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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눈물

날짜 : 2008.03.2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베드로의 눈물
성경본문 : 요한복음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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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3월 23일) 설교:

어느 마을에 두 개구장이 형제가 살았습니다. 8살과 10살 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찌나 개구쟁이들 이었는지 마을에서 무슨 나쁜 일만 생기면 늘 이 두 아이들이 한 짓으로 판명이 나곤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장난기 어린 짓을 그만두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 부모님은 신부님께 아이들을 부탁하기로 하였습니다. 신부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흔쾌히 승낙하고는 먼저 동생을 만나겠다고 말씀합니다. 신부님은 동생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첫 5분간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만 빤히 바라봅니다. 드디어 신부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르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소년은 두리번 두리번 거립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로 묻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또 다시 소년은 두리번 거리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이번에는 더 큰 목소리로 손가락을 소년의 코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소년은 겁이 나서 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형을 보자 형을 이층 방으로 데려 갑니다. 이층 다락방으로 숨습니다. 항상 일을 저지르면 숨는 곳입니다. 형에게 말합니다.

“형, 우리 큰일 났어.(We are in BBBig trouble.)”

“아니 뭐가 큰일이 난거야.”

“하나님이 없어졌데, 그런데 우리가 그 짓을 한 줄 알아.”

부활절마다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독일 루터란 교회 목사님들은 부활절 설교를 조크로 시작합니다. 부활절은 웃음을 자아내는 사건이기에 그렇게 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데 너무 엄숙한 종교로 바뀌어 있어서 부활절만이라도 웃고 시작하자는 뜻에서 부활절만큼은 조크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조크는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좀 아까운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삶에 한편으로는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소년의 생각은 이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없어질 수도 있으신 분, 한 개구장이가 없앨 수도 있으신 분….’ 물론 신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런데 소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지만 이 소년의 말을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 소년의 이야기에 우리 모두 웃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우리도 이 소년의 생각에 동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마지막 소년의 말을 읽으면서 왠지 통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하지 못하는 생각을, 아니 우리들의 무의식에 꼭꼭 숨겨 놓은 생각을 이 소년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아니 목사님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계신 분’이라고 말씀하지만,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가두어질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의해서 인간 세상에서 쫒겨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듯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오늘 부활절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고백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의 조크의 주인공인 이 소년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부활의 주님 없이 잘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일 년에 한번만 부활의 주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머리속에만 계신 분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부활의 주님을 가두어 놓고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매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매일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믿었고, 또한 만났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또’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실 14절에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벌써 세 번 째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세 번 째 나타나신다 생각하시고 현장을 방문해 보십시다. 2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

저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일곱 명의 제자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벌써 두 번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두 번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로 부활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일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좀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데 이 제자들은 실제로 이미 두 번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3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부활의 주님을 두 번 씩이나 만났던 일곱 명의 제자들이 우두커니 실업자들처럼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중에 늘 Pacemaker(평화를 만드는 사람)노릇을 하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나섭니다. 정신 빠진 친구입니다. 계속해서 봉독해 드리면,

“앉았다가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아니나 다를까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정말 답답한 친구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자들이 또 고기잡으러 나왔으니 고기가 잡힐리가 있겠습니까? 하여튼 밤새도록 헛수고를 하였습니다. 헛수고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4절 말씀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로 시작됩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벌써 새벽이 되었습니다. 날이 샐 때까지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

그러나 그 바닷가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사실 밤새도록 지친 제자들이 사람을 알아 볼 리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사람들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교우분들 중에도 밤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밤새껏 한 마리도 못 잡았으면 새벽에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이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

주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비몽 사몽 간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시다.” 그 때 베드로가 정신이 들었는지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두 번 만났고 세 번 째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처음 만나는 양 바다로 뛰어 내립니까?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처음 만나는 것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두 번 씩이나 만났고, 두 번 만났지만 할일이 없이 지내다가 또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왔는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주위사람들을 놀래키는 행위를 할까요?

자 , 여러분이 수사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시다. 범인이 엉뚱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수사를 펼쳐 가겠습니까? 제일 먼저 첫 두 번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살펴 보아야 될 줄 압니다. 아마도 그 장면을 살펴보면 실마리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전 장인 요한복음20장 19절과 26절을 보면 이들이 어디에서 주님을 만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 번 다 집에서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만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배드리다가 만났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첫 두 번의 만남은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 집에서 만났을 때는 베드로는 맹숭맹숭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감격하긴 했어도 삶이 변할 정도로 감격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만난 감격은 있지만 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어부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면 세 번 째 현장은 어떤 현장입니까? 집이 아닙니다. 종교적 예식의 현장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입니다. 어부로 돌아갔을 때 곧 삶의 현장에서 참 만남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인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자, 한 가지 실마리는 잡힌 것 같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그 때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좀 부족합니다. 좀 더 수사를 해보아야겠습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엉뚱한 짓을 한 이유를 알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면 그의 과거의 삶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고기잡이와 관계된 과거의 삶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고기잡이와 관계된 과거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오늘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옵니다. 곧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후 말씀을 가르치시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랬더니 고기를 왕창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에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이 처음으로 베드로가 청년 예수를 만났던 장면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와 지금 부활 후 세 번 째 만났을 때의 사건은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연애를 해 보신 분 모두 첫 번째 만난 날을 잘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베드로도 매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 째 만난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꿈쩍도 안합니다. 답답해진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 만난 그 곳을 선택합니다. 연예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서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이 창경원에서 첫 데이트를 했다고 가정하십시다. 다음에 창경원 옆을 홀로 지나게 되면 당연히 첫 데이트가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부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셨습니다. 첫 데이트가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고기잡이로 돌아 간 제자들을 짓꿋게 찾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멋쟁이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우리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입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던 곳에 나타나심을 통해서 말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해보자.”

