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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나그네 III

날짜 : 2007.10.1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예배하는 나그네 III
성경본문 : 창세기 32장 22절-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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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로부터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도 잘 다니고 가정도 잘 다스리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한 마디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늘 다음과 같은 말을 밥 먹듯이 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다음에 다시 이 땅에 태어난다면 나는 yuppie(좋은 직장을 갖고 결혼도 안하고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 위해 사는 사람)로 태어 날겁니다. 자녀문제, 교회 일, 사회의 빈곤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살 겁니다. 정기권(Season ticket)을 사서 어느 경기나 보러 다니고, 스키를 많이 탈 겁니다. 나만을 위해서 재미있게 살 거예요. 세상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할 겁니다.”

정말로 이 분처럼 교회에도 충실하고 가정생활은 물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고 하니 좀 이해가 안 되실 줄 압니다. 생각하면 좀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아주 솔직한 분 같습니다. 이분은 여러 면에서 사회적 규범이나 신앙적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범적 삶을 사신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어진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교회출석도 빠지지 않고 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삶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평생을 사신 것 같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읽은 후 저는 보스톤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한 그룹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에 잘 맞추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고백합니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yuppie로 태어나고 싶어.” 또 한 그룹은 처음부터 yuppie가 될 계획을 갖고 보스톤에 왔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아마 대개 보스톤에 사시는 분들이나 공부하러 오신 분들은 이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둘 다 바람직한 삶은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닐 줄 압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살아야할 바람직한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예배하는 나그네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학기가 시작할 무렵 곧 8월 마지막 주일과 9월 첫 주일에 이미 “예배하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새롭게 나그네가 되어서 이 곳에 찾아오신 분들이 인상 깊게 그 설교 말씀을 들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린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나그네로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 자리를 빌려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아울러 남은 나그네의 길 예배하는 나그네로서 멋진 길을 가시길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야곱도 yuppie가 되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 길을 가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yuppie가 되고도 남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형 에서로 가장하여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가 형에게 주려던 복을 가로챕니다. 야곱은 노력하지 않고 복만을 누리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전형적인 얌체입니다. 이 얌체 야곱은 끝내 형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도중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좋아하시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얌체됨을 개의치 않으시고 야곱의 예배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자기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얌체 야곱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야곱은 자기를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소유에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야곱은 예배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물론 얌체인 모습은 벗겨지지 않았지만…. 여기까지가 지난 두 차례에 걸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 다음 진행되는 내용을 말씀드리면, 야곱은 이제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어서 자신의 줄행랑을 계속합니다. 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부인도 얻고 많은 부를 쌓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부를 쌓았으면 라반의 집에서 편안히 살수 있었는데 얌체 야곱이 적당히 부를 쌓을 리가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차지합니다. 삼촌 라반이 위협을 느끼고 집에서 쫓아냅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걱정입니다. 형 에서를 볼 자신이 없습니다. 형의 축복을 다 빼앗았으니 말입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2절부터 몇 절 봉독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

