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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날짜 : 2009.09.2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장 11-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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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숫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5, 다른 하나는 4.5. 5가 조금 힘이 세다고 늘 4.5를 괴롭혔습니다. 잔심부름을 늘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입니다. 이날 따라 4.5가 튕기면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하라는대로 하지 않습니다. 5가 말합니다.
“너 오늘 왜 이러니, 내 말 왜 안듣니. 한번 혼날래.” 4.5가 말합니다.
“나, 점 빠졌다.” 4.5가 45가 된 것입니다.

약자의 아픔을 안고 사시는 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이야기일줄 압니다. 언젠가 점 빠지는 날이 올 것이고 그 날을 학수고대하며 하루 하루를 참고 인내하게 하는 위로의 멧세지가 담긴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점 빠지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는 삶, 이것이 크리스챤의 삶일까요? 참된 크리스챤의 삶은 어떤 삶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마태복음의 달란트의 비유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누가복음 기자는 ‘달란트’가 아니라 ‘므나’를 사용합니다. 한 달란트가 30므나에 해당합니다. 하여튼 첫절에 보면 왜 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이 비유를 말씀하신 때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때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입니다. 사람들도 이를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 곧 점이 떨어지는 시간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의 시종 노릇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자기들의 점이 빠져서 이제는 로마인들을 시종으로 삼을 때가 가까이 온 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꿈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한 비유를 설파하십니다. 시간 관계상 제가 풀어서 말씀드립니다.

