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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날짜 : 2007.11.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새로운 시작
성경본문 : 마가복음 2장 18절-2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11-25-2007.wmv

한 코끼리가 강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다리는 많이 낡아서 코끼리가 건너는데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났습니다. 가까스로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코끼리 귀안에 살고 있는 벼룩이가 코끼리 귀에다 대고 소리쳤습니다. “이봐, 우리가 다리를 뒤흔들었어.”

일견해 읽으면 철이 없는 벼룩이로 보여집니다. 벼룩이가 벼룩이다운 뻔뻔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고 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마리의 벼룩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마리의 벼룩이는 다리를 건넌 후 소리지릅니다. “우리가 다리를 흔들었어.”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벼룩이입니다. 또 한 벼룩이가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다리를 건넌 후 코끼리의 귀에다 대고 말합니다. “코끼리 아저씨는 무겁긴 무겁군요. 다리가 뒤흔들렸어요.” 똑 같이 코끼리 귀 안에 살고 있는데 한 벼룩이는 함께 다리를 뒤흔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벼룩이는 코끼리 혼자서 다리를 흔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벼룩이가 맞을까요?

매튜 켈리(Matthew Kelly)라는 저술가가 있습니다. 이 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는 연설을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어릴 때 곧 17살 때 친구가 양로원을 방문하자고 하였습니다. 양로원에 아무 방문객이 없는 분들을 함께 방문했습니다. 사실 친구는 자주 여러 양로원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다음주에 또 가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매튜는 바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주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다시 양로원에 가자는 것입니다. 또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어쩔수 없이 가끔씩 가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전화가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매튜 혼자서 양로원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끌려서 다녔지만 이제는 양로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혼자서 가게 된 것입니다. 양로원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매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양로원에 계신 분들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다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매튜는 고백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을 우물안 개구리의 삶에서 놀라운 세계를 보게 하였다고….

그런데 매튜가 가 본 양로원은 특별한 양로원이었을까요? 사실 저를 포함에서 우리들 중에 많은 분들이 마지막 여생을 양로원에서 마치게 될 줄 압니다. 매튜가 가 본 양로원도 우리가 장차 들어갈 양로원가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우리가 양로원에 있을 때 제2의 매튜가 찾아 온다고 가정하면 그 제2의 매튜가 만날 사람들은 매튜가 만난 사람들과 다를까요? 양로원에 계신 분들 모두가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라면 우리들 모두도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놀라운 이야기를 안고 양로원에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벼룩이처럼 이미 자신이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알면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다리를 뒤흔드는 자임을 알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발걸음마다 땅이 흔들림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최고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최고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두 부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그룹은 금식을 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고 또 한 그룹은 금식을 하고 있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짧지만 많은 내용이 담긴 말씀을 하십니다. 아울러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잘못되었다 말씀하시진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으십니다. 반면 당신의 제자들의 금식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고 계신 셈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지금 금식할 수 없는 이유는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랑과 손님들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이들은 서로를 아는 인격적인 관계를 지닌 사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금식할 수 없으나 언젠가 금식을 하게 되는데 곧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면 금식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젠가 당신의 제자들이 할 금식은 인격적인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겼기에 하게 되는 인격적인 금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어떠한 금식인지 은연중 말씀하고 계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비인격적 금식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로 인한 금식이 아니라 전통에 의한 금식이던지 율법적인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곧 비인격적인 금식은 자신의 의무만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금식은 오늘도 팽배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만족하고 있다면 바로 우리가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적으로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변화되기 전 마틴 루터입니다. 롤랜드 배인턴(Roland Bainton)은 그의 책 ‘Here I Stand’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금식하였다, 때로는 삼일씩 아무 것도 안 먹었다. 축제의 절기보다 그는 금식의 절기가 더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부활절보다 사순절이 더 많은 위로를 주었다. 그는 철야도 많이 하였고 기도도 많이 하였다. 그는 추위로 인해 거의 얼어 죽을 지경도 자주 경험했다. 그는 자주 자신의 경건 생활을 자랑했으며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아무런 죄를 오늘 지은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걱정이 생겨났다. ‘너는 금식을 해야 할만큼 했는가? 너는 가난하여야 할만큼 가난해졌는가?’ 그는 최소한의 옷만을 입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후에 이와 같은 극심한 절제 생활이 그의 소화기관을 다 망쳐 놓았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기 전 그는 비인격적인 금식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무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금식생활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들도 마틴 루터처럼 금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인격적인 금식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통과 율법에 의한 자기만족의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금식이 신앙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그러기에 금식을 통해 평안을 누렸습니다. 금식하면 할수록 자신은 이처럼 금식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만해지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 만을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위장만을 상하게 하는 금식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금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한 마디로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같은 말을 반복하시고 계십니다. 단지 옷에서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마지막에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뜻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는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비인격적인 틀에서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인격적인 틀은 바로 율법과 전통의 틀입니다. 율법과 전통 안에서는 인격적인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만남은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20절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기는 것을 볼 때 인격적인 만남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것을 보기 전 인격적인 만남은 꽃을 피우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같이 지내던 사람이 떠날 때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더 깊어지지 않습니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깊게 만날 때 인격적인 만남은 참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꿈을 분석하는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 나치 군에게 혹독한 학대를 받았던 한 유대인의 꿈이 읽혀졌습니다. 꿈이 다 읽혀진 후 정신학계의 대가인 칼 융(Carl Jung)의 아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가 일어나 말합니다. “우리 다 함께 일어설까요? 함께 서서 각자 조용히 묵상하십시다.” 그리고는 앉은 다음에 다음 꿈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 곳에 참여한 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꿈을 분석하는 모임에서 꿈에 대한 분석은 안하고 왜 묵상한 후 그냥 넘어갔는가? 궁금했습니다. 며칠 후 한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선생님은 대답합니다. “아, 로이스, 인생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말이야. 설명되어질 수도 없고 치유될 수도 없는 것들…. 이러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뿐이야 그래서 아무도 혼자 고통당하지 않도록.”

