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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빛이라

날짜 : 2009.09.2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주 안에서 빛이라
성경본문 : 에베소서 5장1-8, 19-21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927.wmv

세인펠드(Seinfeld)라는 미국 사람들이 즐겨 보는 코메디가 있습니다. 한 에피소드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두 젊은이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남자 청년의 이름은 퍼디(Puddy), 여자 청년의 이름은 엘레인(Elaine)입니다. 어느날 엘레인이 남자친구가 크리스챤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퍼디의 차를 빌려 타 보았는데 발동을 켜니 크리스챤 방송이 나온 것입니다. 남자 친구는 그동안 크리스챤임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레인이 퍼디에게 말합니다.
“너 하나님 믿니?”
“응.”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안 믿는 것이 좀 문제가 되지 않니?”
“나는 괜찮아.”
“왜 괜찮아?”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니깐….”

코메디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에피소드입니다. 저자가 도리어 크리스챤이면 좋겠는데, 제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누가 저자이든 우리들의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자기만 잘 믿고 이 땅에서 잘 살고 천당에 가면 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챤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코메디는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즐겨 본 코메디입니다.
저는 이 대사를 어느 책에서 읽어 보았는데 이것을 읽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전날밤에 이 코메디를 보면서 웃어제낀 사람이 그 다음날 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분의 뇌리에 전날밤의 대사가 떠 오르지 않았을까요?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니깐….”
사실 저희 교회를 보면 하버드 스트리(Harvard St.)를 지나는 사람들은 요즘 높게 올라간 건물을 보면서 지나게 될텐데 만일 이 코메디를 본 삶이 우리교회 옆을 지나게 되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 코메디를 안 보았을지라도 이 코메디의 저자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도 꽤 있을텐데 그들도 야릇한 생각을 안고 우리 교회 옆을 지나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의 과민한 반응일줄로 압니다. 많은 분들이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칠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위해 우리 교회를 위해 새 도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지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그 숙제를 풀어 가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마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교인들에게 최고의 이미지를 소유할 것을 말씀합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입니까? 말하기는 쉽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읽는 에베소 교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으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할 것을 다 알았던지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사도바울의 말씀에 다 수긍하며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엄청난 것들을 사도바울이 요구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3절 말씀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리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그런데 교인들은 자못 놀랍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첫 번 째 길은 생각보다는 쉽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표현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입을 다무는 것 물론 어렵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면 그래도 해 볼만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 머리로는 생각이 날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입을 다물어서 우리들의 호흡을 그런 것으로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의 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 다음 말씀을 살펴볼까요? 4절 말씀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또 다시 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귀한 호흡을 나쁜 말로 망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5절은 3, 4절을 보완하는 말씀입니다. 곧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본받기 위하여 나쁜 말을 삼가고 쉴새 없이 좋은 말 감사의 말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본받기 원하십니까? 뭔가 큰 일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단 접어 두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고 감사의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 째 필수 조건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말씀으로 좋으신 세상을 만드셨는데, 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살고 있는데 당연히 좋은 말과 감사의 말을 많이 해야죠.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게 되고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두 번 째로 행하여야 하는 말씀은 6절부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여기서는 남의 헛된 말을 듣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을 많이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나쁜 말을 들으면 하나님을 본받는데 방해가 될까요? 나쁜 말도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헛된 말을 자꾸 들으면 거기에 언젠가 속아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아울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결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언젠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헛된 말을 계속 들어 보세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헛된 말을 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 같은데 실상은 듣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쁜 말하는 사람을 불쌍하다는 듯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참 안 됐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겠군.” 그러나 사실 나쁜 말을 듣는 자들도 거기에 언젠가 속아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해 드릴까요?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몰랐던 대표적인 사람이 시카고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였습니다. 알 카포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 생애의 황금기를 바쳐 가며 사람들을 도와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대가가 온 세상의 비난과 범죄자란 낙인뿐이란 말인가!”
자신은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알수가 없었습니다.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속고 속이는 삶을 산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헛된 말들 가운데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잃어 버린 것입니다. 어느 감옥소 소장이 하는 말이 흉악무도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악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헛된 말을 듣고 또 들으면 우리도 모르게 병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헤아릴수 없게 됩니다. “나는 안 그래” 말씀하시지 마십시요.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아예 자리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 해 볼만 합니다. 첫째는 좋은 말을 많이 하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나쁜 말이 있는 곳에는 아예 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받는 것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생각보다 쉬운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8절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렇게 풀이해 볼수 있습니다.
“너희는 전에는 어두움 가운데서 늘 헛된 말만하고 헛된 말만 들으면서 살았고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살았는데, 이제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도리어 아직도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라. 그런데 빛을 비추는 삶은 별거 아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나쁜 말을 듣지 말아라.”

