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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날짜 : 2009.08.09
예배명 : 주일예배(광복절 기념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성경본문 : 베드로후서 3장 8-13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809.wmv

오제은 교수라는 상담심리학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 사랑 노트’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하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저명한 학자들이 다 참석하는 학회였다고 합니다. 어느 점심시간에 한 학자와 식탁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오 교수님이 먼저 말을 겁니다.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
“한국도 가고, 미국도 갑니다.”
이제는 상대방이 말합니다.
“아까 보니 참 바쁘시데요.”
그 말을 듣고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하 보셨습니까? 제가 아까 인사드린 그분이 굉장히 유명한 분인데요, 재작년에 보스턴에서….”
열띤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그분은 천천히 음식을 들고 있습니다. 오 교수는 무안해져서 주위를 살펴보며 유명 인사들을 바로보기 시작합니다. 그 때 그분 목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유명 인사들에게 찾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뚱딴지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에?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은 자신이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요? 몇 푼이나 되겠냐구요?”
기분이 팍 상했습니다.
“질문이 좀…”
“왜요, 기분이 나빠요?”
“예 질문이 좀 그러네요.”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그분은 다시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 교수님은 좀 예민했나 생각도 들고 해서 다시 말을 붙입니다.
“지금 저보고 값이 얼마나 되겠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잠시 여기서 여러분께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오 교수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이 온 우주보다 소중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귀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요? 그게 기독교에서 하는 얘깁니까? 아니면 선생님 이야긴가요?”
이 말에 오 교수는 자못 긴장합니다.
“예, 뭐… 제 체험이기도 하고요. 제 믿음이 그렇습니다.”
“아, 사실은 안 그런가 보지요?”
“사실이죠, 뭐.”
“왜 확신이 없습니까? 온 우주보다 더 귀중하다… 예, 참 좋은 표현이네요. 대단합니다. 굉장히 좋아요.”
그분은 혼자서 무엇이 그리 감탄스러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감탄을 받자 오 교수는 어쩐지 으쓱한 기분이 들어서 미소가 절로 나오고 있는데, 그분이 입을 엽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반 푼어치도 안 되게 굴어요?”
오 교수님은 젓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려놓으며 흥분이 되어 말합니다.
“지금 저보고 반 푼어치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지 않나요?”
(중략)
“화났습니까?”
“예, 좀 화가 나네요.”
“왜 화가 납니까? 아닌 게 아닌가 보죠?”
순간 오 교수의 지도교수님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오 교수에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던 그분과 반가운 인사를 하시더니,
“오 교수, 내가 예전에 자네한테 꼭 소개해 주고 싶다던 그분이시네. 인사하게.”
“ 아, 이분이 그분이십니까?”
지도 교수님이 사라진 후, “실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오 교수님은 고백합니다.
“그날 나는 스스로를 향해 깊이 사과를 했다. ‘너를 천하보다도 귀하게 대하지 못해 미안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과연 나는 천하보다 귀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들 각자의 양심이 대답할 줄 압니다. 두 번째 질문은 ‘과연 상대방 교수는 어떠한 인상을 오 교수에게 받았기에 반 푼어치도 안되게 군다고 말했을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니 계속 만나게 될지 모르는 학자들 사이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줄 압니다. 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상대방은 오교수로부터 천하보다 귀한 자라는 대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 교수님은 자신은 천하보다 귀한 자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에게는 그런 눈빛으로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결론만이 아닙니다. 오 교수는 은연중에 자신은 허둥지둥 유명인들만 쫓아다니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웃을 천하보다 귀한 자라고 보는 눈길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8/15광복절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진정한 광복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해방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줄 알고 남이 누구인줄 알게 되는 것일 줄 압니다. 곧 자신이 천하보다 귀한 자요, 아울러 이웃이 천하보다 귀한 자임을 알게 될 때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질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억압했던 사람들까지도 천하보다 귀한 자임을 보게 될 때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질 줄 압니다. 그러면 이웃을 천하보다 귀한 자로 여기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지 남은 시간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베드로가 초대교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첫 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교우 여러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면 우리는 그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하루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살라는 뜻일까요? 사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초대교우들은 두 가지 큰 고난을 늘 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밖에서 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있는 베드로 후서에는 안에서부터 오는 고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곧 이들은 안팎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안에서 오는 고난이 어떤 고난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두 다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은 늦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내적으로 이상한 교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거짓이라는 교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안 오고 계시니까….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풀어서 표현하면, “왜 주님께서 아직 안 오시는줄 아느냐? 너희가 모두 천하보다 귀하기에 너희가 멸망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서 회개하거라.”
