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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흙이니…

날짜 : 2008.06.0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너는 흙이니…
성경본문 : 창세기 3장 6-21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80601.wmv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였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유명해졌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좋은 배우자만 찾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더 많은 친구만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더 매력적이기만 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몸에 단점이 없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죽지만 않았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오해하게 될 줄 압니다. 이 이야기는 원주민들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 글의 제목을 알면 이 글의 참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이 글의 제목은 ‘여덟 가지 유혹’입니다. 제목이 ‘여덟 가지 유혹’이라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자였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유명해졌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좋은 배우자만 찾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더 많은 친구만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더 매력적이기만 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몸에 단점이 없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죽지만 않았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여덟 가지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글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 보기에는 이 여덟 가지 유혹이 자기들을 참 행복에서 멀게 하는 망상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곧 이 들이 삶에서 깨달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참 행복은 이웃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위 환경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여덟 가지 유혹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 유혹은 여덟 가지 노래가 되어서 인간들 마음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도리어 더 큰 불행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노래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은 잘 아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숨어 있는데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모른척하시고 물으십니다. 아담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지금 하나님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yes’또는 ‘no’를 물으셨습니다. “네가 먹었느냐?” 여기에 대해 ‘yes’ 또는 ‘no’로 대답하면 되는데, 대신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입니다.

지금 아담은 감히 첫 번째 책임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그리고 두 번째 책임은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이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는 일은 이미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브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브가 대답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남에게 그 핑계를 대는 것을 보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와서 그런지 똑같이 남에게 그 이유를 전가시킵니다. 그런데 이 들이 남에게 이유를 똑 같이 전가시키는 것은 같은 몸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둘 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한다고 착각하게 하는 과일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구분한다고 착각하는 과일을 먹었기에 둘 다 남에게 자신의 악을 전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형적인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이웃에게 악을 전가시키는 모습을 보시고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확인 하신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먼저 뱀에게는 땅을 기어다니며 흙을 먹어야 한다는 심판을 내립니다.

아담과 이브는 뱀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는 뱀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뱀 때문에 이브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뱀이 가장 큰 죄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뱀이 죄의 시작이었으니 뱀보다는 작은 벌을 내리시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두렵긴 하지만 조금은 안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아마 이 말씀을 듣고 이브는 어리벙벙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큰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토록 좋았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무언가 불협화음이 생길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은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이기 때문입니다. 곧 가정 안에 고통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뱀에게 주어진 형벌보다 더 큰 형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죄의 시작인 뱀보다 경한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브는 당황합니다. 아담도 생각보다 심상치 않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느끼며 초조히 자기 차례를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그런데 예상보다는 괜찮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음식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밭을 갈아 채소를 가꾸어야 되었습니다. 이제는 밭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한 가지 일이 더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브가 겪어야 할 형벌에 비해선 괜찮습니다. 역시 자기의 죄는 뱀이나 이브보다는 경한 것 같습니다. 조금 마음을 놓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와! 올 것이 왔습니다. 가장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아담은 자기의 진 죄가 제일 작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자기에게 최고의 형벌을 선고하십니다. 물론 이 형벌은 이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지만….

사실 자기가 지은 죄가 뱀이나 이브보다 경하다고 생각하나마나 입니다. 죽음 앞에서 형벌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 조금 고생하나 많이 고생하나 결국은 죽게 될텐데 누가 더 큰 벌을 받느냐는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은 죽음 앞에 선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 댓가는 죽음입니다. 후회가 앞섭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하나 마나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 선 아담은 많은 생각 중에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요?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죽음 앞에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내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는 그 누구나 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도 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당연히 남은 삶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연의 삶을 살고픈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아담은 죄를 짓기 전 자신의 참 모습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죄짓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실 아담은 노래하는 자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창세기 2:19절에 보면 노래하는 아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아담에게 가져 오면 아담은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은 노래하는 자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아담의 시와 노래는 이브를 만났을 때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은 이처럼 노래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변한 것입니다. 원망하는 자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언젠가 흙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아담은 자신의 남은 생을 원망하는 자로 남을 비난하는 자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자가 되려고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 상처를 준 죄는 그를 이미 원망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는 원이지만 늘 노래보다는 원망이 먼저 튀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느꼈을 것입니다. 노래하기를 원하지만 원망이 튀어 나오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하나님은 친히 가죽옷을 해 입힙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해 입혔다는 것은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가죽옷을 해 입히려면 동물의 피를 흘렸어야 합니다. 이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피흘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곧 가죽 옷에는 죄사함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가죽옷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합니다. 아담에게 새로운 시작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노래하는 시인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 후로 새롭게 노래하는 자가 됩니다. 이브의 해산의 고통을 보면서, 자신이 밭을 갈 때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면서 그는 새롭게 노래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물론 그 때 그 때마다는 숨어 있던 원망의 마음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 때 그 때 마다 잘 잘못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자신이 입고 있는 가죽옷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시 노래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소개된 아담과 이브의 고통은 우리들 관점에서 보면 좀 사치해 보입니다. 아니 달리 표현해서 우리들 기준에 살펴보면 별로 힘든 삶은 아닙니다. 그들은 가정 문제와 일할 때 땀 흘리는 문제 정도입니다. 아담은 이웃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요즘 겪고 있는 문제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입니다

