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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의 절기

날짜 : 2010.02.2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떠남의 절기
성경본문 : 창세기 11장 31절-1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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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주 반동안 한국과 뉴질랜드를 방문하였는데 저에게는 소중한 경험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첫 8일간은 장인어른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고 이어서 천국 환송하는 모든 절차에 함께 하였었습니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한 달 반전에 장인어른께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하고도 통화를 하였었는데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실 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안고 출국하였었습니다. 더 마음에 부담을 갖게 된 이유는 9일부터는 뉴질랜드에서 해외이민교회 교육과 목회 협의회에 참석하여 주제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연이 주제 강연인 만큼 협의회 모임을 빠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 꼭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 2월9일 오전 8시에 장인어른 장례예배를 교회에서 드리고 그날 오후 5:20분 비행기로 뉴질랜드로 향하였습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쳐치 (Christchurch)라는 공항에 도착하니 낮12시가 되었습니다. 점심대접을 받고 집회장소에 가니 개회예배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주제 강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단에 서자 첫 고백을 터뜨렸습니다.
“온 우주가 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실 것 같아서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이런 서두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온 우주가 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고백을 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저의 주제 강연이 이민 신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 우주는 지금 이민자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먼저 그런 고백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는 이민자들만을 위해 움직일까요? 사실 우주는 온 인간을 위해 움직입니다. 특히 믿는 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사순절 첫 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의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로 향하여 떠나는 절기입니다. 기도와 금식 및 절제 그리고 구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떠나는 자들은 어느새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에 서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사순절은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아니 이 고백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이 고백을 회복하십시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늘 입으로는 예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우주의 가장 가장자리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우주의 중심에 세워 놓고서는 우리는 늘 변두리에서 사는 인생처럼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우주의 중심에 모심과 아울러 우리들도 우주의 중심에 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지 살펴 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스스로 주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아브라함이 되기 전 아브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주변 사람들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1:31절 말씀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이미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고자 한 것은 아버지 데라의 뜻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아브람 가족이 산 곳은 갈대아인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의 가족이 활기치면서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 곳에서 주변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민을 생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이민가는 도중 하란에 들렸습니다. 하란에 들렸는데 무슨 연고인지 거기에 머뭅니다. 아마 갈대아인의 우르보다 살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하란까지 온 것만 해도 많은 나그네의 서러움을 많이 겪었을지 모릅니다. 결국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이제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아브람은 결단을 내려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와 자기 아내 그리고 조카 롯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계속 가나안 땅으로 내려 갈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잠시 멈춰서 사신 하란에 그냥 머물러 살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인 갈대아인의 우르로 돌아 갈 것인가. 아브람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참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고민 가운데 빠져 있는데 어느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희비가 엇갈렸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자기가 결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자기가 결정을 하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큰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은 전혀 생소한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당연히 망설였을 것입니다. 또 다시 나그네가 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아브람은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망설이고 있는데 또 말씀하십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개역 성경에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새 개정판에는 그냥 ‘복이 된다’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가까운 번역일줄 압니다만 내용은 같은 뜻입니다. 복 그 자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굴러도 복, 넘어져도 복, 뛰어가도 복, 앉아도 복, 누워도 복, 전 삶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큰 민족을 이루게 되고 자기의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고향에서는 꿈도 꿀수 없었던 일이 이루워질 것을 생각하니 흥분이 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고향인 그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야 합니다. 또 다시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 그 자체가 됩니다. 사실 창대하게 되고 복 그 자체가 된데는데 못 떠날리 있겠습니까? 계속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히는 자기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나그네 된 자기를 축복하는 자들이 복을 받고 나그네 된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자기가 나그네가 되어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너무도 좋은데 나그네 된 자기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만 주시지 왜 저주까지 주시려나 의문마저 생깁니다. 그러나 마지막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운운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곧 멋진 나그네가 되어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라는 것입니다. 곧 모든 이웃으로 하여금 자기를 축복하게 하는 나그네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면 축복이 저절로 나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큰 책임이 부여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온 우주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과 다름 없습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다.” 조금 더 길게 표현한다면, “떠나라. 나그네가 되어라. 그 때 너는 우주의 중심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한 분을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에 박원순 변호사가 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본래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어느새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최신형 휴대폰을 사용하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단독주택에서 사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졸부나 부당한 행위를 통해 부자가 된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부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단체에 기부도 하고 있었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도움을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그를 더 아무 생각 없는 부자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부자 얼마나 멋집니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닙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웃에 대한 구제가 그를 도리어 생각없는 부자로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법조인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선배로 꼽히는 조영래 변호사의 병문안에 갔다가 그의 인생을 바꿀 말을 듣게 됩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조영래 변호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박 변호사, 이제 돈은 좀 그만 벌고 눈을 좀 돌리지 그래. 외국에도 한 번 나가보고.”
