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위대한 어머니

날짜 : 2009.05.10
예배명 : 주일예배(어머니 주일)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위대한 어머니
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장 3-8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510.wmv

한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인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던 모양입니다. 살아 있을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 고생하던 사람, 예쁜 사람, 미운 사람 등 숱한 사람의 뼈가 모여 있었습니다. 문득 성인은 많은 뼈 무더기 앞에 자기 몸을 던져 공손히 절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숱한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스승님께서 어찌 이 보잘 것 없는 마른 뼈무덤에 절을 올리십니까?”
“이 한 무더기의 뼈는 나의 오랜 조상이거나, 부모님의 뼈일 수도 있기에 내가 절을 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희 중 누가 여기서 여자의 뼈를 가려 낼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성인이 숱한 뼈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고서 말합니다.
“자, 이 뼈가 바로 여자의 것이다.”
“스승님, 어찌 그것을 아십니까?”
“남자의 뼈는 희고, 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여자의 삶을 생각해 보아라. 어려서는 여자이기에 남자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다. 결혼하여 아기를 낳을 때마다 많은 피를 쏟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를 키울 때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흰 젖을 먹이는 까닭으로 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제자들은 성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어머니들의 고난에 찬 삶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한국 분이 지은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저자는 인도를 많이 방문한 후 인도문학에서 인용한 글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의학적으로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의학을 공부했습니다만 한 번도 여자의 뼈가 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반면 여자분 들은 골다공증이 많아서 가벼운 것은 의학적으로 잘 증명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적으로 맞던 안 맞던 어머니들의 뼈가 검고 가볍다는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참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인도의 지혜자들은 여자분 들의 고통의 삶을 그들의 검고 가벼운 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머니 주일로 지킵니다. 어머니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제자들처럼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어머니를 생각하는 찬송을 통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 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저희 어머니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또 다른 것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저희들의 어머니들이 원하시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이 기록된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 사랑하는 동역자이자 믿음의 아들이요 또 제자이자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이 담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많은 것을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러한 내용의 말씀이 담겨 있는데, 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기와 같은 고난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마지막에 가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강조합니다. 4:5‐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이제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를 대신해서 남은 삶을 선한 싸움을 싸워달라고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적인 사명을 아무에게나 부탁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왜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게 되었는지 그 궁극적 이유가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그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될 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늘 서신에서 서두에 쓰던 것처럼 아주 간단히 축복의 말을 씁니다. 그리고는 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한 마디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으로 인해 디모데는 지금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었고 그러기에 사도바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사도바울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상도 여러 조상이 있을 텐데 어떤 조상일까요? 5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남자분 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디모데가 전수받은 신앙은 할아버지의 신앙도 아니요 아버지의신앙도 아니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지금 사도바울로부터 자신이 사도바울의 후계자가 되는 이 영광스런 직분을 받게 된 것은 자신 안에서 시작된 믿음이 아니고 조상 적부터 전해 내려 온 그것도 여조상 들의 믿음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어려운 부탁을 하기 전에 이처럼 믿음의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디모데를 격려하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개역번역은 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만, 대략 이런 말씀을 한 이유를 정리하면 복음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다가 힘들 때가 오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은 어머니를 생각할 때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새로워질 것을 확신하기에 지금 사도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이제 왜 사도바울이 많은 제자들 중에 디모데를 후계자로 세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후계자가 되는 길은 많은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었습니다. 이를 제일 잘 견디고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된 사람이 거짓 없는 믿음의 소유자 디모데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닥쳐오는 고난이 너무 힘겨울 때면 그 안에 있는 믿음을 새로이 불일 듯하게 하는 방법이 남달리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그의 신앙은 새로이 불일 듯 붙여지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이 당시는 어머니주일이 없었습니다만, 만일 어머니주일이 있었다고 가정하십시다. 디모데는 어머니 주일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까요?
