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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안에 계신 이

날짜 : 2008.04.1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공간 안에 계신 이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21: 9-27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4-13-2008.wmv

이번 한국을 방문중에 책방에 여러 차례 들려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책방을 들렸었는데 책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꿈꾸는 다락방.’ 귀가 길에 지하철에서 그 책에 쏙 빠져 버렸습니다. 주된 내용은 우리들의 꿈은 실현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생생하게 꿈꾸고 글로 적으면 현실이 된다’는 고대에서부터 전해 내려 오는 말을 서문에서 소개합니다. 그리고는 꿈을 꾸고 글로 적어서 현실이 된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 중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1912년 Titan의 침몰에 대해서 잘 아실줄 압니다. 몇 년 전 영화로도 나와서 그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Titan호가 침몰하기 전 14년 전에 모건 로버트슨이라는 작가가 ‘타이탄 호의 침몰 혹은 부질 없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와 실제 일어 났던 이야기가 너무나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침몰한 달, 승객과 승무원 수, 구명보트의 수, 전체 길이와 배수량, 빙산 충돌 당시의 속력들이 완전히 같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라 생각하기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하나를 더 소개해 드릴까요. 애드가 알랜 포우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1837년 ‘아서 고든 빔의 이야기’라는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내용은 좀 끔찍한데, 사실 애드가 알랜 포우의 작품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인공을 포함한 네 명의 선원이 조난당해 바다를 떠돌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제비뽑기로 한 사람을 정합니다. 그 사람이 친구들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희생된 선원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이 소설이 쓰여진 후 7년 후입니다. 영국법원은 영국사회를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은 희대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남자 세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세 사람의 혐의는, 난파당해 바다를 떠돌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제비뽑기로 동료를 끔찍하게 살해해서 먹어치운 것이었습니다. 희생된 사람의 이름은 놀랍게도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물론 우연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기가 막힐 정도로 사건이 전개되었습니다.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인간이 무엇인가 깊게 공상하고 꿈꿀 때 그것은 이루워지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소설가들이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광기를 가지고 글을 쓸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의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꿈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꿈꾸는 인간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면 위험한지 새롭게 느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어릴 때 꾸었던 꿈은 아니 공상은 어떤 것들이 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많은 공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약 30분이 걸렸습니다. 오고 가는 길 합해서 1시간이 걸렸는데 한 시간 내내 공상하면서 걸어 다녔습니다. 그 중에 제가 어릴 때 즐겨하던 공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53년도에 태어났는데 곧 6.25가 막 끝날 때 태어납니다. 저는 한국이 가장 어려운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학교를 오고 가면서 즐겨 공상했던 것이 있는데 과자집입니다. 제가 사는 집이 과자로 가득찬 집이라는 공상을 하면서 걸어 다니곤 한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과자가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지금 과자집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꿈이 빗나갔나요?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꿈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꾸는 꿈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공상입니다. 이러한 공상은 세상을 가꾸는 힘이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꿈은 세상 역사에서 이루워지는 꿈입니다. 소설가들이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운데 쓴 글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에 영향을 미쳤듯이, 이러한 현실 세계 안에서 미래를 보는 듯한 꿈을 꾸는 자들의 꿈은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언젠간 이루워집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언젠가 이루어질 승리의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 계시록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고의 꿈을 소유하게 하는 책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 반드시 이루워질 일을 꿈꾸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꿈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들이 언젠가 들어갈 새 예루살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요한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눈 앞에 생전 보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했던 장관이 펼쳐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11절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정말 장관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색다른 것이 눈에 띄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열두 문이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두 지파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의 이름이 예루살렘 성 문위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열두 지파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열두 문에 기록된 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름들이 눈에 띄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열 두 기초석에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두 기초석에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열 두 제자들도 자기들의 이름이 예루살렘성 기초석에 기록된 것을 보고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신의 이름을 직접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9절, 20절 말씀입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자기들의 이름이 기록된 기초석은 듣도 보도 못했던, 가져 보지도 못했던 각양 각색의 진귀한 보석들이었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쓰여진 기초석의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고 또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열두제자들의 이름이 쓰여진 기초석은 반석이었는데 열두지파들의 이름이 기록된 문들은 무엇이었을까요? 21절 말씀입니다.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놀라운 사실은 문마다 한 진주라는 것입니다. 문을 여러개의 진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진주를 깎아서 만든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부자도 그런 문을 소유한 사람은 없을줄 압니다. 아마 문을 여러 진주로 만든 부자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 두 지파들의 이름이 기록된 문은 한 진주를 깎아서 만든 문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건축물입니다. 각양 보석이 기초석을 이루고 한 진주로 된 문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상상할수 없는 건축물입니다.

