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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종교개혁자

날짜 : 2009.10.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첫 종교개혁자
성경본문 : 사도행전 10:1-23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1025.wmv

한국 어느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란 마을에서는 대학 문턱을 밟아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의 간부 사원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결심했습니다. ‘내가 마을의 한을 풀어보리라.’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비록 야간대학이긴 했지만 대학 졸업장을 거머쥐었습니다. 마을의 첫 대학 졸업생이 된 셈입니다. 곧 대기업에 입사했고 동기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드디어 부장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자신의 성공한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서 울었을까요? 반대였습니다. 그는 탄식하며 울었습니다. “내가 만약 대학 졸업이 아니라 유학을 꿈꾸었다면 유학을 마쳤을 테고, 내가 만약 대기업의 간부가 아니라 사장을 꿈꾸었다면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중소기업의 CEO자리에 올랐을 텐데….”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후 좀 더 큰 꿈을 꾸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어느 대기업 간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꿈의 소중함을 체험하였습니다. 반면 자신의 꿈이 작았던 것으로 인해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는 목사라서 그런지 이 글을 읽고 금방 천국문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천국문에 들어가면 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 울음이 있겠죠. 하나는 ‘나 같은 것이 이런 곳에 다 오더니…’ 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모두 흘릴 줄 압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 올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의 울음을 터트립니다. 또 다른 울음이 있을 줄 압니다. ‘이럴줄 알았다면 더 큰 꿈을 안고 더 주님을 잘 섬길걸…’ 생각하며 한탄하는 울음이 있을 줄 압니다. 땅에서 드린 작은 섬김이 놀라운 축복이 되어서 자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감격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후회도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잘 섬겼더라면…’
그러나 천국문에 들어가서 후회의 눈물을 전혀 안 흘리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문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천국문에 들어가서 후회의 눈물을 전혀 흘리지 않았을 한 사람이 소개되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라는 도시는 그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만, 유대인들이 가이사랴 곧 로마 황제에게 바친 도시입니다. 곧 로마를 향한 충성심이 가득 찬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고넬료라는 로마군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백부장이라고 하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 군인의 말 하나로 가이사랴가 흔들흔들 할 정도였을 줄 압니다.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2절 말씀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구제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오후 3시가 되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세시에 기도를 한 이유는 이 시간이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로마인이지만 그는 유대인처럼 같은 시간에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말씀합니다. “고넬료야.”3, 4절 말씀입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고넬료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자기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데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이방인의 기도와 구제를 받아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이사랴를 뒤흔드는 자기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자기는 감히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만난다는 것은 꿈도 꿔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청하라 하니 깜짝 놀랍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제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인들을 불러서 상황을 다 이야기한 후 욥바로 보냅니다.
장면은 바뀌어져서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고 장소는 욥바로 옮겨집니다. 마침 정오시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하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12시가 되었으니 배고픈 시간이 되었습니다. 허기가 져 오는데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면서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율법에서 먹지 못하게 금한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큰 소리가 들리는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베드로는 율법적으로 답변합니다. 이 때 소리가 들립니다. 1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계속됩니다. 베드로는 혼자서 이상한 일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그 두 사람을 맞이하고 그 다음날 가이사랴로 향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황제를 위하여 세운 도시에 로마군 백부장을 만나러 떠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여정은 기독교 역사를 뒤바꾸는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23절까지 봉독해 드렸습니다만, 그 다음 장면들을 보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얼마나 큰 영향을 기독교에 미치게 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입으로 이 사건의 중요성을 고백을 합니다. 28, 29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베드로는 지금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법을 어겼다고 고백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는 자들 안에 온전한 자유가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유대인과 이방인은 교제를 할 수 없었을 때였습니다.