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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

날짜 : 2008.02.0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지혜로운 자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2장 6-10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2_03_2008.wmv

어느 아랍국가에 한 지혜로운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지혜는 온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솔로몬과 버금가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한 가게 주인이 자기의 사정을 재판장에게 알립니다. 가게의 물건을 누군가가 자꾸 훔쳐 간다고 자신의 문제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을 잡을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장은 가게 주인에게 가게의 문을 떼어서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장 한 가운데서 50번 회초리를 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이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상한 재판장의 판결이 시행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떼어 온 문에 회초리를 50번 가했습니다. 재판장이 문에다가 물어 봅니다. “누가 도둑이냐?” 그리고는 문에다가 귀를 바싹 갖다 댑니다.

일어서더니 큰 소리로 말합니다. “문이 도둑이 누구인지 나에게 말했다. 도둑은 터반(아랍인들의 모자) 위에 거미줄이 쳐 있는 자이다.” 군중들 중 한 사람의 손이 자기의 머리 위로 올라 갔습니다. 그 사람의 집에 가 보았더니 아니라 다를까 훔친 물건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정말로 솔로몬과 버금가는 지혜로운 재판장입니다.

오늘 제직 임직예배로 드립니다. 여러분을 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직으로 세우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지혜로운 자들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제직으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이 재판장과 같은 지혜의 소유자이기에 제직으로 세우셨을까요?

사실 요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지혜롭게 살기가 어려운 때인 것 같습니다. 아니 지혜로운 제직이 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이 목사인 저에게 종종 이러한 말을 하곤 하셨습니다.

“목사직을 감당하시느라 수고 많으시겠습니다. 특히 요즘은 더 힘드시겠습니다. 요즘 목사직을 감당하시려면 정치에 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요, 경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요, 비지니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요 과학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요, 스포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요.”

다행한 것은 그 분은 저에게 연예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저는 어쩔수 없이 때로는 원하지 않는 TV프로를 봅니다. 요즘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을 올리고 있는데 후보자들의 토론도 가끔 봅니다. 보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자기가 더 유능하다는 이야기를 할수 밖에 없으니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납니다. 그래도 어쩔수 없이 봅니다. 정치에 대해서 알아야 되니깐…. 물론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적인 지식만 갖춘다고 해서도 되나요? 그 지식들을 소화해서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를 갖고 있어야죠. 인격은 두 말할 나위없고…. 이것이 오늘날의 목사의 삶입니다.

그런데 목사직만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나요? 사실 우리 장로교제도는 목사와 평신도가 곧 제직이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일하는 제도입니다. 곧 목사직이 힘들어지는 만큼 제직직분도 같이 힘들어져야 하는 제도입니다.

힘들다고 표현해서 죄송합니다만 다르게 표현하면 아주 도전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목사가 되었고 제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지식을 바른 지혜를 갖고 있지 않으면 전혀 감당할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혜롭다 여기시고 여러분을 제직으로 세우셨습니다. 세상 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식들을 섭렵할수 있는 지혜로운 자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여러분은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하여 어떤 문제도 해결할수 있는 그러한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랍의 재판장과 같은 지혜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사실 자신있게 “Yes”로 대답하기란 쉽지 않을줄로 압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가 아랍의 재판장보다 더 나은 지혜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본문 말씀에는 두 가지 지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소유한 지혜는 이 세상 지혜와는 다른 지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의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재판장의 지혜입니다. 물론 우리가 재판장의 지혜도 갖고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지혜보다 다른 차원의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요? 7절 말씀입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비밀한 가운데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특징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숨겨져 있었습니다. 반면 관원들의 지혜는 밝혀져 있는 지혜입니다. 세상 관원들은 이 지혜를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 지혜는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관원들은 보이는 지혜만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8절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숨겨져 있는 지혜를 가지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만을 소유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못 박을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공화당 후보들이 레이건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서 토론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들의 토론이 바로 서로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하는 토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상대 후보보다 미국 대통령에 더 자질이 있는지 말해 보십시요.” 어느 군인 출신 후보는 당신은 군인으로서 수 십년간 전 세계의 전쟁에 참여함을 통하여 그 누구보다 미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럴듯했습니다.

다른 후보는 당신은 많은 회사를 경영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미국의 경제정책을 잘 세워 나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 듯했습니다.

그 분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세상적인 지혜는 끝없는 싸움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싸움을 누가 더 잘하느냐에 따라서 지혜로운 자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는 세상적인 지혜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군인 출신은 “대통령은 마땅히 세계 군사정책을 잘 알아야하니 사업가는 대통령감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업가 출신은 “경제를 위해서는 군인의 안목으로는 세계경제를 볼수 없으니 군인출신은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죽이고 있었습니다. 세상 지혜의 특징입니다. 세상 지혜의 특징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은 살리고 남의 것은 죽입니다.

그러면 참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요? 9절 말씀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한 마디로 참 지혜의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세상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믿는 것이 바로 참 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그동안 눈으로 본 것과 들은 것과 아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나는 것에 근거한 지혜입니다. 반면 참 지혜는 우리가 본것과 들은 것과 생각한 것 너머서 펼쳐지는 축복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심을 믿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 들려지지 않는 것을 도리어 끝없이 탐험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상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눈으로는 볼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귀로는 들을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계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들은 그러한 세상을 언제나 상상합니다. 우리들의 상상을 넘은 놀라운 아름다운 세상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겸손히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다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가 진실로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바보가 만나서 내기를 했습니다. 누구가 더 큰 숫자를 말하나 내기를 했습니다. 한 바보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7.”

