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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빛

날짜 : 2009.12.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의 빛
성경본문 : 미가 7장 8-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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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윌리엄스 (James Williams) 라는 분이 어릴 때 인도에서 살았었는데 ‘인도’ 하면 생각나는 것이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은 기차를 기다렸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기다립니다. 묵묵히 기다린다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묵직히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기차 시간표는 있긴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이라고 합니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언제 올지 아무도 예측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기차역에서 캠프를 친다고 합니다. 음식 만드는 도구를 가져오고 취침용가방 (sleeping bag)도 가져옵니다. 사실 이 기차역까지 오기 위해서 벌써 먼 길을 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온갖 살림살이를 끌고…. 이처럼 기차역에 온 사람들은 말없이 기다립니다. 아침도 해 먹고 그래도 안 오면 점심을 해 먹고 저녁까지 그래도 안 되면 텐트를 치고 자면서 기다립니다. 기다림에 지칠대로 지치지만 그래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멀리 기차가 보이면 갑자기 죽은듯했던 기차역은 살아난다고 합니다. 모두들 자기들의 살림살이들을 정리하고는 온 가족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는 기차로 달려갑니다. 막 도착한 기차는 이미 만원이 되어서 도착했지만 신기하게도 기차역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올라탄다고 합니다. 드디어 기차는 떠나고 기차역은 적막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또 다시 깊은 기다림 묵직한 기다림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또다시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인도라는 나라는 언제나 기다림의 왕국이 되어 갑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두 번 째 대강절 예배를 드립니다. 대강절은 한편으로는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다림은 하나입니다. 아기 예수가 2천년 전에 오실 때 그 누구도 그 때 오실지 몰랐습니다. 막연히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기다림 가운데 아기예수가 오셨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시 오실 예수를 막연히 기다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기예수가 막연한 기다림 가운데 오셨듯이 다시 오실 예수님도 막연한 기다림 가운데 오실 것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 기다림은 한 기다림입니다.
교우 여러분, 막연히 기다렸던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울러 지금도 막연히 기다리는 우리들의 기다림 가운데 예수님은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인도사람들처럼 지친 가운데 한 끼 한 끼 때우면서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요즘 우리가 하는 것처럼 일년의 마지막 한 달을 대강절로 정해 놓고 한 달간 주님을 열심히 기다리다가 한 달이 지나면 언제 기다렸다는 듯이 옛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서가 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미가서에도 기다림의 모습이 구구절절 보여 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가서가 대강절에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것을 알고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찾아 왔을 때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어디서 메시야가 태어 날 것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바로 미가서 5:2절로 대답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이 말씀 때문에 미가서는 대강절이 되면 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미가는 메시야가 어디에서 탄생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탄생하실 것은 몰랐습니다. 장소는 알았지만 시간은 모른 채 미가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가의 이 모습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장소는 압니다.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셔서 순간적으로 전 세계에 나타나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시간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미가의 메시야를 기다리던 모습이나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은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미가의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할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어느 주석가는 재판 장면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피고가 되어 있고 이방민족들은 고소자 내지 검사가 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염두해 주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려분을 재판장으로 초대합니다. 먼저 8절 말씀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여기에서 ‘나’는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편의상 이스라엘민족과 미가 선지자를 왔다 갔다 하며 본문 말씀을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때는 남왕국 유다나라가 죄로 인해 나라가 위태 위태할 때였습니다. 주위 이방나라들은 이스라엘은 망해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방나라들을 향해 미가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은 소리 지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라.”
기뻐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아서 아마 지금 고소자인 이방인들은 싱글벙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판이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미 고소측은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피고인 미가나 이스라엘은 조롱을 받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그들의 조롱에 굽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선언합니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입니다.” 피고인 미가도 확신에 차 있습니다. 양쪽이 다 자신만만합니다. 재판은 더 흥미로워집니다.
