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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서 생긴 일

날짜 : 2009.05.17
예배명 : 주일예배(졸업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베다니에서 생긴 일
성경본문 : 요한복음 11장 1-17, 38-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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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한창 더운 날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한나절이 지나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우리 오늘 너무 재미있게 놀았지,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만나서 놀자.” 하루살이가 말합니다.
“내일, 내일이 뭐야?”
그 다음 날입니다. 개구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왕 놀 바에는 자기보다 큰 놈 하고 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구리와 놀기를 시작합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매일 매일 재미있게 놉니다. 어느덧 가을이 되고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야 하는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합니다. “우리 올 해 너무 재미있게 놀았지, 내년에도 함께 재미있게 놀자.” 메뚜기가 말합니다. “내년? 내년이 뭐야?”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라는 시간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하루를 넘어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메뚜기는 내일은 알고 있었지만 내년은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반면 개구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도 있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까지 알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십니까?

비슷한 이야기 하나만 더 소개해 드릴까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동생이 먼저 오빠에게 말합니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우리는 우리를 먹여 주고 살려 주는 탯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딴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동생도 굽히지 않습니다.
“이 캄캄한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거야. 마음껏 움직일 수 있고, 환한 빛이 비치는 그런 곳 말이야. 그리고 난 또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가 화를 내며 말합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내가 말했잖아. 여기가 전부야.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서의 삶에 만족하라고.” 여동생도 지지 않고 대꾸합니다.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분명히 이 캄캄한 곳보다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야.”
바보 같은 동생의 말에 질려 버린 오빠는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무시해 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슷한 두 이야기를 연거푸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최근 일주일 안에 접해 보았습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제 생각에는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최고로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상아탑이 최고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한계성을 이 두 이야기는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의 세계를 넘어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식이 우상이 되고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특별히 졸업 축하예배로 드립니다. 상아탑에서 맡은바 과업을 잘 마치는 교우님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메시지를 주시길 원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 예수님이 극진히 사랑하시던 한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려나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움직이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움직이실 생각이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초조해 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안 가시나, 빨리 가서 고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텐데…, 내일은 떠나시겠지.” 그런데 그 다음날도 움직이실 생각을 안 하십니다. 제자들은 다 포기하였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주님은 나사로를 고치는 것을 포기하셨구나,”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후입니다. 그 동안 꿈쩍도 안하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곧 베다니가 있는 유대지방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말립니다. 제자들은 유대지방으로 가기 싫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돌에 맞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나사로를 고치러 베다니로 가시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에 제자들은 옳다구나 여쭙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이에 대해 다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제자들은 아주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잠들었다고 말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죽은 이유는 자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늑장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이틀 동안 게으름을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을 아시면서 가만히 계시더니 이제 와서는 나사로에게 가자는 것입니다.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드디어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상이 1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베다니에 오셔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 생각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꿍꿍이 속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제부터 3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가셔서 흐느껴 우시겠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셔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 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섞여 있는듯합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게으름 피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오라 하셨을 때 바로 오셨으면 이렇게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제 와서 돌을 옮겨 놓으라구요? 벌써 나흘이 지났습니다. 냄새가 심하게 날 것입니다.” 퉁명스러운 마르다의 말에 예수님은 아랑곳 하시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44절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냄새가 나기는 커녕 하얀 베로 동인 채 걸어서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의 꿍꿍이 속이 이제야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지 못하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역사가 언제나 가능함을 알려주려 하셨습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처음으로 놀라운 세계를 접하였던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일에 총연출자이시고 나사로가 주인공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러면 그 후로 주인공인 나사로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요? 연출자인 예수님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아니 이처럼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경험한 베다니 마을에서는 그 후로 어떤 일들이 전개 되었을까요? 이들은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 11:53에 이후로 어떤 일이 베다니 마을에서 전개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서 예수를 믿으려 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은 참으로 안타까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수 있는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죽인 자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죽일 생각을 다 하게 되다니…. 그것도 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벌을 소유한 자들이 말입니다. 이들은 요즘 식으로 하면 박사학위도 하나 내지 두개는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운 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릅니까?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시기하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지 과연 그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짓을 행했겠나요? 요즘은 더 이상 이런 일은 안 생길 것입니다. 배운 사람들이 이런 짓은 더 이상 안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래전 함석헌 선생이 어느 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연 서두에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주인공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쭉 훑어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왜 제가 큰 바위 얼굴 얘기를 했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교육이란 무릇 지식의 전수와 더불어 선과 덕을 쌓게 하여 인격 함양에 역점을 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학교 교육은 많은 학생들을 한꺼번에 수용하여 지식만을 주입시키려는 ‘교육공장’과도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이 말을 듣다가 어느 선생님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학교를 공장이라고 하다니요!” 대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교육 공장이라는 말에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과연 교육 공장은 어떤 사람들을 배출해 내는 곳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이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공장 출신들은 자신이 배운 것 이외에 더 신비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배운 것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신비한 세계를 보여주는 자들을 찾아가서 없애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은 요즘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더 많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요즘은 교육공장이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교육 공장 출신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1600년경 ‘지구가 태양을 돈다’ 곧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최초로 망원경을 발명합니다. 우주를 망원경으로 탐험한 후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립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끝내 로마 교황청과 싸웁니다. 드디어 종교재판에 회부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를 공격한 사람이 로마 교황청뿐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도 갈릴레오를 공격합니다. 그는 여호수아 10:13절의 말씀으로 갈릴레오의 주장을 일축시킵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과 싸울 때 하늘을 행하여 소리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13절 말씀입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였으니, 종교개혁자 루터도 양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학박사 루터도 갈릴레오를 죽인 것입니다.