디모데에게는 어머니를 향한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처음 소개해 드린 성인의 이야기처럼 자기를 위하여 뼈가 검은 색이 되어 갔고 또한 가벼워진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어머니를 위한 아픔의 눈물만 소유한 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골다공증의 아픔을 넘어 세계를 품는 믿음과 사랑의 위대한 어머니,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어머니 안에 있는 불굴의 신앙이 자신 안에서 새롭게 꽃피는 체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머니의 위대한 삶을 생각하며 위대한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머니주일을 맞이하여 지금 우리들의 어머니가 함께 이 땅에 계시던 아니면 하늘나라에 계시던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주일을 맞이하길 원하실까요? 우리는 골다공증으로 시달리셔야만 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뿐일까요?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가 어머니의 또 다른 위대한 모습을 생각하며 감격해 하길 원하시지 않으실까요? 아울러 우리가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도 어느덧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을 닮아 가지 않을까요? 디모데가 어머니와 할머니의 위대한 삶을 생각하는 삶을 살았기에 사도바울의 후계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저의 어머니에게는 위대한 모습이 하나도 없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어머니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을 본 어느 분이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이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신체 장애인이 됩니다. 모든 역경을 딛고 훌륭한 교수님이 됩니다. 삶을 뒤돌아보며 어머니의 눈물이란 글을 씁니다. 그 글에서 어릴 때 쓴 일기를 소개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연탄재 부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살짝 문을 열고 보니 밤새 눈이 왔고 엄마가 연탄재를 바께쓰에 담고 계셨다.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우리 집 연탄재가 남아나지 않겠다. 학교 갈 때 엄마가 학교까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깔아 놓은 연탄재 때문에 흰 눈 위에 갈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로 걸으니 별로 미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올 때는 내리막길인데다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너무 미끄러워 엄마가 나를 업고 와야 했다. 내가 너무 무거웠는지 집에 닿았을 때 엄마는 숨을 헐떡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나 있었다. 추운 겨울에 땀 흘리는 사람!‐바로 우리 엄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그 땀이 눈물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를 업고 오면서 너무 힘들어서 우셨을까, 아니면 또 ‘나 죽으면 넌 어떡하지’ 생각하시면서 우셨을까. 엄마 20년만 기다려요 소아마비는 누워 떡 먹기로 고치는 훌륭한 의사 되어 내가 엄마 업어 줄게요.”
소아마비를 앓은 아이가 스스로 의사가 되어 자신의 소아마비를 고친 후 엄마를 업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일기를 쓴 것입니다. 이 아이는 후에 인생의 소아마비를 고치는 훌륭한 영문학 교수가 되어 간 것입니다.
장영희 교수가 어려움을 딛고 이처럼 훌륭한 삶을 사는 이유는 하찮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모든 어머니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고 일기장 안에 적혀졌을 때 이 아이는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뿐일까요? 어머니주일에 이런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잘 아시다시피 이번 돼지독감으로 인해 온 세계가 뒤집어졌습니다. 저는 이 돼지 독감으로 인해 귀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난 두 주간 한국과 호주에 있으면서 저의 마음은 온통 돼지 독감에 가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에 그것도 우리가 사는 매사추세츠에 퍼지면 어떡하나 늘 염려하면서 뉴스를 열심히 듣고 읽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어느 돼지 한 마리 안에서 변형된 독감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뒤집어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한편 어느 날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한 마리의 돼지가 이처럼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가 있다면 한 인간은 얼마나 큰일을 인류사에 남겨 놓을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돼지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서 이번에 이런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인간들아 당신들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줄 아직도 모르는가? 답답하구나. 내 한 번 일을 저지르마. 내가 저지른 일을 보고 깊게 깨달으라.” 그리고는 독감 바이러스를 변형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한 마리의 돼지가 온 세상을 뒤집어 놓는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선하게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머니의 골다공증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의 세계 역사를 바꾸시는 위대한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온 우주가 기대하는 멋진 모습이 어머니 안에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머니를 어머니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는 3년 전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수년간은 골다공증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품에 안기시기 약 3년 전 곧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즈음일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 오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군키트(Ogunquit)이라는 바닷가에 갔습니다. 오군키트 바닷가 벤치에 앉으시더니 혼자서 이처럼 중얼거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것이 대서양에 다 와 보다니. 나 같은 것이 대서양에 다 와 보다니.” 저는 옆에서 들으면서 대서양을 보는 것이 너무도 좋으신 모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많은 후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 드릴걸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머니 그게 아니에요. 지금 대서양이 어머니에게 말하고 있어요. ‘나 같은 것을 저 분처럼 위대한 사람이 찾아와 보시다니. 나 같은 것을 저분이 찾아 와 보시다니.’”
제가 만일 그 때 그러한 고백을 하였더라면 지금 저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되는 훨씬 훌륭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을 줄 생각됩니다. 그뿐 아니라 좀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요?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예배드리시는 교우 여러분, 살아계신 어머니의 위대함을 생각하십시요. 그리고 그것을 어머님께 표현하십시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더욱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여러분도 어머니를 닮아 가게 될 것입니다.
하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예배드리시는 교우 여러분, 위대했던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어느덧 우리도 위대한 삶의 주인공이 되어 갈 것입니다.
빨간 카네이션을 달고 있던 하얀 카네이션을 달고 있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19세기의 미국 시인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웠을 때,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많은 고통을 겪으시며 살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 있으셨습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꽃이 피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지요. 그 이유는 해마다 늙은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늙은 가지라고 생각한 일이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새 가지라고 생각하며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롱펠로우는 늙은 사과나무를 통해서 늘 새 가지가 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도 이러한 사과나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심겨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늦기 전에 자주 자주 고백하십시다.
“어머니 그게 아니에요. 지금 대서양이 어머니에게 말하고 있어요. ‘나 같은 것을 저 분처럼 위대한 사람이 찾아와 보시다니. 나 같은 것을 저분이 찾아 와 보시다니.’”
우리들의 어머니는 위대한 꽃을 피우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도 덩달아 위대한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 우리 어머니의 위대함을 전수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소유한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