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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눈물

날짜 : 2008.02.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아브라함의 눈물
성경본문 : 창세기 21장 8-21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2-10-2008.wmv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친구와 함께 좀 특이한 캠프에 참가했습니다. 남성을 남성답게 만드는 캠프였습니다. 어느 주말에 열렸습니다. 외딴 곳에 있는 군대막사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도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없는 안내인들이 목사님과 친구분을 안내했습니다. 먼저 가지고 온 소지품들을 검사했고 간식과 책과 손전등(flashlight)등을 압수했습니다. 그들에게 각자 번호가 주어졌습니다. 더 이상 이름은 없어지고 번호만 남았습니다. 서로 번호를 불러야 합니다. 그들은 눈을 가린 채 큰 방으로 이끌려 갔는데 그곳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늦게 온 이 두 분은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벌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늦게 온 행위는 많은 사람들, 곧 먼저 온 사람들을 경멸하는 행위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그 다음 날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눈을 뚫고 행진을 합니다. 이틀간 나무껍질과 딸기와 같은 산열매를 따먹습니다. 밤에는 달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점점 더 남자다워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어느 시간에는 연극을 합니다. 서로의 남성됨을 일깨워주는 연극입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는지 그 중에서 아버지 역할을 합니다. 한 참가자를 향하여 외칩니다. “아들아, 너의 남성됨을 되찾으라. 나는 네가 그것을 되찾기 원한다.”

어느 시간은 각자의 성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실패와 상처, 수치와 후회를 말합니다. 한 젊은이는 그 전 주에 간음을 한 것을 울면서 고백합니다. 또 한 사람은 부부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한 것을 고백합니다.

끝으로 오트버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표현을 합니다. “수십년 교회 생활을 했지만 나는 이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왜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죄의 고백이 이루워지지 않는가?” 남성을 남성되게 하는 비종교적인 모임에서 이들은 도리어 사순절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40일이 필요하지 않았고 단 3일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로 지킵니다. 이 40일 동안에 기도와 금식과 구제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 40일간 주님의 고난을 깊게 명상하며 우리의 죄를 참회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매해 이렇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40일이 지나도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나누었던 그와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나누지 못할까요? 어떤 분은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순절마다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회개도 하고요.” 이러한 고백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해당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래도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실 줄 압니다.

도날드 밀러(Donald Miller)라는 기독교 저술가가 있습니다. 그가 리드 컬리지(Reed College)를 청강하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리드 컬리지는 무신론자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학교로 정평이 나 있는 학교라고 합니다. 반면에 가장 지적 수준이 높은 학교로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서 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학교를 청강을 하려고 하니 어느 기독교인 친구가 와서 말렸다고 합니다. 아니 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사탄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학교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매해 연말이 되면 아주 문란한 페스티벌(festival)이 사흘간 열린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줍니다. 그 학교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강경하게 친구가 말립니다.

그래도 밀러씨는 청강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교수님 강의는 10% 밖에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도 그것이 좋았습니다. 무엇인가 최고의 지성의 울타리 안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 안에서 소수의 크리스챤을 발견합니다. 기도모임을 가지면 핍박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밀러씨는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도리어 생동감 넘치게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어디 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깊게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무시를 당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비종교적인 모임에서 사순절을 체험했습니다. 어느 기독교 저술가는 무신론자들의 학교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느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께 찬 물을 끼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실패하지 않고 잘 지키기로 결심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는 줄 아는데 여러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 두 이야기를 안 읽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순절 첫째주 설교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는 최근 저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그 현실을 간과하고 저 편한 대로 말씀을 전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2008년도 첫 번째 사순절 설교는 이 들의 이야기와 함께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상황에도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처한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할뿐더러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여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다투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아브라함의 가정은 복잡한 가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이 두 아들의 관계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의 가정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을 만국의 아비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첫 아이가 안 생깁니다. 그러면 누구 책임이죠? 당연히 이때는 의학이 발달이 안 되었을 때이니 아내 책임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많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어느 날 사라가 결단을 내립니다. 자기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게 합니다. 하갈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워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지 10년이 지난 때입니다. 하여튼 아브라함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려니 생각하고 하갈과 동침하여 잉태를 하게 합니다. 이에 첫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자기의 장자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극진히 사랑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자기의 희망이었습니다. 자기를 닮은 많은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기의 조상의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씩씩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흐믓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길 15년이 지났습니다. 곧 이스마엘이 15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시더니 이스마엘에 대한 희망을 꺾으십니다. 사라를 통한 아들이 참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본처에서 나 온 아들을 더 자기의 장손으로 삼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순종하여 기적적으로 아브라함이 100살 때 이삭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100세에 기적의 아들을 선물로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자라 아마 2-3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은 17살은 되었겠죠. 이제부터 오늘 본문 말씀내용이 시작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17살 난 자기 여종의 아들이 2-3살 난 자기의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참을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공처가 아브라함은 어쩔줄 몰라합니다. 아내가 무섭고 아울러 이스마엘이 너무 불쌍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

