.”
이 노래를 들은 라합은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어 갑니다. 이에 라합은 부끄러움도 잊은채 붉은 줄을 창문에 맵니다.

저는 라합을 라합이 되게 한 것은 아니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게 한 것은 라합이 만난 두 정탐꾼 아니 두 나그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두 나그네의 확신에 찬 눈빛을 통해 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라합은 성경에 여러번 나오는 위대한 여인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위대한 눈빛을 보내는 절기가 아닐까요? 사순절은 기도와 절제 그리고 구제를 행하는 절기입니다. 기도와 절제와 구제를 행할 때 우리는 이웃을 보는 눈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 안에 있는 위대함을 찾아내는 눈길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누구이던 그에게 위대한 눈길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붉은 줄을 내리게 하는 것이 바로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이웃 안에 위대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노래하곤 했던 분이 바로 유명한 인도의 시성 타골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1929년 조선이 일제의 통치하에 있을 때 타골이 일본을 방문하였습니다. 동아일보 기자가 조선 방문을 요청하자 대신 조선을 위하여 시를 썼습니다. 제목이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중략-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한국이 오늘의 한국이 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바로 타골의 이 노래가 말할수 없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처음 이 시를 접해 보았는데 아직도 처음 접했을 때의 감격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타골이 이처럼 위대한 시인이 될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찮은 민족 안에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노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타골의 노래는 이번 사순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지난 금요일은 세계 여성 기도회를 모였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아프리카의 카메룬의 여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회가 마칠 무렵 저는 타골의 시를 생각하면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타골은 우리 민족을 향하여 이처럼 멋진 시를 지었는데 과연 나는 카메룬을 향하여 이런 시를 지을 수 있는가?’ 시는 떠 오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타골의 시에 코리아 대신 카메룬을 넣어 보았습니다.

일찍이 아프리카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카메룬
-중략-
그러한 자유의 천당(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카메룬이여 깨어나소서.

카메룬을 넣어서 읽을수록 타골의 위대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향하여 노래를 부른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타골이 이처럼 이웃 나라를 위해 자연스러운 시를 쓰는데 기독교인인 저에게는 아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를 때 언젠가 카메룬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이웃은 부끄러움 없이 붉은 줄을 내리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아름다운 삶을 계속하십시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사순절은 한편 이웃을 위하여 위대한 노래를 부르지 못한 부끄러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위대한 노래를 부르는 연습을 하는 절기입니다. 결국 사순절을 바로 보냈을 때 우리는 이웃을 위하여 위대한 노래를 하나씩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세상에서 소외되고 연약해 보이는 분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보십시다. 그들은 우리들의 노래로 인해서 붉은 줄을 내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그들은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오프라 쇼에서 오프라는 방청객 50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 가운데 특별히 몇 분께 행운을 나눠드릴 거예요. 그 행운은 바로 선물로 준비된 12 대의 자동차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실제로 50명 중에 12명을 뽑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자동차 키를 선물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어쩌면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있는 해프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프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38분 중 딱 한 분을 더 추첨하여 자동차를 드리겠습니다. 행운은 여러분 곁에 항상 있으니까요.”
남은 38명에게 똑같은 크기의 상자가 배달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이 될지 긴장된 가운데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상자를 열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곤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자 38개 안에 모두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스튜디오는 기쁨의 탄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오프라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인공입니다!”

오프라는 모든 사람들을 특별한 눈으로 보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노래를 부르는 분입니다. 이러한 눈을 느끼고 이러한 노래를 듣는 자들이 부끄러움의 붉은 줄을 기쁨으로 내리게 되지 않을까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물론 돈이 없어 자동차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눈길은 줄 수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인공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은 나그네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사순절 첫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순절은 떠남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떠나는 자들은 도리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체험합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들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노래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떠남의 나그네가 아닐까요? 이 노래가 바로 우리들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 이웃이 바로 세상의 주인공들입니다. 나그네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우리가 이러한 노래를 부를 때 이를 듣는 자들에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도 모두 예수님의 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라합을 찾아 나섭시다. 그들에게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십시다. 곳곳에서 붉은 줄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민족을 구하고 인류를 구하는 자들이 새로이 탄생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인공입니다!!”

오늘의 라합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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