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날짜 : 2008.06.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장 3-8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80608.wmv

도널드 밀러(Donald Miller)라는 분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불현듯 전날 밤 티비에서 방영되는 포커게임을 본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요즘 여러 방송국에서 특히 스포츠 채널에서 포커게임을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덧 대화의 주제는 도박(gambling)이 되었습니다. 한참 도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합니다. 이 친구는 커피 가게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는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친구였습니다.

“내가 아는 성공한 사람 중에는 도박을 하는 사람이 없어, 그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그들은 인생을 그대로 받아 드려. 그들은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이 분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밀러씨는 이에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별 볼일 없지. (it stinks)”

이에 대해 친구는 말합니다.

“인생은 좋은 포도주와 같아.”

밀러씨는 친구의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후로 그는 친구의 말로 인해서 많은 삶의 변화를 갖게 됩니다. 결국 4년 전에 낸 그의 책 첫 챕터를 이 친구의 말로 시작합니다.

“Life is a fine wine (인생은 좋은 포도주와 같다).”

밀러씨는 최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의 친구는 벌써부터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인생은 멋진 포도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야 밀러씨는 인생이 멋진 포도주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크리스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고백하기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하여 여러 컨퍼런스(conference)에 참석하곤 했다곤 합니다. 많은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Life is a fine wine (인생은 좋은 포도주와 같다). 더 이상 컨퍼런스에 참석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의 문제는 방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었을 때 그는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것 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을 보는 어떤 눈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Life stinks’ 아니면 ‘life is a fine wine?’

교우 여러분, 성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하죠? 그러면 인생을 멋진 포도주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아니 어떻게 해야지 이런 인생관을 갖게 될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지막 절을 보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분위기임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바울은 지금 마지막 유언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고난을 받으라고 할까요?

요즘 목회자들 모임에 가면 제가 종종 설교를 하게 됩니다. 지난 번 ‘말씀과 함께’ 집필자 모임에서 개회 설교를 맡았습니다. 최근에는 뉴잉글랜드 교역자수련회에서도 개회설교를 맡았습니다. 늘 교회 밖을 나서면 설교를 듣는 자였는데 이제는 종종 설교자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 할 것은 못됩니다.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노종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내가 설교를 해야하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면, 그 때 제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감히 젊은 목사님들에게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위로하는 말뿐입니다. 적극적으로 고난에 동참하자는 말 보다는 고난이 오면 잘 견디자는 말뿐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위대함이 있는 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고난을 받으라.” 사실 사도 바울이 지금 유언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첫 번째로는 복음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기 위한 사도바울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난 없이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바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고난은 결국은 의로운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니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장에 보면 이와 관련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이외에 왜 사도바울이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게 되었는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잠시 국어 시간으로 돌아 가 볼까요? 8절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봉독해 드릴까요?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러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제일 먼저 나오는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가 앞과 뒤를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곧 앞에 무슨 말씀을 하였던 그 말씀의 내용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하고 또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삶을 어떠한 눈으로 보겠습니까? ‘Life stinks(인생은 별 볼일 없지)?’ 사실 삶을 두려움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늘 생각할 것입니다. “Life stinks(인생은 별 볼일 없지).” 그들은 삶을 두려움의 눈으로 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두려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두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생각합니다. “Life stinks(인생은 별 볼일 없지).”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어떻게 인생을 바라볼까요? 그들은 삶을 멋진 포도주로 보게 되지 않을까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삶은 냄새가 납니다. 살면 살수록 썩어지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삶은 더 이상 썩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고귀해 집니다. 신선해 집니다. 마치 포도주가 오래 되면 될수록 좋아 지듯이 말입니다. 이들은 늘 신선해지기에 마음껏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껏 이웃에게 고난을 받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목회자들에게 감히 “고난을 받자”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담대하게 말씀하는 것을 보아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있는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강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히 “고난을 받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디모데의 신앙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오늘 말씀 3, 4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보고 있는 디모데의 신앙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매료되어 있는 듯 합니다. 구체적으로 소개된 모습은 젊은 친구가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도바울이 그토록 보고 싶고 또 보면 기쁨이 가득차게 될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서 디모데에게는 번쩍거리는 신앙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바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모습은 디모데의 눈물이었습니다. 하여튼 디모데는 눈물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빛이 나고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빛나는 신앙의 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디모데가 왜 그렇게 위대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이어 받은 신앙은 디모데 안에서 멋지게 꽃피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신앙은 어느덧 사도바울을 매료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느덧 삶은 멋진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삶은 멋진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웃습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아니 모든 것이 노래로 들려옵니다. 사도바울이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는데 도리어 그 말씀 자체 안에서 놀라운 멜로디를 느낍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아무 거리낌 없이 디모데에게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는 이 말씀 안에서도 놀라운 멜로디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신앙인 얼마나 멋있습니까? 어떠한 말에도 멜로디를 느끼는 삶.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웃이 전화를 걸어서 무슨 말할 것이 있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을 들어도 멜로디로 변하여서 귓전을 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 누구나 다 소유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한번 질문해 볼만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려면 정말 3대를 거쳐야만 할까요?

