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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한 드라코마

날짜 : 2008.01.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되찾은 한 드라코마
성경본문 : 누가복음 15장 8-10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3-11-2007.wmv

클라라(Clara)라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클라라가 어릴 때 엄마가 정신분열증으로 앓기 시작합니다. 결국 부모들은 이혼을 합니다. 클라라는 15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기의 두 동생을 키웁니다. 2년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클라라에게 어머니의 정신질환이 찾아 오기 시작합니다. 한편 미혼모가 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자기의 두 동생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받아 주지 않습니다. 가정도 없고 교육도 못 받은 클라라는 홈리스(homeless)가 됩니다. 클라라는 My Friends’ Place라는 홈리스쉘터(homeless shelter)를 방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이를 곧 낳게될 미혼모라는 것은 밝히지 않습니다. 종종 자기의 남동생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루는 My friends’ Place에서 운영하는 미술교실을 찾아 갑니다. 참가자들은 희망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교실입니다. 그림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클라라의 그림을 보고 모성애가 가득찬 그림임을 발견합니다. 곧 미혼모임을 알게 됩니다. 선생님들은 클라라를 대화를 통해 그의 소질을 일깨워 줍니다. 한편 클라라는 자신의 희망은 곧 태어날 아기임을 고백합니다.

클라라의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 아기를 모든 쉘터(shelter)사람들이 축하해줍니다. 클라라는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키우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은 거리의 버려진 삶을 너머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My Friends’ Place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그 웹사이트에는 클라라와 같은 자기들이 돌보고 있는 많은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제일 먼저 소개된 클라라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인생은 이야기임을 느껴 봅니다. 물론 그 웹사이트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특별한 것을 보면서 인생은 이야기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유대인들의 속담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 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많은 이야기들 중에 새해첫 예배부터 미혼모 소녀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이 있기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잃은 한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아니 저는 ‘되찾은 한 드라크마의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연사인 예수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예수님의 이 첫 마디를 듣고 청중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한 드라크마가 이 당시로는 양 한마리값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한 드라크마의 비유를 소개하기 전에 바로 잃은 양 한마리의 비유를 소개하셨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에서는 100마리의 양을 소유하고 있는 목장 주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반면 10드라크마를 소유한 이 여인은 10마리의 양에 해당하는 정성을 가진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청중은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이 가난한 여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려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를 잃으면…,”

와우, 큰 일이 났습니다. 가난한 여인이 전 재산의 십분의 일을 잃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었습니다. 당연히 꼭 찾아야만 합니다. 청중들은 예상했을 것입니다. 100마리 양중에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간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분께서 당연히 이번에도 끝까지 찾는 모습으로 끝을 내겠지 기대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아주 표현이 강렬합니다. 환한 대낮이라도 등불을 켭니다. 등불을 킨 것도 부족해서 집을 비짜루로 씁니다.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청중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끝까지 찾아야지, 아주 현명한 여인이군.” 그런데 곧 새로운 궁금증이 엄습해 옵니다.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왜냐하면 이들은 벌써 양 한마리를 잃은 목자의 비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잃은 양의 비유의 끝을 내셨습니다. 5,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청중들은 사실 이 잃은 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놀랐었습니다. 양 한마리를 찾았는데 그것을 기뻐하기 위해서 축제를 벌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축제를 벌었습니다. 자 주위 사람들을 불러 모와서 축제를 벌이려면 맨 입으로 됩니까? 당연히 양이나 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이 때는 양을 찾았으니 양을 잡았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찾은 후 소를 잡았던 것입니다. 청중들 보기에 이 목자는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어떻게 양 한 마리를 찾았는데 소 한 마리를 잡습니까? 사실 청중들 보기에 목자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본인인 곧 예수라는 사람이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전혀 계산이 맞지 않은 사람입니다. 양 한마리를 찾고 소 한 마리를 잡는다면 얼마 안 있다가 이스라엘 민족은 망할 것이 눈 앞에 선히 보입니다. 그러나 꾹 참고 다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나 기다려 본 것입다.

그런데 지금 비슷한 이야기를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잃어 버린 한 드라크마 이야기를 하고 계신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청중들이 계산적으로 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보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돈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가난한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습니다. 청중은 귀가 번뜩 합니다. 돈을 소재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돈을 소재로 말을 하니 이번에는 제대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말이 되는 말을 하겠지 생각합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은 등불을 켜고 찾도록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러면 이 번에는 어떻게 할까요? 모두 궁금한 생각에 사로 잡힙니다. 청중은 생각해 봅니다. “잃은 양을 찾은 후 소를 잡은 그 목자처럼 이 여인도 그렇게 할까? 아니지 그래도 그 목자는 양 백 마리나 소유한 부자였는걸. 이 여인은 양 열 마리의 가치밖에 안 되는 열드라크마를 소유하고 있느니 그러지는 못할걸…?”