‘돈 좀 그만 벌고’ 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습니다. 스스로 건전한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저 아무런 고민 없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일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드디어 1991년 모든 것을 중단하고 진짜 꿈을 찾기 위해 유학을 떠납니다. 한국에서의 모든 명성과 부를 남겨 두고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납니다. 돌아온 그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고 공공 봉사 부문 막3인공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비슷한 것 같지만 크게 다른 면이 있습니다. 박 변호사는 40대에 떠나는 경험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몇 살에 떠나라는 말씀을 받았을까요? 4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람은 75세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떠나갑니다. 나그네가 됩니다. 75세에 나그네가 된다는 것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갈 곳이라도 뚜렷하게 있었나요? 방향 감각이 서 있었나요? 75세에 떠나려면 방향감각이라도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방향감각이 서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향하여 갔고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좀 혼동이 됩니다. 정말 방향 감각이 서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힙11: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그네 중에 나그네가 되어 나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5세에 아무 방향 감각 없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창세기에 써 있지도 않은데.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아브람은 후에 자기가 가려는 가나안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조카인 롯의 목자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롯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먼저 롯이 기름져 보이는 땅을 택하죠.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주십니다.
롯에게 기름진 땅을 양보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새롭게 보여줍니다. 여기까지를 정리해 보면 아브람은 어디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인지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기에 아버지가 가길 원했던 가나안 땅으로 일단 향했던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곧 나그네의 아픔을 안고 떠난 아브람에게, 아니 롯에게 좋아 보이는 땅을 양보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하신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75세 나그네가 복 그 자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주의 중심이 되길 원하십니까? 복 그 자차가 되길 원하십니까? 아브라함이 복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여 75세에 나그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심각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도 우주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어디로 떠나야 하나? 떠나지 않고는 우주의 중심이 결코 될 수 없는가?’
떠남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아브라함처럼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임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 변호사는 선배 변호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 떠남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순절의 떠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떠남은 그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떠남입니다.