하여튼 고소측은 미가의 고백을 듣고 더 조롱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니 너희 같이 엄청난 죄를 범하고서 어떻게 다시 일어나고 더욱이 하나님이 너희의 빛이 된다고 말해. 너희는 지금 망하기 일보 직전이야. 너희들의 죄가 너희 앞에 있잖아.” 이에 미가는 답변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미가는 먼저 인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죄를 진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도 받고 징벌도 받아야 함을 알고 있고 이를 고백합니다. 재판장인 하나님은 이를 들으시고 신통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은 죄를 알고 있군.”
그런데 그의 고백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뿐 아니라 광명에 이르게 하심도 알고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재판장의 눈빛에서 무엇을 느꼈던지 미가는 자기를 조롱하던 자들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이 말을 듣는 고소인들은 어안이 벙벙해 집니다. 갑자기 고소측과 피고측이 뒤바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법정에 끌고 왔는데 이제 자기들이 피고측 자리에 서 있음을 느낍니다. 종종 재판할 때 이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릴 때 한국에서 페리메이슨 프로가 한창 유행하였는데 마지막 끝날 때에는 피고와 고소측이 뒤바뀌는 것을 보곤 합니다. 피고와 고소측이 뒤바뀌면서 재판정이 소란해지는 것을 느끼셨던지 재판장되시는 하나님이 비로소 입을 여십니다. 아니 마지막 판결을 내리십니다. 장내는 조용해졌습니다. 11절 이하 말씀입니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요약하면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을 위하여는 놀라운 구원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고, 반면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하여 멸망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판장의 마지막 판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미가와 이스라엘의 손을 번쩍 들어주신 것입니다. 미가와 이스라엘은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반면 고소측인 이방인들은 큰 절망에 빠집니다.
승리한 미가와 이스라엘은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잠시 후입니다. 세상 재판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판결문을 낭독하신 후 재판장님은 이스라엘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미가는 신중히 생각하더니 소원을 말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주석가들은 미가가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절 태평하게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때처럼 잘 살게 하소서. 잘사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를 괴롭히는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소서.” 미가는 다윗과 솔로몬의 태평시절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습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재판에서 승리한 미가의 소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많은 유적지를 보게 되는데 유적지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이름이 적혀 있는 두 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솔로몬입니다. 그리고 북왕국의 아합입니다. 아합은 나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두 왕의 이름이 가장 눈에 띄입니다. 그 중 솔로몬이 더 눈에 띄입니다. 미가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늘 느꼈을 것입니다. “솔로몬 영광을 다시 회복할수 없을까?” 한편 솔로몬 시대에 얼마나 화려하였던지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의로운 삶의 열매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다시한번 솔로몬의 영광을 회복시키소서’ 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재판장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15절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미가는 잠시 당황합니다. 미가는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의 시간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엉뚱하게 답변하십니다. 애굽에서 나오던 날 있었던 일이 바로 홍해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의의나라의 모습은 홍해의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미가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으셨습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미가는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의 사건은 단순히 머리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메시야의 오심과 함께 이뤄지는 사건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미가는 다윗과 솔로몬의 태평성대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홍해의 사건을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오심의 사건은 언제나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미가가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미가는 자신의 예측을 버리고 순순히 하나님의 계획에 귀를 기울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자신의 예측을 포기한 미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들려 옵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런데 이것은 미가가 예측했던 상황입니다. 이방인들이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이방인들이 꼼짝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예측이 다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님을 또 느낍니다. 미가는 더 호기심이 생겨납니다.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미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또 다시 자신의 예측은 틀렸습니다. 홍해의 사건을 보이리라 말씀하셨으니 미가는 당연히 이방인들의 멸망의 날을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재판장이 판결을 선포하기 전에 큰소리친 것 아닙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이 말을 듣고서도 재판장은 자기의 팔을 올려주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미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깨닫게 됩니다. 메시야를 통해 이뤄질 홍해의 사건은 모세의 홍해의 사건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건인 것입니다. 옛날 모세를 통해서는 모든 이방인들을 몰살시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통한 홍해의 사건은 이방인까지도 구원받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가는 한편으로는 실망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황홀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빗나간 예측으로는 실망하지만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미가는 황홀경에 빠집니다. 곧바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18, 19절 말씀입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제 미가는 메시야를 바라보며 온 인류를 위한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위한 홍해의 사건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바다에 던지기 위하여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미가는 자기의 예측을 넘어서 찾아오시는 위대한 메시아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미가는 그 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생각해 볼까요? 미가는 이러한 메시야의 모습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을 것입니다. 미가는 아침마다 생각합니다. “메시야가 오늘 오실까 오신다면 어떻게 오실까? 부잣집에 탄생하실까 가난 집에 탄생하실까?” “그런데 그 메시야는 어떻게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실 수 있을까? 이러한 메시야의 모습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미가도 그러한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묵상한 메시야를 닮아가게 되지 않았을까요?
