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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의 사람들

날짜 : 2007.11.1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희년의 사람들
성경본문 : 레위기 25장 8절-17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11-18-2007.wmv

요즘 미식축구 시즌이 돌아 왔습니다. 뉴잉글랜드 페트리어츠(New England Patriots)가 잘하고 있지만 오늘은 피츠버그 스틸러스(Pittsburgh Steelers team) 의 한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피츠버그 팀에 러닝백으로 뛰는 제롬 베티스(Jerome Bettis)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몸이 큰 선수인데 러쉬를 잘해서 ‘버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선수입니다. 베티스는 노틀댐(Notre Dame)대학 출신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 축구에서는 먼저 로스엔젤레스 렘즈(Los Angeles Rams)로 스카웃되었습니다. 첫 해 아주 잘해서 신인왕(rookie of the year)이 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해 프로 축구선수들 중에서 제일 잘한 사람에게 주는 상을 받은 것입니다. 첫 해는 잘했지만 두 번째 해부터는 평범한 선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번째 해에는 평론가들이 베티스는 이제 선수 생활은 끝이 났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티스의 대학 시절 코치가 바로 유명한 루 홀츠(Lou Holtz)입니다. 루 홀츠가 하루는 티비로 베티스가 경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잘 못했습니다. 루 홀츠는 곧 바로 베티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베티스, 나 오늘 램즈 팀이 경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선수 중에 너를 흉내내는 선수가 하나있더라. 너의 옷을 입고 너의 백넘버를 달고 뛰는 선수가 있었어, 그 놈 그만 뛰게 해.”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해 시즌이 끝나자 베티스가 코치를 찾아 왔습니다. “코치, 제가 대학을 떠날 때는 좋은 삶의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프로에 가서 저는 저의 원래의 자세를 잊어 버렸습니다. 저는 앞으로 4개월간 다시 이곳에 와서 저의 옛 자세를 되찾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해 여름을 대학에 와서 지냅니다. 그는 그 해 스틸러스 팀으로 이적합니다. ‘버스’라는 별명을 그 곳에서 받게 되고, 프로 축구 사상 런닝백으로 14번째 10,000야드를 돌파하는 선수가 됩니다. 물론 2년 전에는 스틸러스를 슈퍼볼 우승팀이 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합니다. 바른 삶의 자세를 찾았을 때 베티스는 새로운 선수가 된 것입니다. 잠시 동안 다른 사람이 베티스의 옷을 입고 뛰었던 것입니다. 베티스는 삶의 자세가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베티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경우 참된 ‘나’자신이 살지 않고 ‘나’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바른 삶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의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 연구휴가를 가졌는데 비행기를 몇 차례 타게 되었었습니다. 9/11이후에 비행기 타는 것이 많이 번거로워졌는데 게이트로 들어가려면 항상 운전면허증과 탑승권(boarding pass)를 검사합니다. 아직 한번도 운전면허증과 탑승권 때문에 문제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그러시겠지만…. 검사관들은 저의 면허증의 이름과 탑승권에 적힌 이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면허증의 사진과 저의 얼굴을 비교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될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도 우리자신을 검사관의 입장에서 보면서 살 때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면허증에 있는 사진과 나의 얼굴이 같기에 “내가 참 나구나, 내가 살아 있구나”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면허증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비교하면서 사는 삶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면허증에 박힌 얼굴 너머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아야 할줄 압니다. 그 때 우리는 참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면허증 너머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볼 때 저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생각하며 만족해하겠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54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정확히는 오늘이 창립 54주년 기념 주일이자 첫 희년 후 창립기념 네번째 주일입니다. 창립기념일이 감사주일과 겹치기 때문에 큰 의미도 있지만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한번에 두 가지를 모두 다룰 수 없는 것이 늘 아쉽긴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희년에 더 초점을 두고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4년 전에, 곧 2003년에 저희 교회를 다니신 분들은 희년의 축제에 함께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함께 감사하며 축하하였습니다. 저희는 그해에 희년을 맞아서 첫 희년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정기적으로 우리가 함께 고백하고 있고 비전 선언문은 제목만이라도 주보 제일 뒷면에 기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 창립기념 주일에 비전 선언문을 낭독합니다.

오늘 이 시간은 4년 전에 함께 나누었던 희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희년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희년의 삶이 곧 우리가 참 자신됨을 만끽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희년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참 자신을 발견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신학적으로 집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분들은 모두 희년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의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희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보스톤 한인교회 교우 분들은 한 가지 더 축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간 가운데서도 첫 희년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을 안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4년이 지나서 다시 한번 희년의 삶은 어떤 삶인지 다시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희년의 삶이 바로 참 나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보면서 살아 있는 자신을 보는 자들입니다.

