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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날짜 : 2009.08.02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성경본문 : 로마서 12:1-13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802.wmv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입니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식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은 평생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지내신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사람’을 가지셨습니까?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니 바로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의 대표적인 서신서인 로마서입니다. 사도바울 서신의 특징은 전반부는 교리적인 내용이고 후반부는 윤리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전반부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게 이루워진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는 ‘그러니 구원받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번째 부분인 윤리적인 내용이 막 시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12장 1절이 바로 윤리적인 부분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전 삶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른 크리스챤의 삶이요 이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말씀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크리스챤들의 진정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후 마지막 16장까지 진정한 삶의 참 모습을 하나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오늘 본문 말씀은 진정한 크리스챤의 삶에 대해 사도바울이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는 말씀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3-8절까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은혜가 다 다르니 주신 은혜대로 열심히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독특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6, 7절만 봉독해 드리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이처럼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각자는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말없이 남 상관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열심히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반면 9절부터는 받은 은사는 다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공통적인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한번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한편 우리가 이 말씀 중에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생각하시면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힘쓰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떤 말씀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 중 가장 힘쓰고 있지 않은 것이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좀 질문을 달리해서 힘써서 해야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지내는 것이 어느 것입니까? 공교롭게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힘써서 해야 하는 것 두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12절 마지막에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절 마지막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더 힘쓰셨습니까? 우리는 사실 그 동안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씀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지 못할 때는 늘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반면 사도바울은 지금 또 무엇을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힘써 손님 대접 안 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갖고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말씀대로 사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하며 함석헌 선생은 바로 당신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를 지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왜 ‘그 사람’이 되지 못하였을까요? 우리 주변에 ‘그 사람’을 찾기가 왜 그리 힘든가요? 기도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손 대접하는 것을 힘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대로 지키고 안 지키고 하기 때문일 줄 압니다.

그러면 손 대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손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초대받은 손님과 초대받지 않은 손님. 초대받은 손님은 가정이 오래 전에 약속을 한 손님들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잘 준비해 놓고 집안도 깨끗이 정리한 후 초대한 손님을 말합니다. 반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갑자기 나타난 손님입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나타나겠습니까? 대개의 경우는 어려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이 둘 중 어느 것을 언급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초대받은 손님이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손님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손님은 어떻게 보면 갑자기 나타난 나그네이던가 아니면 늘 옆에 알고 지냈지만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긴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줄 압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을 이행하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갑자기 나타난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곧 어려움에 처한 나그네입니다. 두 번째는 잘 알고 있는 이웃 중에서 어려운 일이 생긴 사람들을 잘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경우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일을 힘쓰는 것이 기도에 힘쓰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 중에 좀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은 첫 번째 경우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잘 아는 사람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당연히 도와드려야 합니다. 그 분을 잘 알기 때문에 도움을 드린 것이 확실하게 사용될 것을 아니 문제는 없습니다. 더 애매한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나는 것일 줄 압니다.

교회에 있으면 종종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분들이 오거나 전화를 겁니다. 얼마 전에 사무실에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고 교회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였습니다. 질문을 해 오기를 “그 교회에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기금이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또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20쯤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하며 끊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20을 받으러 교회까지 걸어오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마 $100쯤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이행하기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사실 사도바울 시절은 전화도 없었습니다. 이메일은 물론 이고, 편지 쓰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 시대에는 손 대접하기가 훨씬 쉬었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은 제 발로 찾아 왔으니깐. 요즘은 손 대접하기를 힘쓰다가는 세간 살이 금방 날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수많은 도움을 청하는 손길이 전화와 편지와 이메일로 날라 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느덧 중요한 두 가지 힘써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는 이미 성경에서 지워 버린 것 같습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세상 환경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경우 핑계이겠지만…. 그리고는 기도에만 힘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사람’이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 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사회에는 ‘그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우리 자신들도 ‘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한국에 손미나라는 아나운서가 있습니다. 얼마 전 이분이 아나운서직을 잠시 휴직하고 스페인 여행을 떠난 후 여행기를 책으로 펼쳐냈습니다. 9년 전에 스페인에서 공부를 하였었는데 그 시절 추억을 되살리며 한편으로는 바쁜 일정에서 해방되어 참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떠났다고 합니다.
생각한대로 스페인의 생활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향수병과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마음 속에 스페인이란 나라에 대한 증오심과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파리 근교에 머물고 있던 한 후배가 생각이 나서 잠시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가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도 모르고 곯아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느 흑인 신사의 목소리였습니다.
“아가씨 왠지 많이 아파 보이고 슬퍼 보이네. 아가씨처럼 젊은 사람이 그렇게 몸도 마음도 지쳐 보이는 데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될까?”