베드로는 바로 이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 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다시 해보자”라는 주님의 메세지가 베드로로 감격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한결같이 ‘실패자’라는 자화상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게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 깊게 스며들어있는 자화상, ‘실패자’라는 자화상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자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어부로 돌아 간 것입니다. 특히 지금 고기가 안 잡히는 이 깜깜한 밤에 베드로는 더욱 실패자의 좌절 가운데 빠져 들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도 실패하였는데 이제는 고기잡이까지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아무 쓸모없는 자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최근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 안하겠다고 장담하고서는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울었었습니다. 베드로는 밤이 깊어가면서 자기가 세 번 부인하였던 생각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자신의 3년간의 삶을 총정리 한다면 한 가지 단어면 족하였습니다. ‘실패자.’ 어느덧 실패자 베드로의 뺨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벌써 밤을 꼬박 새우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느덧 통곡할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고기는 하나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머리에는 두 가지 사건이 왔다갔다 합니다. 물고기가 안 잡히니 처음 불리움을 받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또한 새벽이 가까오니 통곡의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3년 전 일이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3년 전에는 예수님이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어느 분이 나타나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대로 하였더니 3년 전처럼 고기가 왕창 잡혔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는 일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주시다” 말합니다. 정신없이 있던 베드로는 “주시다”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새로이 만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메세지를 받는듯합니다. “우리 다시 해보자.” 예수님은 아마 베드로의 눈물을 닦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또 다른 멋진 제스쳐를 취합니다. 예수님은 조반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마련한 조반을 먹으며 주님의 메세지를 다시 듣습니다. “다시 해보자.” 조반을 먹으면서 베드로는 이제는 환하게 웃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실패자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그것도 처음 자기를 부르실 때와 똑 같은 방법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아니 파안대소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농담도 하였을 겁니다. “주님, 고기는 이렇게 굽는 것이 아니예요. 주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으시군요.”

이제 농담까지 하는 베드로 실패자의 자화상을 등 뒤로 던져버린 베드로의 모습을 확인하시고는 주님은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두 번 세 번 묻습니다. 베드로는 조금은 초조해지지만 계속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째 만남을 통해서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참으로 만났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실패자를 찾고 계십니다.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들을 만나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실패자만이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모두는 실패자들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죄를 지은 실패자들입니다. 자신의 실패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오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매일 실패자의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납니다. 주님을 따라감에 실패했던 자화상을 안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어 날 때마다 주님은 그 새벽에 우리들의 삶의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다시 해보자.”

얼마 전 한 교우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부활주일이 사순절에 들어가느냐를 알고프다는 이메일이었습니다. 교우님께서는 이번 사순절에 무엇인가 작정하고 지키고 있는데 아무리 계산해 봐도 부활주일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부활주일은 자유롭게 즐기시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첫 주가 재의 수요일 곧 수요일부터 시작하는데 그 4일은 빼고 계산하지 않으셨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여튼 이처럼 많은 교우님들이 사순절을 뜻 깊게 지내시는 것을 보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셨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리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약속된 축복이 날라 갔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물론 어떤 축복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은 더 가까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의 실패한 삶의 현장에 실패한 삶의 바닷가에 우두커니 와 서 계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십시다.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해 보자.”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신문 일면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고 합니다. “시청청소부로 일하는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도시의 큰 손실입니다.” 이렇게 신문에서 이 분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분은 청소부의 일을 잘한 것뿐 아니라. 자기가 청소하는 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조사를 늘 챙긴 분입니다. 기쁜 일을 맞은 사람들에게는 축하의 카드를 늘 보내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카드를 보냈습니다. 그는 월요일마다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나오는 사람들의 불평을 기쁘게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문에서는 이 분의 죽음을 애도한 것입니다.

이 분의 모습에서 저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분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분이셨을 줄 압니다. 곧 주님을 만난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시청에서 일하는 사람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진다면 처음 소개한 이야기의 소년과 같은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졌데, 그런데 우리가 그 짓을 한 줄 알아.”

교우여러분, 실패한 우리들의 삶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우리의 모습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만나십시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다시 해 보자.”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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