희년에는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그리고 희년은 50년만에 지킵니다. 9, 10절 말씀을 봉독해 드리면,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이스라엘 민족은 매50년마다 그 해를 거룩하게 하여 희년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희년에 나팔을 불면서 행한 첫번째 일이 자유를 공포하는 것이었습니다. 50년 만에 온 이스라엘에 자유가 넘실거립니다. 곧 희년의 사람들은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유한 삶’ 듣고 말하기는 쉬워도 쉬울 뿐만 아니라 멋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한 삶의 훈련을 50년마다 시키신 것 같습니다.

첫번째로는 일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농사가 이 당시 주업무였는데 농사를 한해동안 짓지 않습니다. 한해동안 쉬게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땅이 혼자서 내는 것으로 먹고 살면 되었습니다. 11, 12절 말씀입니다.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

우리 인간은 육신인지라 일에서 쉴 때 자유를 느낍니다. 얼마 전 친구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오래하면서 휴가 한번 제대로 못가다가 휴가를 내어 한국으로 몇 주 가시게 되었습니다. 후에 사모님에게 말씀을 들었는데 마지막 주일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자유다.” 우리는 일에서 쉴 때 자유를 누립니다. 이스라엘민족은 희년을 통하여 이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면 안식년이나 희년등 일하지 않을 때만 자유고, 일하여야하는 49년 동안은 지옥인가요? 이와 관련해서 한번 더 어느 목사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이웃교회인 퀸지 영생장로교회에 은퇴하셨던 목사님께서 임시목사님으로 수고하시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 만나 말씀을 나누었는데 다음과 같이 목회지로 돌아온 소감을 말씀하셨습니다. “은퇴 후 6개월은 너무 좋았습니다. 날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니 영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삶의 힘을 잃어 같습니다. 이제는 아주 좋습니다.” 목사님은 처음에는 자유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6개월간의 쉼의 자유도 소중했지만 그 분이 깨달은 것은 그 동안에 하시던 사역도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바빴던 목회생활이 바로 자유한 삶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희년을 통하여 육신적인 자유를 만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동안 땀흘려 일했던 49년간의 수고도 바로 자유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일을 해도 안해도 참 자유인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된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형성이 되어 간 것입니다. 곧 자신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은퇴를 하신 분들을 보면 대개 이분의 직업이 무엇이었다고 우리가 짐작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어느 분의 직업이 무엇이었다 알게 되면 우리는 분명히 그 분이 평생하신 일로 인해서 그 분이 그 분이 되어 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곧 일은 우리를 우리되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행복하겠습니까?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하여 만족하며 아울러 참 자신이 되어가고 있음을 감사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가? 이 사람이야말로 자유한 사람입니다.

저의 대학교 선배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생명 과학자신데 늘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현미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이 진정 자유인인 것입니다. 이들은 일을 통하여 참 자신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을 통해 주어지는 첫번째 축복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년의 사람들은 일을 통하여 참 자신을 만납니다. 참 자신이 되어 갑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참 자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몰론 가정주부도 하나의 일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사람들이 누리는 첫번째 자유입니다.

두번째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에서 자유해집니다. 13절에는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뜻은 물질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원래 각자 자기의 소유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빚진 것은 탕감받습니다. 남에게 꾸워준 것도 탕감해 줍니다. 다시금 새로이 시작합니다. 그러니 빚을 많이 진 자들은 희년을 학수고대하였을 것입니다. 희년만 오면 모든 빚이 탕감 받습니다. 빚으로부터 자유가 선포됩니다. 그러니 빚진 자들이 제일 희년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채권자들 곧 남에게 돈을 빌려준 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들에게는 희년이 별로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희년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도리어 부자유스러웠을 것입니다. 희년이 가까이 올수록 앞으로 탕감해 주어야 할 빚을 생각하면서 분노가 서렸을지 모릅니다. “그동안 어떻게 일해서 번 돈인데 이 돈을 그대로 탕감해 주아야 하다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부자들에게는 결코 희년의 나팔소리가 자유의 나팔소리가 아닙니다. 부자들에게는 희년은 하나의 모순으로 가득찬 제도였을 것입니다. 이 모순으로 가득찬 제도를 공산주의가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희년이 모순으로 가득찬 제도일까요? 일을 안해도 먹고사는 제도인가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늘 남을 위해 일만해야하는 제도인가요? 하나님께서 그런 엉뚱한 제도를 만드셨을리가 없습니다.

희년은 물질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해입니다. 물질에서의 자유는 물질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탕감하라고 하시는 것은 물질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질은 풍성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빚을 탕감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탕감해도 하나님의 풍성한 물질의 선물은 새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탕감하라는 것입니다.