지금 베드로는 은연중에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 안에서 늘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곧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너희가 천하보다 귀하다. 너희를 잃지 않으시려고 주님께서는 더디 오시는 것이다’ 말씀합니다.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자들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는, ‘저들이 잘못된 교리를 전하지만 저들도 천하보다 귀한 자들이다. 저들을 그러한 눈길로 보며 참고 기다려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10절 말씀을 보면 왜 주님께서 아직까지 안 오시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천하보다 귀한 자들도 싹쓸이 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뜨거운 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날이 얼마나 무서우면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 2000년을 기다리셨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구하시려고 하루 하루 연장하시다 보니 벌써 천년이 두 번씩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틀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으니…. 하나님께서는 사흘 나흘을 또 기다리실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사람들을 영원한 불 가운데 빠뜨리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앞으로 며칠을 더 기다리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삶은 어떤 삶일까요? 자기 자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삶일 줄 압니다. 아울러 이웃을 천하보다 귀한 눈길로 보고 대하는 삶일 줄 압니다. 그런데 천하보다 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 세상보다 귀함을 알기에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지 않습니다. 이 땅보다 훨씬 큰 곳에 둡니다. 그 곳이 어디라구요? 12‐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자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할뿐더러 이웃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는 자들은 언제나 더 놀라운 세상을 만나면서 삽니다. 이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바라보며 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그 곳만이 천하보다 귀한 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가 갈 곳은 그곳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기에는 좁을뿐더러 너무 누추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고통 중에 있는 그래서 참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천하보다 귀한 자임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천하보다 귀한 자임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 버려져 있는 자들을 찾아 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 한 민족도 한 때 역사에서 버려진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천하보다 귀한 민족임을 일깨워주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누추하고 누추한 곳에 와서 우리를 향하여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포해 주셨던 선교사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줄 압니다. 이들로 인해서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수고로 인해 우리 나라는 오늘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의 업적 물론 크지마는 그들 못지않게 크게 공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입니다. 타골이 1929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한국(조선)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을 때입니다. 동아일보기자가 조선을 방문할 것을 요청하자 응하지 못하고 대신 미안한 마음으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적어서 기고하였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이 시가 억압받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 시를 읽고 희망을 갖지 않게 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어릴 적에 이 시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 저는 이 시를 통해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분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안양대학교 설립자이신 김영실 총장님이십니다. 배재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신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교장선생님이 귀가하시길 기다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서성거리면서 김영실 청년은 혼자서 타골의 시를 외우고 또 외웠다고 합니다. 그 시가 마음의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학비도 보조받게 되었구요.
그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축산업에 손을 대게 되었는데 하루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으로 뉴질랜드에 방문하여 젖소를 수입하는 일을 부탁받았는데, 뉴질랜드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뉴질랜드 대통령에게 그가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였습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그는 영어로도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뉴질랜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뉴질랜드 대통령이 환영사에서 무엇을 인용하였겠습니까? ‘동방의 등불’을 인용하였다 합니다.
타골은 하찮은 나라 조선을 향하여 멋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로 인하여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타골은 어두움에 버려져 있는 민족을 향하여 천하보다 귀한 민족이라는 노래를 불러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에게 최고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 이것이 참 자유인의 삶입니다. 타골의 노래보다 더 크고 위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참으로 해방된 삶입니다. 어둠에 있는 자들이 이러한 노래를 들을 때 참 자신을 회복하게 됩니다.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노래는 핍박받는 자들에게만 불러서도 안 됩니다.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같은 노래가 불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Voices of Martyrs(순교자들의 목소리)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핍박받고 있는 크리스챤들을 돕기 위한 기관입니다. 이 기관에서 보고하기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크리스챤들을 핍박하는 나라가 52개국이라고 합니다. 현재 전세계 나라수가 194개인데, 약 ¼의 나라들이 크리스챤들을 핍박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나온 뉴스를 보면 가장 많은 박해를 하는 나라들이 중국,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등인 것 같습니다. 그 중 북한의 소식도 그 기관에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관이 북한에 팩스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팩스로 답장이 오길,
“우리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시 이런 불결한 팩스편지 보내면 당신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있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처신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래도 점잖은 이야기이고 가장 최근에 파키스탄에서 있었던 일은 극렬 회교도분자들이 지난 7월30일에 크리스챤 가정 50가정 집에 불을 지르고 가축들을 다 죽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세계각지에서 특히 52개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나라를 위해서도 노래를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그들도 천하보다 귀한 인간임을 일깨워주는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언젠가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이들을 위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골의 시를 파키스탄을 위해서 바치는 시로 바꾸어서 읽어 볼까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파키스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아시아의 밝은 빛이 되리라.”
파키스탄 말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가장 악한 나라가 있습니까? 그 나라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보다 더 멋진 노래를 불러 보십시다.
교우 여러분,
천하보다 귀한 우리를 위해 예비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나라들에게 최고의 노래를 불러드립시다. 특별히 이웃을 해치는 자들을 위해 부르십시다. 우리는 노래하는 자유인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아득한 옛날, 어느 큰 산에 온갖 동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산돼지, 호랑이, 여우, 노루, 사슴, 다람쥐 등 여러 종류의 짐승들과 산비둘기, 꿩을 비롯한 산새들도 함께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큰 산에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도망을 쳐서 먼 곳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동물들 중 단 한 마리의 꿩은 멀리 떨어진 강물로 부지런히 날아가 자신의 깃털과 몸에 물을 흠뻑 적셔다가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곳으로 날아와서 자신의 깃털과 몸에 묻은 물을 털어 그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였으나,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점점 더 넓게 번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꿩은 기진맥진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강물로 날아가서 물을 축여다 털곤 했습니다.
그때 마침 옆을 지나치던 산신이 이를 보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어리석은 놈아! 네가 그렇게 한다고 그 큰 불이 꺼지겠니?” 그러자 꿩이 대답합니다. “여보시오. 내가 나서 자라고 살아가야 할 이 산에 불이 났는데 불이 꺼지고 안 꺼지고는 고사하고 불을 끄려고 애는 써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내 의무니까요.” 이에 산신은 무안함을 느끼고 즉시 비구름을 불러와 폭우를 쏟아지게 하자, 마침내 산불이 꺼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낳고 자란 이 아름다운 지구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과 핍박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작은 노래로는 비길수가 없는 어두움의 세계가 우리의 사랑하는 지구를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의무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에게, 핍박받는 자들에게 , 핍박하는 자들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산신도 꿩의 노력을 귀하게 여기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이름으로 부르는 우리의 노래를 얼마나 귀하게 받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누추합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기에는 너무도 알맞는 곳입니다.
교우 여러분, 노래 부르다가 지치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시다.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는 자유인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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