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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

날짜 : 2009.10.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스도의 마음
성경본문 : 빌립보서 2장 1-11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1004.wmv

시카고의 한 교회가 어린이 주일학교를 위해 주일마다 여러 대의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버스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한분씩 타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관찰하니까 버스에서도 항상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따로따로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한 분이 아이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피부 색깔은 결코 우리가 나뉠 수 있는 이유가 못 된다고 말하면서 사실 잘 보면 우리 중에 완전한 흰색이나 완전한 검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역설하고 아이들에게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피부색은 검은 색도 백색도 아니다. 우리는 사실은 다 회색이다. 우리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다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시 다짐을 받고 나서 버스에 태웠는데 뒤쪽에서 아이들 가운데 대장격인 아이가 교통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랍니다.
“밝은 회색은 이쪽에 어두운 회색은 저쪽으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야기일줄 압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평화를 외칩니다. 인간평등도 외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밝은 회색 어두운 회색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선입견의 병, 차별의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병든 우리의 삶에서 참된 평화는 불가능한가요? 오늘 세계 평화주일이자 사회정의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참 평화에 이르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일견해 읽으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만 자세히 읽을수록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음을 느끼는 말씀입니다. 사실 헬라어로 보면 더 복잡해집니다. 어느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는데 저의 마음에도 쏙 들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를 받아 보았느냐, 그러면 나의 말을 들어라.”
사실 선입견의 병에 안 걸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나 얼마만치는 다 있습니다. 한편 교회 다니시는 분치고 권면이나 위로 성령의 교제나 긍휼 안 받아 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곧 사도바울은 얼마마치 선입견의 병이 있는 교인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긍휼이나 자비를 받아 보았느냐?” 그리고 이 질문에 예스를 하면 자기의 권면을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이 2절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사도바울은 선입견의 병이 있는 자들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말은 쉽지 좀 막연합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막연하게 느껴졌던지 다음으로는 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런데 한 마음을 품은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더 낫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곧 남을 더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선입견의 병에서 또 더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선입견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약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남을 더 내세운다 남을 더 낫게 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자주 자주 말씀도 들었고 노력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번번히 실패하였습니다. 이번만은 실패하지 마십시다. 그러면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남을 낫게 여기는 표현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허리 굽혀 절을 하나요?
몇 년 전 가까운 미국 교회에 남아프리카의 투투 대주교가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가서 그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쫓아가서 그 분의 말씀을 들었겠습니까? 저는 그 분이 저보다 나으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그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길이 흘러갑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주 멀리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래전에 작고하신 분들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들보다 위대하신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도 위대합니다. 위대하신 분들의 자서전이나 작품이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의 삶을 많이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들이 왜 그렇게 위대하게 되었는가?
저는 확신합니다. 그중 많은 분들이 이웃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입니다. 이웃을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이웃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위대한 삶에 비하여 나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러니 나 자신의 이야기도 하지 않거니와 이웃의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서로 서로 낫게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선입견에 빠져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기독교 저술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Soul Survivor’라는 책에서 자신을 자신이 되게 하였던 분들을 소개합니다. 곧 자기의 영웅(hero)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일 줄 압니다. 몇 분만 소개해 드리면, 마틴루터 킹(Martin Luther King),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마하트마 간디, 헨리 나우엔 등 입니다. 이 분들의 특징은 대개 남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왜 들었겠습니까? 남을 자신 보다 낫게 생각하니 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위대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필립 얀시가 소개한 사람 중에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였던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많은 책을 내었는데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닙니다. 그 분의 책은 대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책의 3/4내지 4/5가 남의 이야기입니다. 원주민 자녀들의 이야기, 할렘(Harlem)가 흑인 어린이들의 이야기 산속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들로 책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그를 위대한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필립 얀시도 그를 자신의 영웅 중에 한 사람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을 자신 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결국 위대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이 남긴 자서전이나 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도 저들을 닮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 책은 그만 보고 너의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의 이야기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선입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낫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선입견에서 해방될뿐더러 점점 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특히 세상에서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영적 건강을 위한 귀한 보약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만 들으면 다 되나요? 4절 말씀입니다.
“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들은 남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또 남의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남의 일을 돌아보는 것 이것은 늘 함께 가야합니다. 그러면 남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어떤 의미로 남의 일을 돌아보라고 하였을까요? 남들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찾아서 그것을 돌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요? 물론 그것도 있을줄 압니다.