지금 이 성의 모습을 보고 있는 요한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자기의 눈 앞에는 엄청난 건축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황공스럽게도 자기의 이름이 이 성의 기초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요한은 정신을 잃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참만에 요한은 정신을 가다듬었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요한은 혼자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열두 사도들의 이름과 열두 지파들의 이름이 기초석과 문에 기록이 되었을까? 쉽게 요한은 그 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12지파는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의 삶을 상징합니다. 12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들의 말씀을 따라서 삶을 바친 모든 성도들의 삶을 상징합니다. 곧 모든 성도들의 삶이 하나가 되어서 멋진 성을 만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엄청난 건축물이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삶이 이런 엄청난 건축물이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호기심이 더 생깁니다. “이처럼 엄청난 건축물 안에 무엇이 있을까? 바깥이 이렇게 찬란한데 안은 더 없이 찬란하지 않을까?” 요한은 아마 궁금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22절 말씀입니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왜 그렇게 엄청난 건축물이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성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이 계셨습니다. 성 안에 성전이 있는데 요한은 이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건축물 안에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들의 영광이 가득찼던 것입니다. 진주와 보석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가득찼던 것입니다. 23절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런데 그 성은 단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성이 아닙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 오겠고.”

이 위대한 건축물 안으로 만민들이 만국의 영광을 안고 들어 오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장면을 사도요한이 높은 산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장면을 본 요한은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당연히 그는 자신의 삶은 언젠가 예루살렘성의 기초석이 된다는 꿈을 안고 최고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의 기초석이 되는 것이 그의 현실이자 꿈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땅 위에서 이 꿈을 안고 멋지게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삶이 하나님이 거하실 최고의 성을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민이 그 안으로 들어 오는 성을 짓는 것입니다. 자기의 수고와 땀이 하나님께서 계실 귀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삶은 어떤 삶인가요? 건축가의 꿈은 열두제자들만의 것인가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는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택함받은 자들은 예루살렘성의 건축가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성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열 두 지파가 열 두 문을, 열 두 사도가 열 두 기초석이 되었다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그 이외의 부분을 맡게 되지 않을까요? 문과 기초석 말고도 많은 부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늘 우리 안에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라는 예루살렘 성 안에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언젠가 예루살렘 성에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이라는 공간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현실이요, 우리들의 꿈입니다. 이 꿈을 안고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꿈은 이루워질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육관 기공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오늘 기공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이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꿈을 현실 속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건축을 하는 것만이 하늘 나라의 건축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모든 삶이 실제로는 예루살렘성의 건축과 직접 연관이 됩니다. 무엇을 하던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던 하나님의 성을 건축하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특별한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예루살렘성을 짓는 것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만들어 놓은 공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편 교육관 건축도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공간 안에서 멋진 역사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 볼것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 만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맛 볼 것입니다. 곧 우리는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가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자들이 될 것이지만 이 땅 위에서도 ECC라는 공간을 창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ECC건축은 두가지 공간을 창조하는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자녀들과 이웃들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 창조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성의 공간이 동시에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에 우리가 초대되어졌습니다.

호퍼(Hopper)라는 화가가 있는데 특히 ‘빈 방’을 많이 그린 분입니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마크 스탠드(Mark Strand)라는 시인이 “빈 방의 빛”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사실 호퍼가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빈 방의 빛”입니다. 그 그림은 제목 그래로 빈 방에 빛이 들어 오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공간’의 무한성을 느낍니다. 공간이 얼마나 소중함을 느낍니다. 호퍼는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화가인것 같습니다. 그가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화가라면 우리 크리스챤은,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건축가들입니다. 아니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위해 공간을 건축하는 자들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이웃을 위하여 공간을 창조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귀한 일에 우리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꿈을 꾸십시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꿈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빈 방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빈 방에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만드는 빈 방에 십자가의 주님은 찾아 오시길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빈 방을 건축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이러한 꿈의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 난번 한국을 방문해서 줄곧 아버님 집에 머물렀습니다. 아버님이 현재 씨니어즈 타워에서 사시는데, 저처럼 손님들을 위한 컴퓨터실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메일 체크도 할겸 컴퓨터실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컴퓨터가 좀 늦게 동작하기에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전에 눈에 안 띄던 것이 보였습니다. 탁자와 함께 소파 세트(sofa set)가 보였습니다. 물론 늘 있었던 것인데 급히 들어 왔다가 또 급히 나가곤 했기에 sofa set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소파가 있었구나” 하면서 가 앉았습니다. 앉아서 창 밖을 보니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띄었습니다. 순간 바쁜 마음이 녹아지더니 sofa set가 제공해 주고 있는 공간이 너무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공간의 소중함을 느끼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짧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님을 비롯 씨니어즈 타워에 사는 모든 노인분들을 축복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덧 그 공간은 기도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공간의 소중함을 누리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공간을 만든 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도 바로 그런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가들이 되었습니다. 일년간 아름다운 꿈을 꾸십시다. 꿈을 소유한 건축가의 삶을 살아 가십시다. 우리들의 꿈은 이루워질 것입니다.

물론 꿈을 가지고 사는 그 길은 평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꿈은 언젠가 이루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꿈을 뒤흔드는 상황이 벌러질 때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는 길을 계속 가시십시다. 그 때마다 성령은 우리에게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도요한과 함께 우리가 짓고 있는 아름다운 성을 바라보십시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 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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