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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날짜 : 2009.04.05
예배명 : 종려/고난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성경본문 : 누가복음 23장 39-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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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새기는 집에 손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도장 하나 새기는 데 얼마입니까?”
“예, 천 원입니다.”
“한자나 한글이나 값이 같습니까?”
“물론 같지요.”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이름자가 길든 짧든 값이 같습니까?”
“아, 물론이죠.”
주인의 이 대답을 듣자 손님은 도장에 새길 이름이 적힌 쪽지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도장집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느 것이 이름입니까?”
“그게 다 이름인데요.”
“이게 한 사람 이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렇다니까요.”
“아니 선생님, 이런 긴 이름이 어디 있어요?”
“있으니까 가져왔죠. 제 아들 이름입니다.”
“선생님, 혹시 저를 놀리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놀리다니요, 분명히 제 아들 이름인데요.”
도장집 주인이 계속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이자 손님이 호적등본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그 호적등본을 본 도장집 주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
그의 호적등본에 올라 있는 이름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의 성은 ‘밝’씨요, 그 이름에 포함된 실제 의미는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라고 합니다. 배오리 씨가 지은 ‘고운 이름 한글 이름’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제일 긴 이름이 ‘황금 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긴 이름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 화가 피카소라고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파블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 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 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
피카소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피카소의 이름이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Pablo Ruiz Picasso)’로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그런데 ‘루이즈’ 말고도 11개의 미들네임(middle name)이 있습니다. 참 피카소는 재미있는 사람이죠. 그러면 왜 이렇게 11개의 middle name이 생겼을까요?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피카소는 애인이 생길 때마다 애인의 이름을 middle name으로 넣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이긴 하지만 한번 피카소식으로 하면 여러분의 이름이 지금 어떻게 되는지 잠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래 생각하셔야 할 분도 계시고 잠깐 생각만 해도 되시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피카소식으로 하면 middle name이 하나도 없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피카소의 middle name은 피카소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딱 피카소 식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이 피카소의 이야기를 오래 전 정확히는 약 일 년 전에 읽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이번 사순절 주제가 무엇입니까?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지 않습니까? 사순절을 거의 마치게 되면서 저는 피카소의 지혜를 저 나름대로 새롭게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친이요 동생들로 생각한 사람들의 이름이 우리들의 middle name이 되겠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누구를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요 부친으로 삼는데 달려 있고 이들의 이름은 어느새 나의 이름이 되어 있겠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카소가 생각하는 이성적 애인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애인들이 우리들의 이름이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 나의 형제요 자매는 어떤 분들인지, 어떤 분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가 되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가는지 함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좌우에 죄수 두 명이 함께 달렸습니다. 그 중 한 죄수가 예수님께 먼저 말을 겁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같은 죄수로서 같은 형벌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에 아무 대꾸도 안 하십니다. 사실 이러한 조롱은 평생 받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롱을 받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롱은 온 인류를 대신해서 이 죄수가 대표로 하는 조롱으로 들리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많은 병자도 고치셨고 때로는 오병이어로 장정만 5,000명 이상을 먹이셨고, 그 뿐입니까 물 위를 걷는 기적, 풍랑을 잠잠케 하는 기적 등 수없이 많은 기적을 베푸셨는데 이제 죄수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랑 매어 달려서 죽기만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누가 조롱을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묵묵히 그 조롱을 감당할 따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위에 고통을 감수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한 채 외롭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또 다시 치명적인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더 서글프게도 같은 죄수에게서 조롱을 당합니다. 그래도 같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끼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믿던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으시고 이제는 같은 죄수에게 배반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죄수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내버려 두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도 입을 엽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다른 죄수로부터 듣습니다. 이 죄수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죄수의 생각을 풀이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셋은 같은 정죄를 받았어 그런데 너와 나는 이 정죄가 합당한 것이야. 그러나 이 사람의 행함은 옳지 않은 것이 없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이 죄값을 치루고 있지만 이 사람은 달라 그러니 두렵지 않니? 하나님이 두렵지 않아?” 이 죄수의 말을 예수님은 신기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흐뭇한 생각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두 죄수 모두 비슷한 죄를 지은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는 예수를 죄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죄수는 예수를 의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비슷한 죄를 지어서 같이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이 두 죄수가 이처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을까요?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죄를 졌나?”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첫 번째 죄수는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처럼 보여도 십자가형을 받는다면 필경 밝혀지지 않은 하나님만 아는 죄가 있기에 그런 형벌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죄수에게는 예수라는 사람은 옳은 듯하게 보였지만 가장 악독한 사람으로 판결이 난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자들은 모두 저주를 받은 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선하게 보였던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그 동안 선인처럼 보인 사람입니다. 자기는 악인처럼 보인 죄인이고 예수는 선인처럼 보인 죄인입니다. 누가 더 나쁜 사람입니까? 누가 더 악질적인 죄인입니까?