존 맥나이트(John McKnight)라는 사회학자가 ‘선한 종(good servant)’와 ‘악한 종(bad servant)’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요점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bad servant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나쁜 봉사자는 이웃에게 없는 것만을 찾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다 하면 돈을 구해다 줍니다. 병이 낫다 하면 의료 혜택을 베풀어 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돈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 이 분은 TV를 통해서 아픈 사람들 사진을 보여주며 돈을 모으는 기관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돈을 거둬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좋은데 때로는 더 이상 자선기관 없이는 살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bad servan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급할 때는 도와줘야 하겠죠.
반면 선한 봉사자는 누구겠습니까? 이웃 안에 있는 은사를 발견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곧 이웃 안에 이미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주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낫게 여기는 방법은 이웃 안에 숨겨진 보화를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good servant라는 것입니다.
사실 good servant 는 이웃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웃이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가도록 돕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6/25동란이 끝날 무렵 PCUSA 교단을 통해서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저희 아버님은 당신의 보화를 십분 계발하실 수 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교육계에 많은 공헌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위대해 지는데 그것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더 멋진 이야기를 창조하도록 또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는 특유한 보화가 있습니다. 이 보화는 이웃의 사랑과 권면을 통해서만 계발되어집니다. 이웃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계발할 때 우리는 참으로 이웃과 하나가 됩니다. 참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사도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각각 자기의 은사를 개발할 뿐 아니라 남의 은사를 계발하게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을 잠깐 정리해 볼까요? 여러분에게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까? 그러면 더욱 한 마음이 되셔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셔서 이웃을 낫게 여기셔야 합니다. 이웃을 낫게 여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듣는 자가 위대해 집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은사를 개발할 뿐더러 이웃의 은사를 늘 찾아내고 개발하는데 기여하여야 합니다. 그로인해 이웃이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가게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주님은 자기를 낮추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무엇을 하셨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우물가의 여인,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그들뿐이겠습니까, 온 인류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을 줄로 생각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우리도 그래서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편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귀한 것을 계발시키는 삶을 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안에 있는 은사를 계발시키는 삶을 사셨습니다. 곧 모든 인간을 높이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높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귀한 것을 계발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요? 9-11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은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자들이 이웃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웃의 은사를 계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신 삶이고 사람의 은사를 계발시킨 삶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주님을 높이십시다. 또한 함께 주님을 흉내내 보십시다. 주님을 찬양하며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이웃의 보화를 발견해 나갈 때 우리 안에 선입견의 병은 사라지고 우리는 참으로 평화의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명작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찮은 이웃의 이야기도 아울러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사람의 자서전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웃 안에 있는 보화에도 늘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입견은 사라지고 우리는 모두 같은 회색의 아름다운 사람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리알라 뷔케마(Liala Beukema)라는 여자 목사님이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시카고 도시 한 가운데서 도시 목회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홈리스(homeless)여인을 만난 후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그 녀는 언제가 예배당 뒷자리에 앉는다. 그 녀는 이름 없는 여인이다. 이름이 있다면 Homeless, helpless, Needy. 우리는 그녀보다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동정의 눈으로 그녀를 본다. 우리는 그녀와 늘 거리를 둔다. 때로 우리가 가진 에너지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할까봐. 우리의 눈으로 우리는 벌써 그녀를 분석해 놓았다. 물론 우리는 그녀를 안다. 비슷한 사람을 수없이 보아왔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어느 날 용기백배하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손을 내민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도리어 나의 옷에 그녀의 더러운 손이 닿는 것이 보인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그녀의 눈을 봐라.’ ‘그녀의 입술을 봐라.’ ‘그녀의 말을 들어라.’ 순간 그녀의 입술이 무엇인가 속삭인다.
“아버지 건강은 어때요?”
아버지라니? 나의 아버지는 얼마 전 심장마비를 일으켰는데, 이를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매일 기도드리고 있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나의 어머니도 심장마비를 일으켰어요. 나는 당신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어요.”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삶에 초대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아픔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우리의 은사를 계발하고 있었다.(저자편집).”
이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한 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십시다.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보화를 찾으십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 어렵다고요. 예수님을 높이십시다. 그 때 우리도 주님을 닮아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의 은사를 계발하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참 평화가 온 세상에 넘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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