하기야 요즘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플랫 어스 소사이어티(Flat earth Society)’라는 기관은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1956년에 이 기간이 창립되었는데 2001년 지도자가 죽은 후 잠시 약해지더니 최근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신비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하여튼 루터가 그러한 큰 실수를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첫 번째로는 성경에 쓰여 있고 두 번째로는 모든 종교인과 과학자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학박사 루터의 세계였습니다. 만일 루터가 잠시라도 갈릴레오라는 사람을 신비하게 생각하였더라면, 그러한 실수는 모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루터가 갈릴레오를 신비한 눈을 가지고 바라보았더라면 그가 만든 망원경의 신비를 보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자기의 신학과 지식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이해한 말씀으로 갈릴레오를 죽인 것입니다.
루터도 이런 실수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보스톤에서 최고의 학문을 닦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루터보다 더 많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 4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모든 것 안에서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시골 소년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도 신비스러운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모든 것 안에서 신비스러운 세계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고정 관념을 깨부수시면서 부활의 능력을 보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도 이러한 신비스러운 세계가 열려져 있는데 하물며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이웃 안에 있는 신비한 세계를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루터의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줄 압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학식과 지식을 넘어서 어떠한 신비한 세계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웃을 죽이는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이웃을 판단할 때 우리는 이미 이웃을 죽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 이웃을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웃을 더욱 신비하게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집무할 당시 자주하는 삶의 예식(ritual)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연주의자인 친구와 더불어 밤하늘을 망원경으로 살피곤 하였다 합니다. 밤하늘의 작은 점을 망원경으로 포착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것은 안드로메다 은하(galaxy), 그것은 우리들의 은하수만큼 한 크기야. 그것은 1억 개의 은하 중에 하나야. 그것은 75만 광년 멀리 떨어져 있어. 그것은 1천억 개의 태양으로 구성되어 있고 물론 우리들의 태양보다 다 크지.” 대통령은 잠시 멈추고는 신음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야. 잠자러 가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밤에 하늘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하늘의 신비에 사로잡히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훌륭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않았나 저는 이글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 가지만 고치셨더라면 정말로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겠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신비한 세계를 보는 것은 좋은데 반면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너무 작게 여겼습니다. 자신만 작게 여기면 괜찮을 텐데 인간의 존재를 작게 여긴 것 같습니다. 밤하늘을 본 후 이런 고백을 하면 어떠했을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우주가 이렇게 신비스러운데 우리 인간은 얼마나 신비스러울까? 우주의 신비가 우리의 상상을 넘은 것처럼, 우리 인간의 신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있어.”
이러한 고백 후 친구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자러 가지” 말하곤 했다면 말입니다. 루즈벨트의 학식과 경험이 우주의 신비는 보게 하였지만 이웃과 자신의 신비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특히 졸업생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학식과 경험이 세상을 아니 이웃을 신비스럽게 보는 눈을 빼앗아가지 않기 바랍니다. 도리어 더 이웃을 신비스럽게 보도록 노력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저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에 온 천지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줄 압니다. 하찮은 시골 소년 소녀에게서 아니 이미 죽은 자들 안에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줄 압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린 수도자 하나가 사원에서 경전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스승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무슨 경전이냐?”
수도자가 공손히 대답합니다.
“유마경인데요.” 기독교식으로 하면 “마태복음인데요”라고 말한 셈일 줄 압니다.
그러자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뭘 읽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고, 넌 무슨 경전이냔 말이다.”
스승의 물음에 어린 수도자는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에서 나온 이야기를 아니지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스승은 어린 수도자 안에 있는 어린 수도자만 갖고 있는 놀라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것입니다. “무슨 경전이냐?” 우리도 이웃을 이러한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서로를 향하여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무슨 경전이십니까?”
교우 여러분 이것을 오늘의 인사로 삼으십시다. “당신은 무슨 경전이십니까? 졸업생교우님들에게 이러한 인사를 드리십시다. “당신은 무슨 경전이십니까?”
교우 여러분, 졸업생 교우 여러분,
신비함을 구하는 하루살이가 되십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가 있음을 고백하는 메뚜기가 되십시다. 믿으면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믿음을 지닌 개구리가 되십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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