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이 법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삼년씩이나 따라 다녔고 성령 세례를 받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법을 몸소 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베드로가 이 법을 깨게 되었습니까? 고넬료 때문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베드로를 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 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누가 반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바로 로마 교황이 아닙니까? 로마 교황의 원조인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자기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율법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니깐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이 보입니다. 그는 기도와 구제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를 통해 율법과 권위의 사람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자기가 지키던 하늘같은 법을 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우주적 사건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건을 하나님은 그냥 넘어 가실리가 없습니다. 4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또한 모인 자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과 성령강림 역사와 같은 사건이 펼쳐진 것입니다. 곧 고넬료와 그의 일행은 지금 마가의 다락방의 사건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성령이 함께 내려오는 우주적인 역사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적 역사의 시작이 누구였습니까? 이 우주적 사건의 시작은 고넬료였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사람인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쳐주셨습니다. 고넬료를 통하여 고집장이 베드로를 개혁시킨 것입니다. 로마 교황의 원조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요즘 교황들이야…. 요즘 교황들도, 아니 개신교의 종교 지도자들도 기도와 구제의 사람들을 통해 변화되고 있을 줄 압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우선 고넬료를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기도와 구제의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 11-13장에 또 나옵니다. 사도행전 11-13장에는 그 유명한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안디옥 교회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안디옥 교회는 모든 이민 교회에 모델 교회라고 가는 곳마다 외칩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를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인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첫 번째로 세계선교사로 사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을 탄생시킨 안디옥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요? 사울을 바울 되게 한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11:27-30말씀을 보면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특히 이스라엘 땅에 크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안디옥 교회는 헌금을 하여 유대인 형제들에게 보냅니다. 안디옥 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한편 13:2절 말씀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곧 기도와 구제를 아낌없이 하는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주적 사건을 창출하신 것입니다. 아니 안디옥 교회에서 숨어서 기도하고 숨어서 구제하는 교인들을 통하여 바울을 세계적인 종교개혁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곧 바울의 뒤에는 기도와 구제의 안디옥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뒤에는 기도와 구제의 사람 고넬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와 구제의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미국의 표준 철도의 철길 너비는 정확히 143.5센티미터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죠. 왜 마지막이 3.5가 되었는지 흥미롭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영국에서 철도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미국에 그대로 건설했습니다. 그러면 또 궁금합니다. 왜 영국은 그러한 수치로 철도를 만들었을까? 철도의 전신이랄 수 있는 광산의 광차 궤도를 만든 사람이 똑같이 143.5센티미터로 철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광차 궤도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 당시 마차의 바퀴 간격이 143.5센티미터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마차의 바퀴 간격은 143.5센티미터였을까요? 영국의 옛 도로가 바퀴 홈이 있었는데 이 바퀴 홈의 거리가 143.5센티미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퀴 홈이 있는 영국의 옛 도로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수 천년 전 로마제국 사람들이 영국에 와서 처음 만들었는데 이때 건설된 도로가 지금까지도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로마 전차가 이 도로에 처음으로 홈을 만들었고 이 간격이 143.5센티 미터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차 바퀴와 마차가 고장 날까봐 겁이 나서 이 홈에 맞춰 마차를 만들었고 로마 사람들이 전차를 만들어 이용한 이래로 바퀴 간격은 모두 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0년이 지난 후 미국의 철도 간격이 된 것입니다.
2000년간 마차의 바퀴 간격에서 시작된 철도 간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역사는 변했습니다. 발전적으로 변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줄 압니다. 하여튼 변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을 것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고 또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늘 변할 것입니다. 발전적으로 변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것이 곧 종교개혁입니다. 교회는 늘 더 좋게 변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구요? 기도와 구제의 사람들입니다.
철도에 두 철제 레일이 평행으로 가듯이 참 종교개혁을 위해서도 평행으로 가는 두 레일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구제의 레일입니다. 기도와 구제의 레일을 통해서 종교 개혁의 기차는 2,000년간 달려 온 것입니다.