다른 바보가 한참 골머리를 앓더니 말합니다.

“졌다.”

많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들의 상상을 넘은 아름다운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남들이 ‘7’이라고 말할 때 “졌다”라고 말하는 격이 아닐까요?

요즘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은 누가 더 큰 숫자를 말하느냐 내기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누구가 이러한 바보의 삶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삶을 살게 될까요? 10절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을 소유한 자들은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자들은 이러한 지혜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일에도 놀라운 상상력을 가지고 임합니다. 어떤 일에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일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제직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의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기쁘게 해드리십시요. 성령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놀라운 일들을 예비해 놓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믿을뿐만 아니라 상상 속에서 그 세계를 그리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일기를 쓰실줄 압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들은 일기를 미리 쓰는 자들입니다.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리 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이 번 설교준비를 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라서 말씀드립니다. 물론 일기처럼 글로는 쓰지 않아도 상상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될 때는 더욱 필요합니다. 어려운 일을 통해서 얻게될 유익한 것들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들의 모습일줄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화랑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였습니다. 이 시인이 화랑을 나서려 하는데 한 농부가 들어 왔습니다. 농부는 일년에 한번씩은 꼭 화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랑주인이 많이 존경하는 농부였습니다. 주인은 시인에게 농부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시인은 농부와 함께 다시 한번 그림들을 감상합니다. 시인은 농부에게 그림에 대해서 소개해 줍니다. 온갖 담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상징들을 설명해 줍니다. 다 둘러 보았을 때 농부는 시인에게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으시군요. 저는 당신과 같은 재능은 없어도 저는 틴나락(Teannalach)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틴나락(Teannalach)이 무엇인지 궁금해 집니다. 그런데 농부에게 체면상 묻지 못합니다. 눈치를 챘는지 농부는 계속 말합니다.

“저는 호수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바람소리와 함께 물결소리를 듣죠.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여름 호수가 정말로 고요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소리를 발하지 않습니다. 그 때 저는 호수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드는 음악소리를 들을수 있죠.”

시인과 화랑 주인은 어리둥절해집니다. 처음으로 틴나락(Teannalach)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것에 대한 해석을 들은 셈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이 농부의 이웃이 또 화랑에 방문했습니다. 그 이웃에게 틴나락(Teannalach)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농부의 이웃이 대답합니다.

“그 말은 우리 마을에만 있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글짜로 쓴 사람은 없습니다. 호수가에서 아무 소리가 안 들릴 때 우리는 그래도 느끼는 것이 있답니다. 굳이 다른 말로 번역하자면 ‘깨달음(Awareness)’이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 ‘Awareness’보다7층 더 깊은 것이죠. 틴나락(Teannalach), 우리들만 갖고 있는 자연을 보는 지혜겠죠.”

이들은 틴나락(Teannalach)을 가지고 자연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틴나락(Teannalach)이 이들이 자연을 보는 지혜였습니다. 반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성령을 통한 지혜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삶을 보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어떤 세상 일 가운데서도 우리가 상상할수 없었던 놀라운 것이 예비되어 있음을 보는 눈입니다. 이 것이 성령의 틴나락(Teannalach)입니다. 이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제직 여러분, 성령의 틴나락(Teannalach)을 가지고 삶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일기를 쓰시기 바랍니다. 교회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세계를 매일 체험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일년 동안 우리는 대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보입니다.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대충 느껴집니다. 물론 예기치 않은 일도 만날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일은 미리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미리 염려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내다 볼수 있는 일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성령의틴나락(Teannalach)의 선물을 안고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미리 방문하셔서 아름답게 펼쳐질 하나님의 선물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선물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그림을 그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상한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일년간 함께하실 것입니다.

지난 송년 예배 때 지난 일년을 아름답게 색칠해서 하나님께 보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과거만을 색칠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도 아름답게 미리 색칠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틴나락(Teannalch)을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미래를 아름답게 색칠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지혜를 소유한 자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에 상상하지도 못한 것을 예비해 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의 일년의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교회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참 된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교회에는 더욱 아름다운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온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끽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혜로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두 나무꾼이 백년된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자르고 나니 나이테가 보였습니다. 100년 된 나무이니 당연히 나이테가 100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는 다섯 개의 나이테가 거의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젊은 나무꾼이 말합니다. “5년 동안 가뭄이 들었나 봅니다.” 아주 지혜로운 나무꾼입니다. 가뭄이 들었으니 5개의 나이테가 거의 붙어 있을수 밖에…. 이를 듣고 있던 나이 든 나무꾼이 말합니다.

“가물었던 해는 실제로 그 나무의 생명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네. 가뭄 때문에 그 나무는 땅 속으로 뿌리를 더 깊이 내려야만 했겠지. 그래야 필요한 수분과 영양소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뭄이 사라지자, 나무는 튼튼해진 뿌리 덕분에 더 크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네.”

나이 든 나무꾼은 좀 더 지혜로운 분입니다. 어쩌면 그는 문제 뒤에 숨어 있는 축복의 세계를 보는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의 지혜를 소유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기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지혜를 소유한 자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음악을 남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음악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입니다. 십자가 안에 만세전부터 예비해 두신 놀라운 세계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계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 놀라운 세계가 2008년도 우리들 안에 매일 같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2008년도 우리함께 틴나락(Teannalach)의 주인공들이 되십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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