우리들이 요즘 겪고 있는 일을 우화식으로 잘 표현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조용한 곳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는 기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샘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샘에 와서 물을 마시곤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시다가 지갑을 떨어뜨렸습니다. 다음 사람이 물을 마시러 왔다가 지갑을 보았습니다. 물 마시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지갑을 갖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왔습니다. 물을 마시고는 샘 옆에서 쉬려고 기분 좋게 누었습니다. 그 때 처음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지갑을 찾으러 왔습니다. 누어있는 사람을 보고는 지갑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아닌 밤에 홍두깨인 격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물을 마신 후 쉬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막무가내입니다. 자기의 돈을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서로 옥신각신 다투다가 그만 죄없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모세가 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 어찌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돈을 훔친 사람은 딴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이 죽었어야 합니까?” 이에 하나님께서 답변하십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돈은 그의 아버지가 훔친 돈이야. 그리고 그 때 지갑을 주운 사람은 바로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또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오래 전에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의 형을 죽인 사람이지, 결국 내가 아우를 시켜 그 원수를 갚게 한거야.”

모세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물론 탈무드에 나오는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에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모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 때 이 이야기의 주인공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정말 이 세상은 어처구니없는 곳이라는 생각에 깊게 젖을 것입니다. 몰래 지갑을 갖고 내뺀 사람을 원망할 것이고 미련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을 원망할 것이고 끝으로는 애매하게 죽은 사람만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살 곳이 못되는구나.” 사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교우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담과 이브가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고통과 모순의 세상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고작 칼로 물베기의 가정문제와 일할 때 땀을 흘리는 정도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관계의 복잡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사는 세상은 모세의 눈에 비친 세상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채 아니 사건의 전모를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본 것만 가지고 선과 악을 구분하고 이에 괴로워하고 분통해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유혹의 노래에 빠질 수 밖에 없을 줄 압니다. 마지막 여덟 번 째 유혹의 노래 기억나십니까?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교우 여러분, 죽음 앞에 서십시다. 죽음 앞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살려고 하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아니 우리가 구분하는 선과 악이 맞기만 한다면 그래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고도 짧은 인생경험과 지식으로는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죽음 앞에 바로 서는 자들은 참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 앞에 바로 서십시다. 그 때 우리는 참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노래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가죽옷을 입은 아담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노래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서로를 향하여 아름다운 시인이라는 노래를 불러야 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담이 시인이었다면 그의 후손은 모두 아름다운 시인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노래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향하여 아름다운 시인이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 매일 불러야 하는 노래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시인입니다. 당신 안에는 놀라운 시가 매일 탄생됩니다.”

김용택 시인이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시집을 펴냈습니다. 자신이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모아서 시집을 펴낸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목을 아주 잘 붙였습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 그는 시집을 펴내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마음이 활짝 개던 수많은 시인들의 시집과 시들.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기가 바쁘게 뛰는 가슴을 달래며 책방으로 달려가던 날들이 그 얼마였던가.”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시인을 사랑했고 시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이것이 아담의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 오늘날 이웃을 보는 우리 크리스챤들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웃을 시인으로 보며 가슴 설레이는 모습, 이러한 모습을 보는 우리들의 이웃은 진정 아담을 닮은 시인이 되어 가지 않겠습니까?

탈무드의 모세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세는 처음 자기 눈앞에서 진행되는 일을 보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 나쁜 사람인가? 결국 모세는 검사와 판사가 되어서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전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보는 것도 매한 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웃을 죽인 사람에게까지, 돈을 훔치고 내빼는 사람에게까지, 이유도 없이 희생되는 사람에게까지 “당신은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노래하는 아담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참된 우리의 모습을 되찾읍시다. 노래하는 시인이 되십시다. 우리 노래의 가사는 하나입니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물론 때로는 그 고백이 쉽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하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함께 죽어 가는 강도를 위해서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이제는 아직도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애써 구분하려고 고생하면서 사는 우리를 향하여 부르십니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는데 우리는 당연히 서로서로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자리에 들게 전 그 날 만난 다섯 분을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특히 마음에 원망이 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릅시다.

사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 불렀던 노래 너무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더욱 소중합니다. 죄를 지은 후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안고 이웃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는 훨씬 위대한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망 대신에 위대한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는 아담의 노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대한 노래입니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해인 수녀를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녀가 꽃시집을 발간했습니다. 제목은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입니다. 당신이 만난 꽃 하나하나를 소재로 시를 쓴 것입니다. 진달래, 냉이꽃, 맨드라미, 장미꽃, 할미꽃, 호박꽃 등등…. 호박꽃의 일부를 소개해 드릴까요?

“아이를 많이 나아 키워서

더욱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엄마 같은 꽃

(중략)

사랑의 꽃 가득 담고

어디든지 뻗어가는

노오란 평화여

순하디 순한 용서의 눈빛이여”

저는 이 시집을 읽고 느낀바가 많습니다. 모든 꽃 하나하나를 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선 얼마나 놀라운 시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적인 시의 제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도 시집을 발간하십시다. 시집 제목은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라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우리들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당신은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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