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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날짜 : 2009.02.22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성경본문 : 마가복음 3장 31-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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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경에 펜실베니아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튜어트 울프(Stewart Wolf)라는 의사이자 오클라호마 의과대학 교수가 한 작은 농장을 방문하여 의학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치자 그곳에서 일하는 어느 의사가 말합니다. “저는 17년간 이곳에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웃마을인 로세토(Roseto)라는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여 왔는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65세 이하의 사람들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울프 박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그 당시 심장마비는 미국전역에 전염병처럼 퍼져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심장마비가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울프 박사는 의과대학 학생들과 함께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조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65세 이하의 사람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65세 이상인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확률은 미국 전역에 비하면 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회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자살률은 제로, 알코올 중독 제로, 마약 중독 제로, 범죄도 거의 없었습니다. 생활보호 대상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이런 경우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음식이 아닐까요? 이 당시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울프 박사는 이들의 음식이 무엇인가 다를 것이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원래 이태리에서 온 사람들인데 이태리에서보다 훨씬 비건강식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태리에서는 피자에 도마토, 안쵸비, 혹은 양파를 얹어서 먹었는데 펜실베니아에 와서는 소세지, 햄, 페퍼로니, 계란등을 얹어서 먹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훨씬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운동이나 생활습관이 아닙니까? 놀랍게도 다른 생활습관도 비건강한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는 사람은 적었고 담배를 많이 피웠으며 전체적으로 비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음식, 생활습관, 담배, 비만등 건강에 나쁜 모든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의사인 울프 박사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로세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멈추어 서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서로 이웃집을 방문합니다. 뒷마당에서 함께 음식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삼대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2000명이 사는 마을인데 22개의 자선 기관이 상설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00명이 사는 마을인데 22개의 자선기관…. 곧 온 마을이 한 가족이 되어 있었고 한 공동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2000명이 한 가족이 되어 서로 도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마을에는 병이 없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나이가 되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울프 박사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여 있느냐가 인간의 건강까지 좌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 그는 그 후로 환자를 진단할 때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하였습니까?”
교우 여러분, 다음 번 의사를 만나러 갔는데 다짜고짜로 의사가 여러분에게 질문했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셨습니까?”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이상한 얼굴로 의사선생님을 볼 것입니다. “아니 이 의사가 왜 이런 엉뚱한 것을 물어 봐? 이상한 종교로 나를 유인하려는 것 아니야? 진료는 하지 않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최고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최고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최고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될까요? 아니 최고의 공동체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며 최고의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그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지 상고해 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곳곳에 다니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셨습니다. 혼자서 외치시기가 부족해서인지 12제자를 뽑아서 그들과 함께 거리를 다니면서 전도하고 병을 고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한편 기회만 되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이 날도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예수님이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아들과 형을 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급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가까운 친척이 죽었거나 아니면 심히 아프기에 그렇게 급히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 온 이유는 엉뚱한데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말씀이 아닌 21절에 나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무슨 연고인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이에 예수의 친속들이 붙들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못했나 봅니다. 이제는 모친과 동생들이 쫓아 온 것입니다. 아들이며 형이며 오빠가 가르치고 있는 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이에 답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가만히 생각하면 예수님도 참 철이 없으십니다. 지금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이 미친 줄 알고 확인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빨리 나가서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을 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우리가 이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지 2000년이 지난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이다’ 생각하면서 읽으니 말이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아니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소문대론가 보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제아무리 사실이라도 사실을 말씀하실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데이빗이라는 청년이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해서 정신병원에 끌려들어 왔습니다. 의사에게 말합니다. “저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빨리 저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의사가 말합니다. “보아하니 엉뚱한 소리들을 많이 하였다던데 아무리해도 온전하지 않아. 입에서 바른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제부터는 바른 말만 할게요. 한번만 봐 주세요.” 청년이 하도 졸라서 의사가 퇴원시켜 주었습니다. 청년은 이제부터 바른말만 해야지 하고 병원 밖을 나섰습니다. 첫 번째 지나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찾아가 꾸벅 절을 하고는 말합니다. “저의 이름은 데이빗이고요. 저 태양은 둥급니다.” 다시금 붙잡혀서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틀린 말을 하던 맞는 말을 하던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못할 때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지금 그와 같은 경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나오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말하였을까요? 가르치는 것이 곧 끝난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던가, 아니면 잠깐 실례하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당신은 사람들 생각과 달리 온전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답변하시죠? 34절 말씀입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반응했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중증이군. 자기 에미와 동생들이 걱정이 되어서 이처럼 멀리서 찾아 왔는데 반기기는커녕 어떻게 저렇게 말하지.” 거기에 굴하지 않고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부친이 빠져있습니다.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부친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친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부친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입니다. 