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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날짜 : 2007.12.0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1장 4절-8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7_12_2.wmv

천주교에 자기 수련 프로그램으로 피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피정 프로그램 중에 3분 안에 치르는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피택 받은 제직들에게 안수교육을 마치고 시험을 치루는 데 저희교회에서도 한번 해보고 싶은 시험입니다. 3분 안에 다 답을 써야 하니 얼마나 성급하게 답안을 작성하겠습니까? 저도 의과 대학 다닐 때 땡시험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문제당 30초 시간이 주어집니다. 30초가 지나면 땡하고 종이 울립니다. 그러면 무조건 옆자리로 옮겨 가야 합니다. 또 다시 30초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천주교에도 그런 비슷한 시험이 있나 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3분 안에 다 답안을 쓰고 나가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지를 받아들면 첫머리에 ‘끝까지 다 읽어보고 문제를 푸시오’라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은 끝까지 다 읽어 보지도 않고 열심히 문제를 풉니다. 반면 다 푼 후 마지막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아주 지혜로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문제만 보면 성급하게 풀기 시작합니다. 끝까지 읽어 보지도 않고…. 끝까지 읽어 보았더라면 전혀 한 문제도 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 와서 처음부터 빽빽하게 답안을 아주 잘 작성했습니다. 마지막 문제를 보는 순간 앞이 노래집니다.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천주교에서 이런 문제를 내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지 않습니다. 코앞에 닥친 문제 풀기에 급급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 필요도 없는 문제만 잔뜩 풉니다.

교우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필요도 없는 문제만 잔뜩 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필요 없는 문제를 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대강절 첫번째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아마도 대강절이 생긴 이유는 필요 없는 문제를 풀지 않고 필요한 문제만 골라서 푸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강절은 2천년 전 아기로 오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보내는 절기입니다. 곧 기독교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곧 대강절은 과거적 사건과 미래적 사건이 현재 안에서 만나는 절기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2천년 전의 사건을 묵상합니다. 또한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미래적 사건 곧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오늘이라는 삶을 가장 지혜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필요 없는 문제를 풀지 않고 짧은 인생 가장 값지게 살게 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대강절은 어느덧 성탄절이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있고 마지막은 없어졌습니다. 감사절이 지남과 함께 온 세상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일찍부터 축하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노래는 들리지 않습니다. 온통 아기예수의 탄생뿐입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마땅히 축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노래 없이 성탄노래만 부를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질까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오늘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2천년 전에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거쳐 다윗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와 부활에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아기예수의 탄생으로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기예수의 탄생 이후는 우리 모두 기억 상실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기억상실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퇴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 뇌에 손상을 입은 후 그 전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새로 일어나는 일만 기억합니다. 또 하나는 전향적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 뇌 손상 후에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곧 최근 것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앞으로 될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기억상실 중 어느 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가까운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답을 찾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전향적 기억상실증 환자들인 것 같습니다. 옛날 것은 잘 기억합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선 상상도 안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결국은 쓸데없는 문제만 푸는 삶을 살게 되지 않나요? 아주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후회할 일만 잔뜩하며 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크리스챤들의 영적치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치매환자들입니다. 영적 치매환자들이기에 필요 없는 일만 열심히 합니다.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써있는지 알지 못하니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 계시록에 있는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 중에도 가장 마지막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있을뿐더러 마지막 일에 대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인류 역사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먼저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은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 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중에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장차 영광 중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또한 그 모습을 온 세계에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언젠가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지억하는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칩니다. 요한의 모습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을 가만 살펴보면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만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도 은연 중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바로 요한은 이 주님의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던 분 같습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얼마나 요한이 주님의 다시 오시는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요한은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외치고 있는데 문맥상으로 보면 잘 맞지 않습니다. 불쑥 튀어 나온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단을 살펴볼까요?

오늘의 본문을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문단이 4-6절입니다. 첫 말씀은“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요한은 지금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성삼위일체에 대해서 아주 긴 서술을 합니다. 일곱 교회를 위해 기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은 성삼위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을‘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당연히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먼저 이 성삼위일체의 축복이 일곱 교회에 임하길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곱 교회를 위하여 기원을 한 후 이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삼위일체 전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돌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을 돌리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요한 계시록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대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뛰어 들어 오셔서 피를 흘리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기에 요한은 지금 이 위대한 인류 역사 한 복판에 오신 예수님을 높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하나의 역사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자 지금 요한은 먼저 일곱 교회를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특별히 성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맥에도 맞지 않는 말이 튀어 나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리라.”

쉽게 말씀드려서 6절후에 9절로 연결되면 제일 부드럽게 문맥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고는 곧바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얼마나 부드럽게 연결됩니까?