이야기꾼 예수는 입을 열어 말합니다.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양의 이야기와 똑 같이 끝을 맺습니다. 청중은 말이 안 된다는 듯이 분노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한 드라크마를 찾았는데 어떻게 주위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잔치를 베풀어…? 그것도 그렇게 가난한 여인이….”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식으로 생각해도 가난한 사람이 백불을 잃어 버렸습니다. 찾도록 찾아서 백불짜리 지폐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뻐서 백불이 더 되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청중은 잃은 양의 비유를 듣고 못 마땅해 했는데 더 큰 불만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까지 왔담. 이런 쓸데 없는 말을 듣는 시간에 땅을 팠으면 돈이라도 챙기지….”

이와 같이 불평하는 청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마지막 결론을 듣고 아마 청중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한 그룹은 계속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아예 귀를 막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자시고 좋아하네….” 그런데 한 그룹의 사람들은 마음을 완전히 닫질 않았습니다. 이들의 뇌리에는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 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어느덧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생각하기에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것일까?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사자들의 관점은 다를수도 있지. 다르면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이 두가지 이야기를 다시금 깊게 생각해 봅니다. 먼저 잃은 양 한 마리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후 소 한마리를 잡는담…?” 곰곰히 생각해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잃은 양 한마리는 단순히 한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상품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과 더불어 목자는 깊은 추억을 나누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태어날 때 보니 다른 양보다 키도 작고 연약해 보였던 양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후 양이 아플 때 밤 새워 고쳐주던 추억, 배고플 때 주인 옆에서 괴성을 지르던 모습등등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리고 물론 다른 양보다 말썽을 많이 부렸습니다. 이번에는 길을 완전히 잃었지만 그 동안도 잃어 버리기 반보 직전일 때가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올 것이 온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도 사랑스러운 양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희 영어회중에 어느 교우님이 계신데 이 분은 닭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닭알러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릴 때 집에서 닭을 키웠는데 물론 병아리에서부터 닭이 된 것입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그 닭을 잡아 밥상에 올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교우님은 닭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겠죠.

이처럼 목자는 그 잃은 양과 많은 추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잃은 양은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목자에게는 한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상품가치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인격적인 한 존재였습니다. 값을 매길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니 목자가 소유한 100마리 양 모두 각기 특유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소유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양을 잃었다가 되찾으면 그 양으로 인해 큰 잔치를 베풀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지혜로운 청중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드라크마의 비유는 이해가 또 안됩니다. 동전 모양은 똑 같지 않습니까? 동전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얼굴이 없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주인과 맺을래야 맺을수도 없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이해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중은 다시금 깊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도 아닐텐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잠시 후 지혜로운 청중은 무릎을 치면서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합니다. 놀라운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이 동전을 잃은 여인은 동전 하나하나에 담긴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자들은 너무도 잘 아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은 후 등불을 키고 찾도록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찾은 후 한 드라크마보다 더 많은 돈을 드려서 잔치를 벌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드라크마가 다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드라크마였습니다. 모두 얼굴이 있는 동전이였습니다. 제각기 다른 얼굴을 소유한 동전들이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벌기 위해서 그 여인은 많은 고통과 눈물을 흘렸고 많은 이야기를 남기곤 하였습니다. 그가 겪은 삶의 경험들은 감히 돈으로 환산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동전 동전마다 값으로 환산할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전을 찾았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회복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회복한 그 여인은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보다도 더 큰 돈을 들여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면서 그 여인은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중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들도 이제는 동전 안에서 도리어 얼굴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동안 얼굴을 동전으로 보아 왔던 자신들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이제는 동전 안에서 얼굴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지혜로운 그들은 그동안 양을 돈으로만 환산하며 살았던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였던 것입니다. 돈으로 환산할수 없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는 ‘지식경영’이란 말이 잘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곧 지식은 바로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힘이다”가 아니라 “아는 것은 돈이다”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양을 돈으로 취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양의 아픔과 개성과 생명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돈의 가치로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을 볼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저 사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직업을 알게 되면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짜리군.” 쉽게 말씀드려서 “연봉이 얼마이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얼굴을 동전으로 바꾸워 놓습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서로서로를 돈 버는 기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돈 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을 볼 때 어떤 선입견을 갖고 봅니다. 선입견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이웃을 벌써 동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사람을 보는 열 가지 선입견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피부색깔, 외모, 돈 , 가문, 학력, 고향등 아마 열 가지 선입견으로 이웃을 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서로서로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서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사는 집도 동전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얼굴 모양도 동전모양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를 안고 우리는 새 해를 맞이 했습니다. 2008년 무자년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년 예배를 드립니다. 이러한 모습을 안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각자 자신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축제를 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올 해 저희 교회 표어를 “잃어 버린 영혼을 찾아서”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굴을 동전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선입견으로 보아왔습니다. 이제는 얼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모습 바로 그대로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얼굴을 발견할 때 이웃은 우리의 얼굴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것입니다. 그 때 이웃의 상처는 치료되고 아울러 주님께 더 가까이 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이웃을 보는 눈을 고쳐야합니다. 특히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웃을 보는 눈을 바로 해야겠습니다. 선입견의 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래서 그들의 얼굴을 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때 잃어 버린 영혼들은 주님께 돌아 올 것입니다.