사순절은 기도와 금식 내지 절제, 그리고 구제의 삶을 사는 절기입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떠남의 삶입니다. 그동안 젖어있던 우리들의 습관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첫째로 나태한 기도 생활에서 떠나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아울러 깊은 기도를 통해 묶여져 있는 우리들의 마음과 정신을 해방시켜 자유로이 주님과 만나게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 세상 가운데 중심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순절 기간 여러분의 주어진 환경에 맞게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안에서 갈 바를 모르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전혀 기도의 맥이 잡히지 않을지라도 마음껏 하나님 안에서 방황하십시다. 우주 중심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금식과 절제는 우리를 세상의 정욕과 쾌락의 삶에서 떠나게 합니다.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인지 알게 됩니다.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육신의 편안함 없이는 견딜수 없는 우리들임을 알게 됩니다. 너무도 연약한 나그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정욕과 쾌락의 삶 말고도 너무도 넓은 세상이 있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주와 같은 세계를 체험할 것입니다. 금식과 절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민 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가 있는데 여기에 금식이나 절제를 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요즘 한 끼를 먹어도 최고로 밧난 음식을 먹으려는 욕망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대형 한국 그로서리가 이 지역에 들어 선 이후 더욱 심해진 줄 압니다. 사순절 동안 일주일에 한두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 먹는 것도 절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셋째로 구제의 삶입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작은 물질이 아무런 힘이 없는 보잘 것 없는 물질로 보였지만 구제를 통하여 그 작은 물질 안에 있는 우주와 같은 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물질에서부터 떠나는 멋진 여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Haiti를 위해서 또 여러 가지로 구제에 참여하였기에 구제에 대해서는 이만 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떠남은 하나입니다. 예수를 향한 떠남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떠남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일터를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멀리 이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사순절에 충실하십시다.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사십시다. 예수를 향하여 떠나십시다. 사순절이 마칠 즈음에 우리는 온 우주의 중심에 서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떠남의 절기입니다.

사순절의 떠남의 삶을 통해서 우주의 중심의 삶을 살고 계신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현재 독일의 수상이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여자 수상입니다. 메르켈 수상이 자신의 50세 생일에 많은 정치인들을 초대하였는데 한 과학자를 초대해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 과학자는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그의 강연 내용은 한 마디로 인간은 이미 결정된 뇌의 기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피동적인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곧 인간은 환경에 매어 있는 우주에 매여 있는 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메르켈 수상은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매우 매력적인 현대 뇌 연구 분야는 오늘날 수많은 실험 결과들을 산출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무한한 우주 한 가운데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우리는 우주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중략- 그래서 그런지 정말 편안합니다.”
저는 이글을 일고 독일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신앙 가운데 우주 한 복판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수상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메르켈 수상이 이런 멋진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메르켈 수상의 아버지는 일찍이 동독과 서독이 갈라져 있을 때 서독에 살다가 동독에 목사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진해서 동독으로 가서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목회를 하신 분입니다. 메르켈 수상이 어릴 때 떠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떠날줄 알았던 분이십니다. 스스로 나그네가 되신 분이십니다. 한편 메르켈 수상은 현재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남들 보는데서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나그네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사순절의 떠남의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온 우주 한 가운데 자신이 살고 있다는 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메르켈 수상의 아버지처럼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떠날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떠남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나그네가 될수 있습니다. 바로 메르켈 수상의 삶입니다. 우리는 복 그 자체가 될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 복을 남기는 자가 될수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기도와 절제와 구제를 통하여 영적 나그네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번 더 저의 여행에서 느낀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을 거쳐 뉴질랜드를 다녀왔기 때문에 비행기를 여러차례 타야만 했습니다. 세어 보니 9번 비행기를 탔습니다. 직행이 없으니 여러번 갈아타야만 했습니다. 비행기를 다 타 보셨은테니 잘 아실줄 압니다. 제일 먼저 퍼스트 클레스 (first class) 내지 비즈니스 클레스 (business class)고객들을 먼저 태웁니다. 제일 나중에 이코노미 클레스 (economy class)고객들이 탑니다. 저는 물론 economy class만 탔습니다만 제일 나중에 타게 되면 많은 경우 first class나 business class고객들이 편히 앉아서 드링크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줄레 줄레 뒤로 향합니다. 마치 그들이 비행기의 중심인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economy 고객들이 비행기를 타는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혼자서 흐뭇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나로 인해서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복을 받고 있다. 나로 인해서 이 비행기는 무사히 미국에 도착할 것이다.” 심한 착각인가요? 순간, 좁은 economy class 자리도 상당히 넓어짐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중심에 사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중심에 살기 위해서는 떠나셔야 합니다. 나그네가 되셔야 합니다. 사순절은 떠남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주님과 더불어 우주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잠시 떠나십시다. 나그네가 되십시다.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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