그런데 요한은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온 인류 역사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 그 분이 언젠가 구름타고 오실 것을 요한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실에 사무쳐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무치게 기다릴 때 늘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자녀를 기다리던가 결혼을 기다리던가 졸업을 기다리던가 우리는 기다리다 못 해 사무칩니다. 사무친 사람은 조금만 자극받아도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사무친 것이 툭 튀어 나옵니다. 요한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자마자 요한은 소리친 것입니다. 문맥에도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이처럼 당신에게 사무친 요한에게 예수님이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신 주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요한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나타나셔서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친히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세계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다시 오심을 그토록 사모하는 요한을 너무도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온 세상 역사를 다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한편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구름타고 오실 당신을 사모하는 자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상역사를 알려 주십니다. 결국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역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자들이 됩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역사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그래서 짧은 인생 더욱 멋지게 살아갑니다.

반면 주님의 다시 오시는 모습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7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이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언젠가는 그들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면서 애곡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삶은 마지막을 알지 못했기에 잘 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필요 없는데 시간을 보낸 것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후회 정도가 아닙니다. 애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도 늦었나요? 다행히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늘 보고 있는 하늘을 나다니는 구름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다시 오시는 주님을 태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전향성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지 우리는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본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이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리차드 베라스(Richard Veras)라는 신부님이자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나의 수업에 흥미를 갖고 공부한 학생들이다. 그 학생들과 교실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이미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데 극히 드물게 몇몇 학생들과는 교실을 넘어서 아니 졸업 후에도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 이런 학생들은 어느덧 친구가 된다. 그들은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한 부분이 된다. 세월이 가면 많은 학생들은 잊혀지지만 친구가 된 학생들은 전혀 잊혀질 수 없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성도들과는 먼 관계로 남아 있고 또 어떤 성도들과는 친구와 같이 지내고….’

아기예수의 탄생만 축하하는 분들과는 예수님은 먼 관계로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반면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의 모습까지 생각하는 분들과는 예수님은 다르게 대하시지 않으실까요? 인류의 미래 역사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또한 위대한 인류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비록 그동안 우리가 전향성 기억상실증애 걸려있었지만…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강절을 맞아서 영광스러운 다시 오실 주님의 모습을 깊게 묵상하십시다. 그리고 함께 요한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사무칠 정도로 주님을 기다리십시다. 미래를 생각하는 자는 현재를 포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더욱 현재에 충실하는 자들입니다. 필요 없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영적 치매에서 벗어나 세상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주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또한 영광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은 어느덧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은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한가지 궁금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왜 주님은 하필이면 구름을 타고 오실까요?

지난주 수요여성 성경공부 시간에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자연 경치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한국에서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날따라 어느 석양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석양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듯 하였다고 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때 갖고 있던 기도 제목이 응답을 받았다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으며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또한 왜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신다고 약속하셨는지 저 나름대로 깨달음이 왔습니다. 구름은 늘 있습니다. 물론 캄캄한 밤에는 안 보이지만 구름을 볼 때마다 주님과 친하게 지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니 요한은 구름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타신 구름이 아닐까?’

지난 주간은 저에게는 뜻 깊은 주간이었습니다. 구름을 새롭게 만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구름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타신 구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예수님이 타신 구름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한편 얼마 후 새로운 깨달음이 왔습니다. 구름이 바로 말구유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름 안에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누어 계신 듯이 보였습니다. 구름은 어느덧 예수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구름으로 인해 저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감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가깝게 되면 또 어떻게 될까요?

구름이 예수님의 말구유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저의 마음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는 듯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구유의 아기예수를 그리워합니다. 구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기 예수가 여러분들의 가슴에 태어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예배당을 나가시면서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구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름과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 구름은 주님을 태운 구름입니다.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이 타실 구름입니다. 지금은 아기예수를 태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구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말구유가 될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 구름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구름을 바라보며 주님의 탄생을 노래하십시다. 다시 오심을 노래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티모시 돌란(Timothy Dolan)이라는 천주교 신부가 대강절을 맞이하여서 6학년 학생들에게 대강절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대강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이미 예수님은 오셨잖아요? 어떻게 다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나요?”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우리가 구름타고 오실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마음은 주님의 마구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말구유가 놓이는 것입니다. 그 말구유에 아기예수가 탄생하십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생각하면 어찌 아기예수가 우리 안에 탄생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마구간에 오셨던 우기 예수님은 우리라는 마구간에 오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구름타고 오실 주님을 바라본다면 말입니다.

그 때 2천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에 탄생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라는 마구간에 탄생하실 것입니다. 구름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탄생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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