하여튼 이 말씀으로 인해서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더 이상 귀를 막고 미친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하며 그 방을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 가운데서 깊은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의 눈은 갑자기 반짝하며 빛이 났을 것입니다. 왜 이들의 눈이 빛이 났을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기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됨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라면 이들은 바로 자기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순식간에 수많은 형제 자매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순간 자신은 놀라운 공동체의 일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위대한 공동체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다가 모친과 동생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가 맞이하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거기 앉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 모두는 위대한 공동체에 속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하심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온전하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이 땅에서 사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바람은 거기 앉아 있는 자들에게 위대한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이요’ 알려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온전하다고 생각하던 안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외친 것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자 계속 외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 말씀을 이해한 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새로운 공동체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그토록 멀리만 느껴졌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자들이 그토록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옆에 이 사람만 없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들을 텐데 하면서 옆에 사람 때문에 불편해 하던 사람도 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바로 친 형제요 자매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요 모친과 부친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공동체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가족을 잠시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아니 가족만 희생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희생이 되었습니다. 자신도 심한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상관치 않았습니다. 인류는 위대한 공동체임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공동체는 소중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살 때 우리는 처음 로세토(Roseto)마을의 이야기처럼 모두 건강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공동체의 소중함을 잊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 왔습니다. 때로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게 삽니다. 바르게 삽니다. 세상적으로 큰 공헌을 하는 자들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외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 외침을 통하여 예수님은 위대한 신앙의 공동체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신앙 공동체는 바로 오늘의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하여 ‘위대한 신앙의 공동체다’ 말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가서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마음의 위안만 받으면 되지 무슨 위대한 공동체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대신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혼자서 열심히 운동하면 되지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물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공동체의 중요성은 모르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의 집에서 교회 오는 길에 보면 늘 아침마다 추우나 더우나 조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화씨 영도에도 뛰는 분이 있습니다. 어깨에 흰 서리가 하얗게 낀 채로 김이 온 몸에서 모락모락 나면서 달리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그 분을 볼 때마다 늘 존경어린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위대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더욱 멋진 삶을 살지 않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최고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니 위대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이 놀라운 공동체의 삶을 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되지 않겠습니까? 왜 요즘 마땅한 공동체가 없는가 하고 찾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멀리 가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을 통하여 공동체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한 구역 식구들을 생각하며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그리고는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그동안 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놀라운 공동체가 탄생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그것만은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그럴 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금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일을 뺀 40일간이 사순절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공동체를 새롭게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체험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사순절이 마칠 때에는 그 누구를 향해서라도 담대히 외치게 될줄 압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동안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당신이 평소에 하시고 싶은 고백을 마지막으로 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위대한 공동체를 탄생하게 하시려고 그동안 어머니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위대한 공동체를 완성시키신 후 마음껏 어머니에게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즐겨 하셨던 그 고백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은 이랫다 저랫다 하시는 분이신가요? 그 고백은 요한에게 이어집니다.
잠시 후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 후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답변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내 모친입니다.” 이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흔히 하시던 말씀을 요한에게 전수시키신 것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이후로 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처럼 자기의 모친과 동생이 아닌 자들을 향하여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사건은 사실 십자가에서 요한과의 대화를 통하여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번 사순절기간 우리에게 일어나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고백을 전수 받아야 합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십자가 앞에 바로 서는 자들은 이 선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의 학생이 하루는 나우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과 같이 있을 때는 마치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에 나우웬이 답변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는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신 주님께는 이제 온 인류를 가르키며, “보라 네 모친이요 네 동생들이라.” 그는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보라 네 어머니라. 네 동생들이라.” 이에 함께 응답하십시다.. “내 모친이요 내 동생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세 살 난 소녀가 동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겁니다. “할머니 나 상상이 안되! (Guess what, Grandma!) 나는 이제 곧 언니 아니면 누나가 될거야.”
할머니는 손녀의 이 말을 듣고 명상에 잠깁니다. “언니와 누나가 되는 이 즐거움이 이렇게 크다면 온 세상 사람들의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일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놀라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을 누리는 자들은 먼저 가장 가까운 이웃과 만나는 자들입니다. 가까운 이웃 안에 그리스도를 보는 자들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며 외치는 자들입니다. “내 모친이요 내 동생들이라.”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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