헌혈을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줄 압니다. 저는 한번 헌혈을 했다가 간염에 걸린 적이 있다고 제 피를 안 받아서 더 이상 못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헌혈을 하는데 저의 옆에 한 백인 여자가 헌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말하기를 그 여인은 두주에 한번씩 헌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두 주에 한번씩 헌혈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피를 주고 또 주어도 하나님께서 피를 계속 만들어주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희년의 물질관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풍성함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희년의 고백입니다. 물질이 제한 된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물질에 자유하지 못합니다. 물질을 제한 적인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물질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년을 통하여 물질에서 자유할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은 풍성한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그 때야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나라에 살면서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은 물질은 제한 된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을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를 ‘god’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희년의 사람들은 물질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입니다. 물질은 얼마든지 재창출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탕감해 줍니다. 물론 때로는 탕감해준 것을 이 땅에서는 받지 못할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새로 오는 세상에서 풍성하게 받을 것입니다. 희년의 사람들은 물질은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자유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그들을 따라 옵니다. 세상 물질도 마음이 풍성한 사람을 좋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년의 자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까지 미칩니다. 이와 관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보다 40, 41절에 더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군이나 우거하는 자 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 본족에게로 돌아가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리라.”

몰론 이 말씀을 물질적인 면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더 깊게 살펴보면 인간 관계입니다. 서로 서로를 용서함에서 오는 자유가 담겨져 있습니다. 언젠가 서로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서받아 참 자유를 누리는 해가 바로 희년의 해입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자유의 날이 바로 희년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용서하기 전 그 아무도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용서는 용서하는 자에게도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물론 종종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합니다. ‘상대방이 곧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결코 용서는 이루워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희년의 용서는 좀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희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용서를 안 구해도 용서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언젠가 서로 서로 화해하고 용서받아 하나가 될 것을 꿈꿀 때 희년의 자유는 주워집니다. 교우 여러분,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우신분이 있으십니까? 희년의 용서의 방법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상상하십시요. 꿈을 꾸십시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과 화해하여 멋진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 때 희년의 자유는 임합니다. 그 때 희년의 사람이 됩니다.

이 자유를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아닙니까? 그는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즐겁게 뛰어 노는 것을 늘 상상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란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온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 역사는 놀라운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루터 킹 목사님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란 연설을 듣거나 보셨을 것입니다. 그 연설하시는 그 모습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는 그 연설을 하며 참 자신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자유를 상상하며 자유를 노래할 때 우리는 바로 가장 멋진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곧 희년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할까요?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희년의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참 자유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일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일을 통해 자신을 개발합니다. 참 자신이 되게 합니다. 아울러 물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물질은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믿습니다. 마음 놓고 탕감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원수와도 최고의 아름다운 춤을 함께 출 것을 상상하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 함께 희년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코뿔소는 심한 근시안을 가진 반면에 한번 뛰기 시작하면 시속 30마일 정확히는 48km의 속력이 붙는다고 합니다. 심한 근시안에다가 시속 30마일의 속도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얼마전 다시 한번 코뿔소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근시안의 정도는 30피트라고 합니다. 골프하시는 분들이 감을 잘 잡으실텐데 가끔 30피트 정도는 퍼팅(putting)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가끔 퍼팅으로 들어가는 그 거리가 코뿔소가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30피트 밖에 못 보는데 30마일의 속도로 달리다니, 한번 달리면 30피트에서 멈출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어디를 향하여 달릴까요? 코뿔소는 냄새나 소리를 듣고 달린 다는 것입니다. 앞에 무엇이 있던 소리가 들리거나 냄새가 나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코뿔소입니다. 그래서 코뿔소 떼를 크래쉬(crash)라고 부릅니다.

희년의 사람들도 코뿔소 떼가 아니겠습니까? 자유의 땅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자유의 땅을 가로 막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면서 자유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교우 여러분 저희 교회는 4년전 첫 희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로 제2의 희년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희년의 땅이 놓여 있습니다. 그 땅은 자유의 땅입니다. 빈부의 구별 없이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사는 땅입니다. 약자와 강자가 모두 같이 어울어져 함께 춤을 추는 땅입니다. 서로 서로 지난날을 모두 잊고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향하여 지난 4년간 걸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걸어 갈 것입니다. 그 걸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 우리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립니다. 아울러 주위에 있는 세상부조리와 모든 악한 것들은 우리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마지막 괴성을 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년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몇 분이나 제2의 희년을 땅위에서 맞이하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도 희년의 사람으로 사느냐’입니다. 자유를 위한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유의 땅을 향한 꿈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희년을 향한 발걸음 소리로 하여금 온 세상에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희년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 교우님들을 다시 한번 이 멋진 자유를 향한 행진에 초대합니다.

교우 여러분, 4년전 첫 희년을 맞이했던 보스톤 한인교회 교우 여러분 제2의 희년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함께 나아가십시다. 우리는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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