앤절리스 애린(Angeles Arrien)이라는 인류문화학자는 삼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은연중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 얼굴이 있다고 합니다. 아동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 이렇게 네 가지 얼굴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 더해서 본질적인 얼굴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얼굴이 무엇일까요? 잠시 후 설명해 드리기로 하고, 먼저 네 가지 얼굴을 하나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동기의 얼굴은 천진한 경탄과 외경심, 호기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 주변의 어린아이들의 얼굴에 우리가 이런 것을 맛보지 않습니까? 다음 청년기의 얼굴은 소년 소녀의 모습에서 느끼는 얼굴입니다. 창조의 불과 모험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성적 관심에 호감을 느낍니다. 또한 성년기의 얼굴은 인생의 경험을 쌓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 얼굴에는 믿음과 책임감을 아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른이 안 되었어도 일찍부터 사회에 나가 일을 한 소년 소녀들은 이미 이런 얼굴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노년기의 얼굴은, 시간이 새겨놓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한 강인함과 부드러움, 신비롭고 짜임새 있는 지혜의 미묘함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저희 상록회원들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얼굴입니다.

이것이 네 개의 얼굴입니다. 이 네 얼굴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줄 압니다. 끝으로 본질적인 얼굴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질적인 얼굴을 소유한 사람이 있고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본질적인 얼굴을 소유한 사람은 이 네 가지 얼굴을 다 동시에 소유합니다. 본질적인 얼굴이라고 해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앤절리스 애린의 주장입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본질적인 얼굴의 소유자는 네 얼굴을 소유하였기에 때로는 천진난만한 아동기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때로는 청년기의 모험심에 가득 찬 모습이 보여집니다. 때로는 성년기의 믿음과 책임감으로 가득 찬 모습을 갖습니다. 때로는 노년기의 강인함과 부드러움 신비롭고 짜임새 있는 지혜의 미묘함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네 얼굴을 소유한 분이 바로 본질적 얼굴을 소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곧 본질적인 얼굴을 소유한 사람은 바로 처음 말씀드린 인생을 멋진 포도주로 맛보는 사람일줄 압니다. 그에게는 이 네 가지 얼굴이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하며 나타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삶에서 멋진 포도주를 맛봅니다.

반면 이 본질적 얼굴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한 가지 모습에만 고착되어 버려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시간에 사분지 일만 만족스럽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분지 일에만 만족스럽습니다. 나머지 사분의 삼은 ‘life stinks.’