이 이야기가 주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함께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서로서로 꿈을 잘 분석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함께 말없이 고통을 바라 볼 때 인격적인 만남은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긴 후에 금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보기 전에는 참으로 인격적인 금식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인격적인 금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제자들은 인격적 만남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이웃과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고난이었습니다.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주님의 고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손의 손을 잡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조용히 일어서 있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함께 손잡은 이웃과 하나가 되곤 하였습니다. 비로소 인격적 금식은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없는 금식은 인격적 금식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 서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서기를 멈출 때 우리는 율법과 전통의 사람들이 됩니다. 어느덧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물 건너 간지 오래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 저절로 일어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신비한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과 하나인양 행동하는 자가 됩니다. 아울러 이웃 안에 있는 신비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인양 행동하는 자들은 처음 말씀드렸던 벼룩이와 같은 체험을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느덧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인지 자기가 한 일인지 구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감히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같이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까지 말할 수 있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양로원에 계신 모든 노인들이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인데 만약 그 위에다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 서는 삶을 더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 삶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히 외치는 자가 될 줄 압니다. “하나님, 우리가 같이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신 분이 바로 조금 전 말씀드렸던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과 전통을 따르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 서는 자가 됩니다. 곧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섭니다. 그는 독일의 보름스(Worms)국회에서 담대히 말하는 자가 됩니다. “사탄이 저 기왓장과 같이 많을 지라도 나는 나의 신앙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Here I stand.”(내가 여기 섰나이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그로 하여금 땅을 뒤흔드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같이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 1:1의 협력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코끼리와 벼룩이와 비슷한 관계의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이 말을 받으셨을 줄 압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자들은 때때로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같이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걸음 걸음을 통해서 세상이 뒤흔들리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얼마나 멋있습니까? “우리가 같이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고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 때때로 말없이 일어서는 삶을 산다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이 고백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을 들으실 때마다 흐믓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하나님의 귀안에 거하고 있나요? 우리가 만일 주님의 고난 앞에 늘 선다면 우리는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도 모두 하나님의 귀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그래서 우리들의 이웃도 모두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의 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위하여 결국 떨기나무에 신비하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떨기나무에 신비하게 임하셨던 불이 이제는 어디에서 타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떨기나무에 임한 신비한 불을 보여주신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고 봅니다. 떨기나무에도 신비스럽게 임하시는데 하물며 너일까 보냐? 하물며 사람들일까 보냐?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만일 주님의 고난 앞에 경외감을 안고 서곤 한다면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웃 안에 타고 있는 신비스러운 불을….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모든 이웃은 신비스러운 불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고난의 신비를 맛보노라면 우리는 어느덧 이웃의 신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발걸음을 통해서 세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이웃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이웃과 하나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 이러한 눈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할 이웃이 용기를 잃고 좌절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용기를 내시오. 삶은 당신의 것입니다. “live on! 사십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사람이 바로 세상을 흔들 수 있는 자들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며 인격적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함께 땅을 움직였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말합니다. “Live! 사십시다! 당신도 땅을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보니 미국에서 제일 돈을 적게 받고 고생하는 직업 10가지가 소개되었습니다. 마지막에서부터 소개해드리면 열번째가 값 싼 영화제작자들, 아홉번째가 접시닦기, 여덟번째가 팔리지 않는 모델들, 일곱번째가 여행가이드들, 여섯번째가 웨이터, 웨이트리스들, 다섯번째가 수영장의 라이프가드, 네번째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세번째가 극장에서 일하는 안내원들, 두번째가 가게 카운터에서 돈받는 사람들, 첫번째가 호텔에서 호스트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곧 손님들을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인격적인 사람이 되신 분들에게는 그 누구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직업의 사람들에게도 떨기나무의 불을 보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담대히 말하게 됩니다. “Live! 사십시다!” 이들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때때로 하나님의 귀에다가 겸손히 겸연쩍은 듯이 말씀을 드리십시다. “우리가 함께 하였습니다.” 용기를 잃은 이웃에게 말씀하십시다. “Live! 사십시다. 당신은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라는 작가가 “Holy the Firm”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인생 안에 스며있는 신비함을 소개한 책입니다. 그중 줄리 노르위치(Julie Norwich)라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화상을 입은 소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마지막을 소녀에게 하는 말로 끝을 냅니다.

“너의 화상 입은 얼굴을 의사가 수술하겠지. 그런데 꿈을 꾸어봐, 너는 언젠가 너의 자녀들에게 옷을 입히겠지…. 아침마다 휘파람을 불거야, 유쾌한 하루를 맞이할 거고, 오후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있을 거고. 밤은 사람을 노래할거야. 그러니 살어.(So live.) 멋지게 살아.”

애니 딜라드는 하나님의 귀안에 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합니다. “So live.”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함께 사십시다. 멋지게 사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놓고 사십시다. 하나님의 귀 안에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신 다구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십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시다. 그리고 경외감에 젖으십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So live.”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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