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죄수는 모든 유대인을 대표해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를 최고로 악한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두 번째 죄수는 달랐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난은 단순히 죄의 결과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함이 고난 속에는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옳바른 일만 행한 사람임을 볼 때 분명 말할 수 없는 어떠한 신비한 고난을 지금 예수라는 사람은 받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옳은 일만 한 이 사람이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을 볼 때 이 분이 당하는 고난 안에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져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도리어 두려움 가운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다 십자가에 달리는 죄수였지만 고난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를 저주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고난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고난 받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죄를 많이 지었나봐. 그러니 이런 고난을 당하지. 이 사람처럼 죄를 지으면 안 돼. 그래도 감사하지 이 땅에 살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니.” 다른 한 가지는, “이 분과 같은 선한 사람이 이런 고난을 받는다니 필경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을 거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 분을 통해 펼쳐 가시려나봐.”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더 그 분을 존경합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합니다. 두 번째 죄수는 이웃의 고난 앞에서 이렇게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라는 심리학자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후 고난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이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그의 고난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야 한다. 그의 독특한 사명이다. 그는 알게 될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 자신은 온 우주에 단 한 사람뿐임을. 아무도 그의 고통을 감하여주거나 그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자기가 자기의 짐을 질 때 그는 독특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유대인인데 이 글에서 욥의 고난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욥기는 고난의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이 아닙니까?
하여튼 두 번째 죄수는 어떤 경위를 통해서든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 아는 자였습니다.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함께 죽어가는 예수라는 사람 안에서 바로 그러한 의로운 고난을 보았습니다. 그 분이 겪는 고난은 특별한 고난임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을 정죄하는 친구 죄수를 나무란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특별한 고난을 겪고 있는 예수에게 용기를 다해 고백합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를 풀이하면 “당신의 고난으로 인해 이루어질 놀라운 나라에 당신이 왕으로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다른 죄수가 픽하고 웃었을지 모릅니다. 아랑곳하시지 않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난에는 한 가지 요소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죄수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습니다. 반면 고난에는 두 가지 면이 있음을 보고 예수님께 “나를 생각하소서” 고백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죄수는 십자가형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저주스러워서 귀를 물로 씻었다고 합니다. 이런 저주의 십자가형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놀랍게도 예수님의 첫 번째 초대 손님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는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옳은 자로서 상상을 초월한 고난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자기가 겪고 있는 십자가의 고통과도 비교가 안 되는 고통을 겪고 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고백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두 가지 고난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초대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고난의 주님을 향하여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당신이 겪으신 고난의 신비를 알며 주님을 향하여 “나를 생각하소서” 고백하는 자들을 당신의 구원의 나라에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어도 상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위한 고난이었음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을 당신의 구원의 나라로 초대하시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이 예수님의 우리가 알 수 없는 본인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본인의 죄와 잘 못으로 인해 그러한 형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 죄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신비한 고난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두 번째 죄수와 같은 믿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죄수의 고백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크신 고난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고난의 신비의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제가 대학생 시절입니다. 함께 대학부 친구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은 것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다 사하는 길이 열렸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갑니다.” 다른 친구가 제 말을 받아서 말합니다. “그러니 더 예수님이 위대해 보이는데요.” 30년 남짓 지난 지금까지도 친구의 말이 종종 저의 뇌리를 울리곤 합니다. 친구는 예수라는 한 인간 안에 온 인류의 죄를 갚는 고난이 채워져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 작은 체구에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는 신비한 고난이 채워져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님의 고난의 아픔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편 주님의 고통은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지만 주님의 고난을 통한 축복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고난을 통한 신비스런 축복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를 생각하소서” 고백하는 우리들의 이름을 주님은 신비스럽게 당신의 middle name으로 삼으시지 않으실까요?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얻으신 이름들인데 당연히 삼으시지 않으실까요? 당신의 생명을 주고 얻은 이름들인데 당연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예수님의 이름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당신께 고백한 자들의 이름, “나를 생각하소서” 고백한 자들의 수많은 이름을 다 연결시켜 놓은 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이름이 신비스럽게 하이픈(hyphen)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일줄 압니다. 주님의 낙원에 그 이름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들의 이름을 찾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름들이 하이픈으로 예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 각자의 이름은 주님의 이름의 한 부분임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주님은 이 땅위에 계실 때부터 당신의 택한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곤 하지 않으셨을까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름을 예쁘게 연결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고난의 신비는 우리들의 이름이 하나로 아름답게 연결된 것을 나타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깐 “이 땅에서 나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만 말씀드립니다. 제가 속한 저의 공동체 분들의 이름이 저의 middle name이 되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제가 주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저의 이름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생각을 많이 차지하고 있으신 분들 순으로 저의 이름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구성된 이름이 바로 나의 참 모습이 아닐까요? 저의 이름은 저의 공동체 특히 제가 많이 기도드린 분들로 시작해서 하이픈으로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물론 그 이름들을 연결하는 하이픈(hyphen)은 주님의 보혈이겠고요.