1960년도말에 나이제리아(Nigeria)라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전기가 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그 곳에 있었던 어느 분이 전기가 들어 오면서 생긴 일을 설명하였습니다. 이 분은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족장들을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가 늘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어느날 전기가 들어 왔습니다. 집마다 전기불 하나씩 제공되었습니다. 밤이면 식구들은 천정에 달려서 방을 밝게 비추는 전등만을 쳐다보면서 황홀해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기가 들어 오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조상적으로 부터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잃었습니다. 마을의 족장들의 입을 통해 전해 오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자기 집 전기 불 밑에서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화롯불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잠깐 말씀드릴까요? 제가 어릴 때는 물론 전기가 들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당시에는 연탄이나 장작으로 온돌을 덥히는 집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랫목은 따뜻하고 윗목은 찹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집에서 살았던 분 별로 없을줄 압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온 가족이 한 공동의 토픽을 갖고 대화를 나누었고 또 싸우기도 했습니다. 저의 집은 식구가 많았는데 친척들도 종종 함께 살곤 하여서 대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랫목은 사랑과 미움의 전쟁터였습니다. 그 때의 장면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3때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얼마나 좋았던지 이제는 제 방이 생기게 되었고 더욱이 장작 때는 일도 없고 연탄은 물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보일러를 통해서 아랫목도 윗목도 없는 온돌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것이 가정 이야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가정의 일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전처럼 함께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각자 자기의 방에서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고 자신의 성공도 만끽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곧 가정의 일은 계속 생겨났지만 가정의 이야기가 이어가는 즐거움이 격감하였다고 할까요? 말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일줄 압니다. 가정에서 되어지는 좋은 이야기들을 말하는 기회를 그만큼 잃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 말을 안해도 잘 살았기 때문이죠. 사회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 만큼 이야기가 주는 축복을 잃어 갔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세상적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본받는 삶에서 멀어져 갔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경제 개발이 가져온 비극의 일면일줄 압니다.
반면 요즘 미국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읽었기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미국 사람들이 개인당 쓰는 방수가 1.3쯤 된다는 보고서를 읽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의 기억이 맞는다면 평균 한 사람이 방 하나에다가 좀더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부부일 경우는 3방을 차지하고 산다는 뜻일줄 압니다. 여러분 가정을 생각해 보세요. 어떠신가? 부부만 살아도 방 세개는 다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조심하세요. 방이 남으면 남을수록 하나님을 본받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소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방이 많은 집 너무 부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요즘이 사도바울 시대보다 더 하나님 본받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이 어려움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방 많은 집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방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자주 온 가족이 모이는 일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가장 쉬운 것은 가정예배를 많이 드리시기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방법 있지 않겠습니까?
손님을 자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빛의 자녀가 되는 쉬운 길들입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의 아름다운 이야기만으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말씀 19-2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가정을 넘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서로 서로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진정한 빛의 자녀가 되어 갑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 해야 할 명령입니다. 공동체에 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 감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런데 첫 절에 보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꼭 시인들만 공동체에 속할 수 있나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제가 단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시입니다. 곧 공동체 안에 속한 자들은 모두 시인이요 예술가인 것입니다. 시인이요 예술가가 되지 않고 어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병화 시인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요 예술가가 됨을 당신의 시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너의 사랑은’

“하늘에서 밤마다..
무수히 반짝이고 있는 별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나무 줄기에서
무수히 피어나 있는꽃송이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바람 부는 넓은 들판에서
무수히 생글생글 고개 흔들며 피어 있는
작은 들꽃들이..
제각기 제자리 자리에서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이 세상 만물들이 태어나서 부터
제각기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아, 그렇게
너의 사랑은 이 어두운 우주에서
너만이 간직하고 있는..
절대적인 빛이 아닌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이 어두운 우주를 밝히는 절대적인 빛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자주 자주 서로를 위해 좋은 말 감사의 말을 나누십시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나누십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빛을 발하는 자가 됩니다. 지난번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좋은 말 감사의 말을 나눈지가 언제이십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누리는 여러가지 특권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새 교우반을 인도하는 시간입니다. 특히 새 교우반 첫 시간에는 교우님들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물론 저도 저의 이야기를 드립니다. 모두가 살아오신 여정은 다를지라도 같은 점이 있습니다. 모두 감사의 말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저는 이 새 교우반 시간이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저는 매번 똑 같은 이야기를 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녹음기를 가져다 놓고 틀어 놓아도 될만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도 그럴수 밖에 56년간 한 인생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매번 똑 같은 이야기이지만 매번 저의 이야기를 드리고 나면 생기가 솟아남을 느낍니다. 시작할 때는 똑 같은 이야기인데 하지만 마치고 나면 새로운 이야기를 한 기분마저 듭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새로운 축복이 임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면 이런 특권을 어디에서 누리겠습니까? 사랑의 공동체에서 감사의 말을 나눌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빛이 임하지 않을까요?

교우여러분, 새로 지은 저희 교회 건물을 보며 이웃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혹시 세인펠드(Seinfeld)와 비슷한 생각을 하진 않을까요?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니깐.”
그러나 이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좋은 말 감사의 말을 많이 한다면 우리에겐 빛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도리어 이웃이 우리 들을 통해 주님의 빛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을 얽매고 있었던 어둠의 세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빛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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