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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친구

날짜 : 2009.08.23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네 친구
성경본문 : 마가복음 2장 1-1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823.wmv

박목월 시인의 ‘오른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는 다시 어부로 변신했는데, 베드로가 고기가 잡히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은 것 같습니다.

궁핍하고 어려울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말씀의 방향을.
괴롭고 답답할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믿음의 방향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오른편이 있다.
신앙의 그물만 던지면
미어지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설사 그것이
비린내가 풍기는
현실의 고기가 아닐지라도
굶주린 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비늘이 싱싱하게 빛나는
말씀의 생선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믿음과 신뢰의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말씀 안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위로와 축복으로 가득한
때로는 베드로처럼
펄펄 살아 있는 고기를
그물이 미어지게
건져올릴 수 있다.

박목월 시인은 오른편의 축복을 누리며 사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오른편을 찾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문제가 아니라 최고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오른편을 늘 살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삶에서 오른편은 무엇일까요? 박목월 시인은 말씀과 믿음과 신뢰를 통해 오른편을 만난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들의 오른편 우리를 최고의 삶으로 인도하는 오른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함께 말씀을 상고하며 그곳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어느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문이 나니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문밖에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찼고 주님은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여기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데려 왔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메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제가 먼저 고백합니다. 이번 말씀 준비하기 전까지는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려 왔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상은 사람들의 의지였고 네 사람은 힘을 쓴 것임을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 네 사람도 사람들 중에 포함될 줄 압니다. 하여튼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4절 말씀입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이 당시 집은 모양이 지금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붕을 뜯을 수가 있었고 사람들은 환자를 지붕에서 아래로 내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집주인인 베드로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리 지르기 일초 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집이 부서지는데 좋아할 리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최고의 축복인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축복이 줄을 이어 쫓아 올 것이 자명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큰 일이 쉽게 진행될 리는 없습니다. 시간상 간단히 요약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서기관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불평하는 서기관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선포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자를 고치심을 통하여 당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곧 중풍병자는 두 가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죄사함을 받았고 두 번째로는 육신적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영육간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로 최고의 날이 된 것입니다. 오른편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의 시작인 오른편이 어디였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하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의 오른편은 자명해졌습니다. 저희의 믿음, 곧 ‘저희’였습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고 또 그에게 나음을 허락하실 수 있었던 축복의 근거는 ‘저희’였습니다. 작게는 이를 메고 온 네 사람이었습니다. 크게는 네 사람에게 메고 가게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편의상 네 사람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네 사람으로 인해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지고 아울러 중풍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네 사람이 바로 중풍병자의 오른편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건하시기 원하십니까? 오른편을 찾아 가십시요. 그 오른편은 정말 우리의 오른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네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한번 오늘 본문 말씀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늘 아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와 계시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다’ 생각하고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들것을 메려면 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중풍병자와 오랫동안 같이 동고동락을 하였던 네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물론 들것을 든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인 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함께 삶을 나누었던 친구를 위해 기꺼이 들것을 메기로 결심합니다. 이들 다섯 명은 언제나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면서 늘 하나 된 삶을 누렸던 친구들입니다.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늘 느껴 왔었던 차에 예수님을 향하여 들것을 메고 기쁨의 행진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기쁨으로 들것을 메고 가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어려울 적에 이 중풍병자 친구는 늘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외로운 때에 늘 함께 있어 주곤 하였습니다. 이제 이 친구를 위하여 갚을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무거운줄도 모르고 힘차게 달려갑니다. 힘차게 달려 왔는데 문 앞에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 차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지붕을 뚫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분명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들이 그 지붕을 메우고 집주인에게 손해배상도 철저히 해줄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네 친구들을 중풍병자의 축복의 오른편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감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최고의 축복을 네 친구로 인하여 쏟아 내고야 만 것입니다.