넋두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던 그 흑인 신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숙소를 이미 정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묵는 호텔에 방 하나 잡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극구 사양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던 차라 손 아나운서는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벨보이의 안내를 받아 정말 얼떨결에 그가 잡아준 방에 들어가 침대위에 털석 주저 앉은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잠깐,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아저씨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호의를 베풀리는 없잖아? 내가 미쳤지, 완전 미쳤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노크를 합니다. 그 사람이 온 것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아뿔싸, 한 발 늦었구나. 어쩔 수 없지’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아름다운 흑인 여인이 함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 흑인 신사의 아내였습니다. 저녁에는 그들이 초대한 파티에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방에 있는 전화가 울립니다. “프론트 데스크입니다. 미스터 디엥께서 손님을 위해 특별히 택시 한 대를 대절해 두셨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내려오시면 파리 시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모셔다드릴 겁니다.” 그 날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밤이면 부부의 저녁 모임에 따라가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 왔습니다. 그렇게 지내기를 3일, 더 이상은 신세를 질 수 없어 후배의 집에 머무르기 위해 파리를 떠나기로 한 날, 흑인 신사는 손 아나운서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었고 헤어져야 하는 순간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3일 내내 곰곰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아저씨가 부자인 것도 알겠고 좋은 분인 것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큰 호의를 베푼다는 건 언뜻 이해가 잘 안 되거든요. 이런 질문을 하면 제가 고마움도 모르는 무례한 아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신 건가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음…, 난 말이지,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란다.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 그런데 난 사실 세네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무척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내게 공부를 한다는 건 매우 사치스런 일이었지만 난 꽤 총명하고 꿈도 많은 아이였지.
어려운 환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칠 때마다 내게는 참 힘겨운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고 용기를 주곤 했단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나도 언젠가 성공을 하면 젊은 시절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리고 며칠 전 비행기 안에서 난 너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지.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젊은이가 좌절하고 절망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마음속에 꿈을 간직한 젊은 사람은 아무런 조건 없는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거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희망이 없는 얼굴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란다. 무엇이 너를 그리 괴롭고 힘들게 했는지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언젠가 꼭 신세를 갚고 싶다고 말하는 손 아나운서에게 그는 자기한테 무언가를 돌려줄 생각 말고 손 아나운서가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또 다른 젊은 누군가가 꿈을 향해 가는 길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손 아나운서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희망과 행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서서히 스페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그 사람’이 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들을 힘써 대접하여야 합니다. 흑인 신사는 꿈을 잃고 좌절한 젊은이들이 그의 손님이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바로 ‘ 그 사람’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이런 손님을 만나면 그는 힘써 대접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누구나 다 홈리스(homeless)를 찾아 갈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전화 오는데로 찾아 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기에게 맞는 나그네가 나타났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접하여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없을 때 돈이 없을 때 나타나는 분이 바로 천사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말했습니다. 힙13:2절 말씀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교우 여러분, 우리는 힘써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 만큼 또한 손님 대접을 하여야 합니다. 손님 대접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손님 대접을 통해서 우리들의 기도의 많은 부분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이 필요한 ‘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도 일생동안 손 대접하신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 모두를 대접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병든 자들은 치유시켜 주셨고 마음의 병든 자들을 말씀으로 치유시켜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온 인류를 당신의 손님으로 맞이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마지막 마가의 다락방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빵과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힘껏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힘 써 기도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귀한 나그네요, 손님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처럼 이 땅위에서 한편으로는 힘써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힘써서 손 대접하셨습니다. 곧 주님은 우리를 위한 바로 ‘그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주님을 본받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 차이는 주님은 모든 인류의 ‘그 사람’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그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맞는 손님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 사람’이 되어 가기 위해서는 누가 나의 나그네인지 염두에 두고 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불현듯 ‘그 나그네’가 나타났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접대하십시다. 빚을 져서라고 접대하십시다. 그 때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고아의 아버지 황광은 목사님에게도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어느 아주머니를 찾아 가면 언제나 그 아주머니는 떡국을 끓여주셨다고 합니다. 찾아갈 때마다 그 아주머니는 물어 본다고 합니다. “자네 점심 먹었나?” 어쩔 수 없이 “네 먹었습니다.”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른 분들은 “응 그래!” 하면 그만인데, 이 아주머니는 “그래? 먹었으면 더 먹게나” 하면서 무조건 떡국을 차려주시기 때문에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먹었으면 더 먹게나”의 이 아주머니는 바로 젊은이들의 ‘그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 분으로 인해 젊은 청년 황광은은 고아의 아버지 황광은 목사가 되어 간 것입니다. 만일 이 아주머니가 젊은이들을 위하여 힘써 기도만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황광은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한국 기독교에 탄생되었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미국을 위하여 한국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니 미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 힘써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아울러 힘써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자들이 되십시다. “먹었으면 더 먹게나” 말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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