1546년 마틴 루터가 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에 95개 조항을 게시판에 붙임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거의 500년이 지났습니다. 그 후 개신교는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가 되어 갔습니다. 저희 교회도 설교를 제일 마지막에 하게 된 이유는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가자는 뜻에서 였었습니다. 물론 장단점이 있습니다. 한편 요즘 개신교는 말씀에서 찬양으로 점차 옮겨지는 추세를 보게 됩니다. 말씀과 찬양 모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찬양의 기차가 온전히 달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기차는 기도와 구제라는 레일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구제를 잃을 때 언젠가 말씀과 찬양의 기차도 탈선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 개혁주일을 맞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시고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여러분에게는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한번 여러분의 기도의 레일과 구제의 레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유형이 있을 줄 압니다. 제일 좋은 것은 기도와 구제의 레일이 평행으로 잘 뻗혀 있는 사람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의 기차가 그 위로 쌩쌩 지나갑니다. 그 보다 좀 못한 것이 있을텐데, 기도나 구제가 평행으로 뻗혀 있지 못합니다. 기도가 길고 구제가 짧던지 구제는 긴데 기도가 짧던지…. 기차가 조심 조심 달립니다. 언제 탈선할지 몰라서…. 마지막 또 한 유형이 있겠죠. 둘 다 짧아서 기차가 떠날 엄두도 못냅니다.
‘구제’하면 많은 분들이 부담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큰 부담을 벗게 하는 한 방법을 얼마 전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연합부흥회에 강사로 오신 송길원 목사님이 우연히 인터넷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77가지 비결’이라는 글을 접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10가지를 목사님은 실천하고 있다면서 그 열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는 소개해 드릴 수 없고 몇 개만 소개해 드리면, ‘많이 웃어라,’ ‘30분씩 일찍 일어나도록 하여라,’ ‘침대 곁에 탁자에 항상 메모 수첩과 연필을 놓아 두어라. 100만 달러짜리 아이디어는 가끔 새벽 3시에 떠오르는 수가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사이다라도 한 병 사서 구멍가게를 도와주어라.’
마지막 대목을 읽고 저는 구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1, 2불 더 비싸지만 가난한 구멍가게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구제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기도의 레일만 만들어 간다면 종교개혁의 기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구제의 레일도 함께 만들어 갑시다. 종교개혁의 기차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두셨습니다. 우리는 후회의 눈물 없이 천국 문에 드러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어쩔수 없이 구교와 신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교 곧 카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이 곧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거꾸로 하시는 분들이 요즘 많이 생겨납니다. 신교에 있다가 구교로 가는 것입니다. 물론 평신도들은 많이 그럽니다. 저희 교회를 다니시다가 성당 다니시는 분들 있을줄 압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나 성공회 신부였다가 카톨릭으로 가시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에 복음주의신학협회 회장이면서 유명한 기독교학교인 베일러(Baylor)대학 교수였던 프란시스 벡위드(Francis Beckwith)교수가 신교를 떠나 카톨릭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신교의 모든 신학이 구교에서 나왔는데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교와 구교의 신학이 대동소위함을 주장합니다. 두 번째로는 아버지가 구교였는데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는 것은 십계명 제5계명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믿고 다시 구교로 돌아갑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육신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면서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는 자기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어느 신학자의 편지를 소개합니다.
“1986년 4월 26일. 당신의 삶이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후 19년이 지난 같은 날 2007년 4월 26일 자신은 카톨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는 카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의 한 자취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월 26일은 자신이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을 산 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분은 언젠가 하늘 문을 들어섰을 때 후회할 것이다. 그는 그 때 깨달을 것이다. 카톨릭으로 옮기는 것이 역사의 길이 남는 삶이 아니었던 것을…, 참으로 길이 남는 삶은 신교에 있던 구교에 있던 기도와 구제의 삶만이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구멍가게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이다 한 병을 사 먹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의 자취입니다. 이것을 매일 매일 한다면 얼마나 위대한 자취가 되겠습니까? 이러한 자취들이 모여서 그 시대에 필요한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당 다니시는 분들을 교회로 다니게 하는 것, 아니면 교회 다니시는 분들을 성당에 다니게 하는 것이 참 종교개혁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두 레일을 놓는 것이 참 종교개혁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계속 두 레일을 놓아 가십시다. 기도와 구제의 레일을 놓아 갑시다. 우리가 놓은 두 레일 위를 예수님이 타신 기차는 신나게 달리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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