아울러 바로 그 눈을 가지고 우리 믿는 자들끼리도 서로를 보아야겠습니다. 그 때 하늘나라의 사자들도 기뻐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독특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8년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셨습니다.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시다. 특히 잃은 영혼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요즈음 미국에서, 동성 연애자와 에이즈(Aids)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관에서 일하시는 매튜(Matthew)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폭행(abuse)를 당하진 않았지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마다, 아버지가 별로 안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늘 불행하고 마음의 짐이 되는 삶을 살다가, 성년이 되어서는 마침내 동성 연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동경하는, 즉 자기가 되고싶은 그런 남자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과 동성애를 하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당시 그의 직업이던 coast guard (해안 경비대)를 할때에, 해변가에서 순찰을 하던중, 에이즈를 보유한 괴한이 나타나 그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매튜또한 에이즈 보균자가 되었는데, 그후로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기적적으로 에이즈도 치유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을 하여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물론 동성 연애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동성 연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였지만, 감옥의 수감자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도 했는데, 어느날 그곳의 어느분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는 죄수들에게도 복음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여서 그들에게 갔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수년전 매튜를 강간한 바로 그 괴한이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는 매튜 목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매튜 목사는 증오심과 분노로 가득하여, 그곳을 당장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매튜 목사의 마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어서 그 죄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는수 없이 매튜 목사는 예수님의 용서에 관한 설교를 하고는 그곳을 급히 떠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또다시 명령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Altar Call, 즉 예수님을 영접하는 초청을 하게끔 하셨습니다. 매튜 목사는 그 죄수와 함께 천국에 가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Altar Call만은 안하고 싶었지만, 하는수 없이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 죄수만이 주님을 구주로 모시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처럼 사람, 개, 고양이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많은 사람을 강간한 죄수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순간, 매튜 목사 자신 또한 그 죄수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님께 통회 자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수의 아픈 과거 이야기는, 그가 다섯살 때에 아버지가 엄마를 층계로 밀어서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후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다섯살의 어린 나이때부터 남자 동성 연애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곤 했다고 합니다. 열 여덟살이 된 이후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로 결심했고, 그결과 살인 및 강간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Matthew(매튜) 목사는 그가 주님을 영접한지 두주후에 약속대로 그에게 줄 좋은 책을 갖고 찾아갔더니, 그는 이미 에이즈로 인하여 하늘나라로 떠나가셨습니다. 매튜 목사는 그제서야 왜 주님께서 그리도 급하게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하셨는가의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매튜목사는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이야기가 있다고 얘기하면서, 언젠가 천국에서 자기를 해친 그 죄수와 만나 영원토록 함께 살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알고 보면 자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우리는 이웃은 동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맞이 하여 서로서로의 깊은 이야기가 있음을 느끼십시다. 상대방의 입으로 어떠한 이야기가 안 나오더라도 그 이야기가 있음을 느끼십니다. 그 때 우리는 떠오르는 아름 다운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서로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 안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동안 서로가 잃어 버린 영혼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복음은 들을 넘고 산을 건너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자가 될 것입니다. 이 때 하늘의 사자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새해 2008년도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2008년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이 우상이 된 시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동전으로 변한 시대입니다. 그러면 희망의 새해가 아닐까요? 이러한 세대에서 도리어 조금이라도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들은 너무도 쉽게 이웃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때 보다도 쉽게 잃은 영혼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해 보다도 희망찬 한해가 될 것입니다. 2008년 한해를 마치면서 가계부는 적자가 나더라도 잃은 영혼을 찾은 축제를 벌리시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인의 기쁨에 동참할 것입니다.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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