아브라함은 큰 근심에 빠집니다. 아브라함은 근심 가운데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응답을 주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라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수 없이 “I love you”를 외쳤던 아이를 어떻게 내 보낼수 있습니까? 이 아브라함의 고민을 아셨던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아브라함은 한 숨을 돌립니다. 이스마엘은 자기 집을 나서자마자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로 인해 두 큰 민족이 이루워질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이삭을 통한 민족이요 하나는 이스마엘을 통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앞으로 이스마엘을 통해 세워질 큰 민족이 보일까요? 할아버지가 되신 분들의 말씀을 들어 보면 손자 손녀는 귀엽기는 하지만 그러나 친 자식을 생각하는 것에는 반에 반도 못 미친다는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앞으로 이스마엘을 통해 이루워지는 큰 민족은 관심 밖입니다. 아브라함은 후회가 앞서기 시작합니다. 뒤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 밤에 아브라함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10년째 되는 해 사라의 권고를 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행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만국의 아비임을 온 세상에 빨리 알리고 싶었던 마음을 눈물 가운데 찾아내었을 것입니다. 곧 깊은 자신 안에 있는 숨은 교만을 느꼈을 것입니다. 만국의 아이? 이 숨어 있는 교만이 사라의 제안을 받았을 때 “이거다” 외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교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니 마치 아브라함은 평균치에도 못 미치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 누구도 그렇게 행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니 그래도 10년을 기다렸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을 못 낳는다고 아내를 구박하고 빨리 여종을 내어놓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10년간을 꾹 참고 기다렸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사라가 자기의 여종을 내어줄 때까지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른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최선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잘 못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너무 과대 평가하셨나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과대 평가하셨습니다. 10년을 겨우 기다릴 수 있는 사람에게 25년을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못 미쳤습니다. 10년만에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너무 과대평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미련하신 분인가요? 사람을 과대평가하시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과대평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시길 원했습니다. 25년의 기다림을 통하여 이루워지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그릇이 못 되는 것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릇대로만 축복하자니 너무 그 그릇이 작았습니다. 하나님은 모험을 하신 것입니다. 큰 그릇인냥 아브라함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혹시가 역시’라고 거기에 못 미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기대에 못미쳤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취소하셨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시려는 큰 민족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시고 마셨습니다. 25년이 채워진 후에 태어난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아브라함은 실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지나간 25년간의 자신의 모습을 밤새워 생각하면서 내린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는 묘한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셨습니다. 과대평가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값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피해자 이스마엘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눈물만 흘릴뿐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한 것처럼 우리도 실수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실수합니까? 첫번째로는 우리도 모두 은근한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근한 교만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대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것 보다 더 큰 것을 맡기셨습니다. 더 큰 것을 기대하십니다. 왜 과대평가하실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맞는 것을 주시기에는 너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분량보다 큰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시고야 맙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대평가하시기 때문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기까지는 피해자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깊은 딜레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해자는 이스마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14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아브라함은 자기의 실수로 인한 피해자를 보았습니다. 피해자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어서 내 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수 있는 것은 더 없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오래 갑니까? 가져 온 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피해자 하갈은 목 놓아 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과대평가한 결과입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그 다음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이삭처럼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아마 하갈은 이것도 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괜한 헛깨비가 나타났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를 익히 아셨던지,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