최근에는 전보다 부쩍 저의 아버님을 잘 아시는 분들로부터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 간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얼마 전에는 조카가 왔었는데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 “삼촌 할아버지와 많이 비슷해지셨네요. 특히 매너가 비슷해요.” 왜 제가 갈수록 저희 아버님을 닮아 가게 됩니까? 평생 가장 많이 보아온 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미가도 매 한가지입니다. 자주자주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축복을 안고 찾아오는 메시야를 묵상하는 미가는 어느덧 그 분을 닮아 갔을 줄 압니다. 곧 인간의 예상을 넘어 찾아오실 메시야를 늘 생각하던 미가는 자기 자신이 예상치 못한 축복을 이웃에게 주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확증시켜주는 말씀이 8절 후반절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가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빛이 되신 것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자기의 빛이 되신 것을 고백하는 미가는 메시야를 묵상하면서 메시야를 통한 빛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이웃을 위한 예상치 못한 빛이 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기다리는 메시야의 모습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대강절을 맞아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기다리시기만 하시겠습니까? 대강절을 맞아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묵상하십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웃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반김을 통해서 메시야의 빛은 우리 이웃에 비추어질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시작한 이웃을 위한 예상치 못한 축복의 삶이 있습니다. 오래되지 않았기에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얼마 전 종교 개혁주일에 한 가지 제안을 한 것이 있습니다. 사이다 한 병이라도 사서 구멍가게를 도와주자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설교 이후에 저는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종종 교회 주변을 산책하는데 일주일에 한번은 꼭 구멍가게를 들려서 오렌지 쥬스를 사먹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주변에 가게 중에 한 가게를 선정하였습니다. 산책을 하다가 그 가게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쥬스를 삽니다. 아직 실행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계속하다보면 일하는 분들의 얼굴도 익히게 될줄 압니다. 언젠가는 일하는 분의 이름도 알게 될 것이고 좀 더 사귀게 되면 제가 목사인 것도 밝히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기의 고민도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복음도 전하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제가 목사인 것을 끝까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들 몰래 주님의 사랑을 안고 찾아감을 통해 이미 메시야의 빛은 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빛을 소유한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축복을 이웃에게 베푸는 자들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대강절 기간 다시 오실 주님을 깊게 묵상하십시다. 아울러 예측할 수 없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일주일에 한번은 꼭 이웃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한 가지 일을 하십시다.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을 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기억하는 테레사 수녀에게 어느 날 한 부인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외동딸이 남편과 자식을 사고로 잃고 큰 충격을 받아서 자신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딸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을지 생각하면 애가 탄다는 부인은 딸의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마더테레사가 말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딸이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옷과 가장 맛있게 먹던 음식을 그 집에 슬그머니 갖다 놓고 오세요.”
부인은 돌아가자마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딸의 어릴 적 옷을 옷장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 딸이 좋아하던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서 딸의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부인은 딸이 여전히 엄마의 위로를 거절하자 말없이 옷과 음식을 딸의 방 앞에 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튿날 딸이 엄마를 찾아왔습니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가 놓고 간 옷을 만지고 음식을 먹으면서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죄송해요. 엄마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고 있었어요.”
딸은 어머니로부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딸처럼 모든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선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축복은 바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축복을 안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시는 교우 여러분, 예상치 못한 축복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십시다.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예상치 못한 축복은 바로 이 시대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함께 기적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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