교우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면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우리들의 이름은 아름답게 연결되어 한 이름을 이루고 있을 줄 압니다. 또한 지금 우리 각자의 모습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 분들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주님의 보혈이 연결부호(hyphen)가 되어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middle name을 연결하는 하이픈(hyphen)이 좀 더 두껍고 더욱 빛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주 자주 주님의 신비한 고난 앞에 서야 할 줄 압니다. 신비한 주님의 고난 앞에 오래 서면 서 있을수록 우리들을 연결한 하이픈(hyphen)은 더욱 든든해질 줄 압니다. 아울러 주님의 고난 앞에서 이웃의 이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 때 우리들의 이름은 더욱 아름다워질 줄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은 사순절 기간 더욱 주님의 고난 앞에 서십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십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의 사랑하는 이웃인 아무개를 생각하소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너희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브루클라인(Brookline)의 유일한 자선기관인 브루클라인 커뮤니티 멘탈 헬스 센터(Brookline Community Mental Health Center)를 위한 모금 모임에 참석했었습니다. 얼만 전에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50주년 기념 캠패인에 초대한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희가 ECC곧 Education Community Center를 짓고 있는데 곧 우리의 건축 목적이 우리 교회뿐이 아니라 브루클라인 주민들을 위하여 짓는다 하면서 브루클라인 행사를 모른 척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어서 그 모임에 간다고 예약(RSVP)을 하고는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센터가 50년이 되었는데 더 나은 치료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250만불 캠패인을 시작한 것입니다. 책임자들이 한 사람 씩 나와서 정리 정돈된 발표를 하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 경기 불황으로 인해 약 15%환자가 늘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직장 여성들이 마약이나 술 중독에 많이 젖어 들기 시작하는데 약 43% 직장 여성들이 과도한 술을 마시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잘 사는 마을로 소문난 브루클라인에도 홈리스가 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처음부터 모금하는 모임이라는 것은 알고 갔습니다. 저희 교회 형편상 큰 액수를 기부할 수 없는 것도 잘 알고 갔습니다. 제가 간 이유는 많은 액수의 기부는 하지 못하지만 이웃을 위하여 애쓰는 그들의 모습을 보길 원했고 또 이들은 반가워할지 안 할지 모르지만 저 나름대로 이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을 얻기 위해 갔습니다.
제일 마지막 순서로 한 청년이 소개되어 나왔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서 홈리스가 되었는데 이 청년은 마약중독자도 아니고 에이즈환자도 아니기에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센터에서 감사하게도 받아주어서 지금 공부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청년이 좋아하든 안 하든 그 청년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마음속으로 바라보며 기도드렸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의 사랑하는 이웃인 니콜라스(Nicholas)를 생각하소서.”
니콜라스(Nicholas)를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간 그는 저의 삶에 한 작은 부분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다음에 또 얼마나 그를 위해 기도할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시간 저의 생각에 떠 오른 그 이름은 저의 삶에 한 작은 부분이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자주 자주 주님께 올리는 이름들은 얼마나 소중한 이름이 되어 있을까요?
남은 사순절 고난의 신비를 온 몸에 담고 아파하시는 주님 앞에 서십시다. 그리고는 고백하십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의 사랑하는 이웃인 아무개를 생각하소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너희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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