헛깨비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나온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

사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하여 보면 자라는 기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야기는 이스마엘에게만 나옵니다. 이삭의 성장기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기록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삭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하여 피해를 본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공평하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자가 아닌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삭에게보다 더 가까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당한 자들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 말씀드린 두가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오트버그(Ortberg)목사님은 세상 모임에서 사순절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도날드 밀러(Donald Miller)씨는 무신론자들이 가득찬 학교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지금도 우리가운데 벌어지고 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은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버린 자들을 찾아 가십니다. 그들과도 함께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더 가까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하갈과 이스마엘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한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번 윤경문 목사님 안수식을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그 중 윤 목사님의 친구분들도 오셨는데 감리교 목사님에 오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윤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장로교도 이렇게 은혜롭게 예배를 드릴수가 있군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만 실상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감리교도 우리처럼 은혜롭게 예배를 드린다는 말인가? 그래도 우리만큼은 못할걸….”

감리교와 장로교가 서로 피해자의 관계라고 볼수는 없지만 저는 이 대화를 통해 느낄수 있는 것은 피해자의 관계가 아닌데도 이 정도면 정말 피해자의 관계면 얼마나 무시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로 인해 생긴 피해자를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 단적으로 말해서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실수로 인한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가죽부대에 떡과 물을 채워 보냈습니다. 반면 우리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전혀 무감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선물을 자랑하면서 순수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전혀 이웃을 해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것이 최고임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더욱 곤궁으로 몰아갑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음은 여러분으로 인해 생긴 피해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만일 피해자가 없다고 생각한 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교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에는 너무 부족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분명히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물론 아직은 안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로 인한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분명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물은 첫째로 우리를 과대평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눈물입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세번째로는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로 인해 어쩔수 없이 피해를 받고 있는 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들을 도리어 경멸했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는 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눈물이 세번째 눈물이 아닐까요? 우리는 비록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쳐서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도리어 경멸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번 사순절 아브라함의 눈물을 안고 우리들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리들의 피해자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노라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피해자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계심을, 아니 더 가까이 계심을,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눈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눈물 가운데서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놀라운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순절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느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모든 교회는 성장 그래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 피해를 본 피해자들의 그라프는 갖고 있지 않다.” 연례보고서에는 늘 성장 그래프만 보고되지 않습니까? 각자의 개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의 그래프는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한 피해자의 그래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피해자는 가족일수가 있습니다. 이웃일수가 있습니다. 같은 교인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우리들의 피해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은 더욱 가깝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눈물을 소유한 자들은 그것을 보는 축복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의 눈물을 소유한 자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으로 인해 우리들의 삶은 어느덧 카오스(chaos-혼동의 세계)가 되어감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삶은 혼동의 삶이었습니다. 혼동의 삶의 싫다구요? 그것이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혼동 가운데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을 마칠 때도 혼동의 삶은 계속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모든 혼동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마음껏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만 모든 혼동의 수수께끼는 풀릴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정말로 우리들의 모습은 혼동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사랑의 자녀입니다. 한편으로는 피해자를 내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아브라함의 눈물을 흘리는 우리에게 다음 이야기는 큰 위로를 줍니다.

어느 임금님이 부하들과 함께 토끼 사냥을 나갔습니다. 토끼는 열심히 도망가지만 점점 사냥꾼들이 가까이 옵니다. 토끼는 뒤를 돌아 임금님 품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임금님은 토끼를 안았습니다. 더 이상 사냥놀이는 끝이 났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을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 가십시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을 위한 약속도 또한 우리들로 인한 피해자들도 우리는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눈물을 흘리며 토끼처럼 아니 아기처럼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뿐입니다. 그 품은 아버지의 품입니다. 그 품은 아버지의 품입니다. 그 품은, 어느 영성가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품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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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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