본질적인 얼굴을 소유하였기에 멋진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피터팬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이제는 피터팬 고속버스까지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재미있는 피터팬을 그냥 짓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작가 제임스 베리(James Barrie)의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작가의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우울증에 걸려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매일 어머니 방에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늘 어머니를 위하여 이야기를 만들던 제임스는 결국은 피터팬을 짓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제임스는 소년의 세계와 성인의 세계를 오고 가다가 자신 안에 있는 본질적 자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포도주로 맛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에도 네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아동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 이 네 가지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본질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멋진 포도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어떠한 말을 들어도 노래로 듣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본질적인 신앙이 있는 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디모데는 천진한 경탄과 외경심 , 호기심을 지닌 어린 아이의 모습을 소유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창조의 불과 모험심에 사로잡혀 있는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책임감이 투철한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강인함과 부드러움, 신비롭고 짜임새 있는 지혜의 미묘함을 한데 누리는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멋진 포도주였습니다. 자신의 귀에 들려 오는 소리는 모두 멜로디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인이 된 것은 그는 세대를 넘는 신앙의 만남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대를 넘는 신앙의 만남이 있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본질적인 신앙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들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삼 대째 신앙인이 아닌 가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에 대한 답변은 너무 간단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삼세대가 함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가정 안에 삼세대가 주님을 같이 섬긴다면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삼 세대 크리스챤 가정이 아닌 가정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선택권이 하나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삼세대의 신앙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저희가 두 달에 한번 쉐마의 밤을 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을 택하는 분들에게는 본질적인 신앙인의 축복이 내려질 것입니다. 삶을 멋진 포도주로 맛보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아동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 여러분은 이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속하십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신앙인이 되려면 어느 단계에 속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본질적인 신앙인이 되는데 필요하지 않는 단계가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 이 네 단계를 모두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청년이십니까? 아동기에 속한 분들 곧 어린이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아울러 성년기의 어른들 또한 노년기의 분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년이십니까? 어린이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청년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상록회 회원 분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구약학 교수님께서 주일학교 교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이야기였습니다. 신학교 교수님이면 어른들을 가르치던가 이교회 저교회 다니시면서 컨설팅을 하셔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통념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훌륭한 교수님이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책도 발간하면서 연구 활동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세대를 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녀들과의 경험도 부족해서 교회에 와서 아동기에 있는 신앙인들을 만난 것입니다.

또 한 분 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님이신데 이 분은 아주 정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 분은 천재적 재능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26살에 듀크 대학(Duke Univ.)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눈에서 늘 빛이 났습니다. 저는 천재이기 때문에 눈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학생들을 좋아 합니다. 여러분의 눈빛을 좋아 합니다.” 어느 시간은 다른 교수님과 함께 가르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끝났는데도 이 교수님은 계속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참다못한 다른 교수님은 자리를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교수님의 눈에서는 비슷한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한분만 더 소개해 드릴까요? 케서린 체스토(Kathleen Chesto)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분이 손녀와 지내면서 느낀 것을 글로 모아 책으로 펴내셨습니다. 그녀는 손녀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으로 느끼곤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마루에 앉아 손녀와 함께 놀고 있으면 나의 가슴은 하나의 동터 오르는 태양을 느끼곤 한다. 시간 시간 바뀌워지는 찬란함에 매료되곤 한다. 새로운 멜로디에 가슴은 벅차오르곤 한다. 때로는 이 아이로 인해서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잊어버릴까 두려움마저 생기곤 한다.”

이 할머니는 손녀로 인해서 본질적 삶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손녀도 같은 축복을 누리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늘 네 가지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본질적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세대를 넘는 만남을 하여야 합니다. 세대를 넘는 만남이 있는 자들은 삶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도리어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신앙인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청년기에 속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동기와 성년기와 노년기 분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성년기에 속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동기와 청년기와 노년기 분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노년기에 속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동기와 청년기와 성년기 분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서로를 위한 선물이 되십시다. 그 때 우리 모두는 멋진 포도주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서로를 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삼 세대 간의 만남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메이 사턴(May Sarton)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특히 노년의 삶을 주제로 책들을 펴내곤 한 분입니다. 어느 대학의 시 낭송 강연에서 그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제 인생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드는 것이 아주 좋답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나이 드는 게 왜 좋지요?”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본연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의 갈등도 적지요. 지금 저는 더 행복하고, 더 조화롭고, 더 강인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고백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기 위하여 상록회원이 빨리 안 되어도 됩니다. 여러분이 상록 회원분들을 만난다면 그 분들의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삼 세대를 넘는 만남의 삶 안에 이러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