엘리샤(Elisha)라는 어느 미국분이 그리스로 휴가를 갔습니다. 한 낚시꾼이 혼자서 열심히 낚시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낚시를 마치고 해변으로 돌아오면 친구들이 줄을 서서 낚시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합니다. 낚시꾼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듬뿍 듬뿍 나누어 줍니다. 매일 연속 이어졌습니다.
엘리샤는 호기심이 나서 낚시꾼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 많은 물고기를 그냥 줍니까?” 낚시꾼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지나치려 합니다. 미국 분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 줍니다.
“당신이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 가서 팔면 새 보트를 사게 됩니다. 결국 돈을 더 많이 벌게 되고, 누군가를 고용할 수 있게 되죠. 그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겠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죠.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물고기를 그냥 나누어 줍니까?”
이 말을 듣자 낚시꾼은 미소가 사라집니다.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바보같은 미국인 같으니(Stupid American!) 당신 말대로 모든 일이 다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나의 저녁상에 물고기보다 더 좋은 반찬이 나오겠소? 분명한 것은 당신 계획대로 하면 나는 삶의 웃음을 잃을 것이요. 함께 물고기를 먹을 친구도 잃을 것이고…. 나의 삶에서 친구가 없어질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엘리샤는 미국으로 돌아 와서 이제는 돈보다는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진정한 삶의 오른편이 무엇인지 찾게 된 것입니다. 엘리샤가 큰 감동을 받았는데 자기의 친구를 위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도 감동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네 친구를 통하여 감동받으셨습니다. 영적 육적 축복을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네 친구로 인해서 그 놀라운 축복을 쏟아내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 저는 오랫동안 이 궁금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15년 전에 본 교회에 처음 와서 수양회를 인도하였는데 첫 본문 말씀이 바로 오늘 이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제목은 ‘능력의 공동체’였습니다. 네 친구가 힘을 합하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에야 왜 예수님이 이 네 친구로 인해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로렌 위너(Lauren Winner)라는 신학자가 당신의 책 ‘머드하우스 사바스(Mudhouse Sabbath)’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바로 이웃 대접(Hospitality)의 결정체다.” 하나님은 인간을 최고로 대접하기 위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또 창조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환대(hospitality)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hospitality의 궁극적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을 통하여 세상 창조로부터 시작한 hospitality를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hospitality가 있는 곳을 보면 당신의 최고의 hospitality를 쏟아 부으실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네 친구를 통해서 멋진 hospitality를 보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최고의 hospitality의 선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영적 육적 최고의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초대교회 교인들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6세기 경까지만 해도 hospitality가 다른 어떠한 기독교적인 행위보다도 앞서 갔다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식 기도를 하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여야 하면 금식을 접어두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기도와 금식보다도 hospitality가 더 중요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요즘 hospitality가 사라져 가고 있는 여러 현상을 볼 수가 있지만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미국 가정집의 구조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관심이 많은 분들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정집을 보면 현관에 포치(porch)가 있어서 의자를 갖다가 놓고 앉아 있곤 하였다고 합니다. 요즘 그런 집은 눈비비고 찾기가 어려운 정도입니다만, 사실 영화를 보면 종종 나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현관문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습니다. 반면 요즘 집들은 어떻게 되어 있죠. 덱(Deck)이 다 집 뒤에 가 있습니다. 집 앞에 포치는 없어지고 다 집 뒤에 deck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집 앞 포치에 앉아 있으면 산책하던 이웃집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들리고 하면서 서로서로 삶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개인주의(privacy)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덱(deck)를 마련하여 놓고는 특별한 사람만 부릅니다. 그나마 특별한 사람도 가물에 콩 나듯이 부르고 대개는 혼자서 쓸쓸이 강아지와 시간을 보냅니다. 미국의 가정집 모양이 hospitality가 사라진 현대인들의 모습, 삶의 오른편이 사라진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Hospitality가 사라진 결과 곧 삶의 오른편이 사라진 결과 영적 육적 고갈 상태로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부터 집에 가셔서 집 뒤의 덱(deck)을 부수고 앞에 포치(porch)를 새로 만들어야 하나요? 쉬운 일은 아닐 줄 압니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삶의 포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삶의 포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곧 잃었던 네 친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엘리샤는 그리스의 어부로 인해서 삶의 포치를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에 소개해드린 머드하우스 사바스(Mudhouse Sabbath)의 저자 로렌 위너씨는 대학 교수님이신데 혼자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책상과 책들로 인해서 손님을 청할만한 공간이 없는 아파트였습니다. 좁은 공간과 청소되지 않은 집을 친구들에게 오픈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삶의 오른편을 잃어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계약이 끝날 때가 다가오자 다음 아파트는 책상이 차지하는 공간을 아주 줄이고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을 더 넓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hospitality를 통해서만이 새로운 창조가 임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네 친구를 위한 삶의 공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삶의 포치(porch)를 마련한 것입니다.

약 한달 전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는 보스톤으로 찾아오시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계속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반면 오늘의 주제는 삶의 오른편이 되는 공동체를 이루자는 주제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육적 삶의 축복의 근원인 공동체를 이루기 전에는 손 대접할 능력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주제가 더 선행되어야 하는 주제일줄 압니다. 우리 모두는 네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 간 앞으로 ECC공사가 끝나면 진행될 교회 행사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10:50에 시작하는 성인성경공부에 대해 강조해 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에게 성인 성경 공부를 종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삶의 포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의 hospitality를 기다리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 말씀 안에서 삶을 나눌 때 어느덧 삶의 오른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도자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인도자나 참가자나 똑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네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삶의 포치를 함께 세워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육간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셨습니다. 그곳에서 밤새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오른편은 어디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일주일의 삶의 이야기가 함께 나누어지는 곳이 아닐까요? 주님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함께 울고 웃게 되지 않을까요? 사랑의 선물을 나눌 때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그 때 우리는 삶의 오른편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영육간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의 오른편에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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