어떤 귀족이 있었는데 이제 왕으로 등극할 때가 되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왕으로 임명을 받기 위하여 떠나면서 종 열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열명에게 한 므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세 명에게 다섯, 둘, 한 달란트를 주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비유에서는 열 명에게 한 므나씩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므나는 200일치의 임금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요즘 200일치의 임금이라고 하면 한 5만불이라고 생각해 볼까요? 열 사람이 5만불씩 받았습니다.
주인은 왕위를 받고 돌아 왔습니다. 첫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 그런데 므나의 비유에서는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이 두 종에게 주인이 각각 말합니다. 첫째 종에게는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둘째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한편 세 번째 종이 나와서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지금쯤은 쥐구멍이 어디 있나 찾을텐데 이 사람은 정 반대입니다.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제일 지혜롭게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당당했을까요? 이 사람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나의 노력을 의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위대함을 잘 압니다. 당신은 점을 빼실수 있는 분이니 나는 그냥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당신은 점을 빼실수 있는 분이니 이 한 므나로 열므나가 아니라 100므나도 만들수 있는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믿음이 좋습니다. 1.00에서 점을 빼면 100이 되지 않습니까? 자,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소서. 여기 당신의 것이 있나이다. 이것을 가지고 놀랍게 불리소서. 100개 1000개 10,000개를 만드소서.”
이에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야, 정말 너의 믿음이 대단하구나. 너만이 나의 능력을 인정하는구나. 너만이 내가 점을 빼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구나. 나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이를 들은 사람들은 놀란 것 같습니다. 주인은 자비하신 분이시고 늘 공평하시고 약한 자 편에 서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부자를 더 부자되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놀란 이들은 말합니다.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어떻게 보면 강자 편에 서 있는 주인의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주인의 진짜 모습은 강자를 좋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인은 없는 자에게 점을 빼서 더 크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에게 더 곱으로 더 주시는 분입니다.
기왕 숫자로 설명하기 시작하였으니 계속 산수로 이 주인의 모습을 표현해 보겠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고 계시다고 볼수 있입니다.
“너희가 나를 점을 옮기는 자로 알았느냐? 나는 점을 옮기는 자가 아니다. 나는 있는 숫자에 자승시키는 자이다.”
10의 자승은 얼마입니까? 100입니다. 5의 자승은 얼마입니까? 25입니다. 1의 자승은 얼마입니까? 1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어떤 종은 하나를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에 자승을 하니 그대로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종은 5을 만들었습니다. 자승을 하니 25가 됩니다. 어떤 종은 10을 만들었습니다. 자승을 하니 100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승을 좋아하는 자이니 당연히 큰 숫자를 좋아합니다. 말씀드린대로 하나를 자승하니 하나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를 누구에게 주면 더 큰 숫자로 불어납니까? 다섯을 가진 자입니까? 10을 가진 자입니까? 물론 다섯을 가진 자에게 줄수도 있지만, 다섯을 가진 자에게 주면 6이 됩니다. 6을 자승하면 36입니다. 5의 자승 25보다 11이 더 는 것입니다. 반면 10을 가진 자에게 하나를 주면 11 아닙니까? 11를 자승하면 121입니다. 10의 자승 100보다 21이 는 것입니다. 곧 다섯을 가진 자보다 10을 가진 자에게 주니 10이 더 생긴 것입니다. 주인은 있는 것에 자승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를 가지고 더 크게 하기 위하여 열을 소유한 자에게 주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다섯을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할텐데.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니 10므나가 열 도시가 됩니다. 이것은 무지막지한 자승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말할수 없는 상상할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그저 자승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자승의 하나님이십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손에 주어진 한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해야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분들은 불평하실지 모릅니다. “나는 처음부터 적게 받았습니다. 적게 받은 것을 아무리 불릴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서 주님은 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므나의 비유가 주는 또 다른 특유한 멧세지가 있습니다. 열명의 종들이 모두 한 므나씩 받았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한 사람은 다섯 또 한 사람은 둘 또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므나의 비유에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한 므나씩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반면 달란트 비유가 기록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므나의 비유는 이방인에게 쓰여졌다는 생각을 갖고 읽고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자기들은 택함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니 자기들에게는 축복이 덜 주어졌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덜 축복받았으니 하나님의 섬기는 것도 대충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다 한 므나씩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덜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에게 똑 같이 주어졌다. 한 므나씩. 피어리어드.”
하나님은 점을 옮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점을 찍으시는 분이십니다. 피어리어드. 영어에서 말을 강조할 때 마지막에 “피어리어드”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 피어리어드.” 하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은 점을 찍고 계십니다. “너희 모두에게 똑 같이 주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너희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잘 사용하여서 나의 무지막지한 자승의 힘을 끌여 들여라. 피어리어드.”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똑 같이 한 므나씩 주어졌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불공평하게 주어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공평하게 똑 같이 주셨습니다. 한 므나씩.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잘 사용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자승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자승의 힘을 체험한 분의 이야기를 접해 보았습니다. 지난 5월 어머니 주일에 장영희 교수님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었습니다. 그 후 며칠후에 장 교수님이 오랜 투병 끝에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장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가 되어서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 살았지만 후에 미국 유학도 마치고 대학교수가 될뿐 아니라 월간지 샘터에 귀한 글을 연재함으로 많은 분들에게 삶의 기쁨과 축복을 나누셨던 분입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면 정말로 인생은 자승의 축복의 삶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그가 그처럼 자승의 축복의 삶을 살게된 동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방과후가 되면 친구들이 집 앞 골목에서 놀곤하였는데 장영희 어린이는 소아마비라 같이 뛰어 놀 수가 없었습니다. 영희 어린이는 책을 좋아하였지만 어머니가 친구들과 사귀게 되길 바래서 집앞 계단에 방석을 깔아 줘서 거기 앉아서 친구들 노는 것을 보곤 하였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영희 어린이에게 심판을 보게 한다든가 하면서 어떻게든 끼워 주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학교가 일찍 끝나서 혼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깨엿 장수가 골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가위를 쩔렁이며 대문 앞에 앉아 있는 영희 어린이를 흘끗 보고는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그 때 영희 어린이는 목발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리어카를 두고 다시 돌아와 어린이에게 깨엿 두 개를 내밀었습니다. 순간 아저씨와 어린이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저씨가 말합니다.
“괜찮아.”
계속 장교수는 다음과 같이 글을 씁니다.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은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깨엿을 받으며 (저자 편집) 들은 말-‘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아 그래서 ‘괜찮아’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이처럼 두개의 깨엿과 함께 들은 말은 장영희 어린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산 희망을 주는 장영희 교수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장영희 어린이가 깨엿장수에게 깨엿 두개를 받을 때는 1960년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는 한국이 아주 가난할 때입니다. 국민 소득이 100달라가 미쳐 안 되었을 때일줄 압니다. 그러니 이 당시 깨엿 장수 아저씨에게는 엿 두개가 무척 소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깨엿 두개가 ‘괜찮아’의 말과 함께 장영희 어린이의 손에 주어졌을 때 그 깨엿은 놀라운 자승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소아마비 어린이를 희망 속에 살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모습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승의 축복의 삶이 어떤지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주어진 두개의 깨엿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두 개의 깨엿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승의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모두 다 두 개의 깨엿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한 므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웃을 향하여 ‘괜찮아’ 말할수 있는 호흡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한 므나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한 므나의 내용은 다르지만 한 므나는 한 므나입니다. 이 한 므나를 열 므나가 되게 할지 다섯 므나가 되게 할지 아니면 그대로 한므나로 남게 할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점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승의 축복을 주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므나에 점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한 므나를 사용한만큼 그것에 자승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 한 므나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늘 안수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임직 받으시는 분들은 주어진 한 므나를 잘 사용하시는 분들로 인정받아 오늘 이 자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주어진 한 므나를 잘 사용하신 것처럼 계속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섯 므나로 만드시고 열 므나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주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될 줄 압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성탄절, 우체국에서 할머니 한 분이 긴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직원이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 장 살 거예요.”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 넣으시면 나오는데요.”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 기계는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고,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고,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

깨엿 두개가 없을지라도 ‘괜찮아요’라는 말만 있어도 놀라운 자승의 힘이 발휘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깨엿 두 개까지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괜찮아요”의 대화를 나누십시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깨엿 두개를 나누십시다. 깨엿 두 개가 상상할 수 없는 새힘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의 한 므나를 나누십시다. 자승의 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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