야곱은 이제 홀로 남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홀로 해결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을 다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홀로 남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고비를 해결하게 위해서입니다. 좀더 미화시켜 표현한다면 예배하는 나그네가 된 자들은 때때로 홀로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혼자의 시간에서 많은 경험을 합니다. 야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홀로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씨름을 걸어옵니다. 24, 25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야곱이 혼자 있는데 씨름을 걸어 온 것입니다. 한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지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도 지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야곱’의 원래 뜻이 ‘발 뒷꿈치를 잡았다’는 뜻 아닙니까? 한 마디로 야곱은 지기 싫어하는 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기 싫어했습니다. 아니 한 번도 야곱은 져 본 적이 없습니다. 형 에서한테는 물론이거니와 삼촌 라반에게도 통쾌하게 승리하고 돌아오던 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씨름을 걸어 왔는데 지칠 줄 모르고 덤벼듭니다. 한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야곱이 가만 있을리가 없습니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은 이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동시에 기절하던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이 반칙을 범합니다. 씨름해서는 도저히 못 이기기겠으니 환도뼈를 쳤습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침을 통해서 그 사람은 항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항복하면 그냥 “항복” 말로하면 되지 왜 환도뼈를 칩니까? 그 사람은 야곱의 환도뼈를 침으로 반칙적으로 스스로 패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아니 야곱에게 평생 승리자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걸을 때마다 절뚝절뚝 하였을 것이고 그 때마다 자기는 승리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6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은 그 곳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고집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축복에 중독된 야곱이 쉽게 자기에게 진 사람을 거저 보내줄 리가 없습니다. 야곱은 누구에게나 복을 받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졌으니 당연히 자기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붙잡고 안 놓아줍니다. 27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축복은커녕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은 대답합니다. 당연히 “야곱이니이다.” 그런데 순간 야곱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자기가 자기 이름을 대는데 왜 철렁하느냐구요? 사실 자기의 이름을 대면서 가슴이 철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야곱은 전에 자기의 아버지 이삭이 “너는 누구냐?” 물었을 때 달리 대답했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대답했죠? “에서이니이다.” 야곱은 씨름에 이기고 자신감에 취해 있을 때 급소를 맞은 것입니다.

오래전 야곱은 복을 구하기 위하여 형 에서로 가장하고 눈먼 아버지 이삭에게 어머니가 해 준 별미를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었습니다. 창27:18절 이하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이에 야곱은 서슴치 않고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야곱은 이렇게 해서 에서로부터 복을 빼앗았습니다. 이렇게 복을 빼앗았기에 그동안 15년 이상을 삼촌집에서 고생하면서 살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얍복강에서 씨름하여 이긴 후 또 다시 복을 구한 것입니다. 그냥 복을 내려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사람은 물은 것입니다. 예배하는 나그네가 된 야곱에게 물은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버지 이삭은 속였지만 이 사람에게는 속일 필요도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이니이다” 대답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그토록 거짓으로 속이면서 살아 왔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에서에 대한 많은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그동안 자신을 속인 결과 타향살이에서 고생했던 것들,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통해서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참으로 복주시는 이 앞에서 자기의 이름을 되찾습니다. 자신을 되찾습니다. 더 이상 형의 이름을 사용하길 거절합니다. 그토록 싫어했던 ‘야곱’, ‘야곱’이라는 이름을 되찾습니다. 한국분들 중에 자녀 이름으로 야곱을 지은 분은 아직 한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모두다 야곱의 이아기는 좋아하면서 그 이름은 싫어하나 봅니다. 야곱도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예배하는 야곱이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 졌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예배하는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토록 에서를 이기려고 애를 썼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삶이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어 스스로 야곱이라고 고백할 때 그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을 때 야곱은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yuppie가 되려고 했던 야곱입니다.” 이 때 놀라운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No, no 너는 야곱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다.” 인간을 축복하는 분은 인간이 참 자신이 되었을 때 비로서 축복을 하실수 있는가 봅니다. 야곱이 야곱이 되었을 때 야곱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기는 자가 되었으면 됐지 무슨 더 귀한 축복이 있겠습니까? 야곱은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최고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하나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과연 나에게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분은 누구인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이에 그 사람은 대답합니다.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는 그냥 축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이름이 없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모를 야곱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 빛을 소유한 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최고의 영광된 삶을 시작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하는 나그네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찾아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름을 되찾게 해주시길 원하십니다. 한편 참 자신을 되찾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을 선물로 주십니다. 아니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십니다. 브니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남은 삶 비록 절름발이 걸음이지만 그 어디를 가도 브니엘의 선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교우 여러분, 앞으로 남은 나그네의 길에서 참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란 놀라운 이름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브니엘의 영광을 소유한 자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받은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야곱은 그 동안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나그네는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나그네로서 남들이 마련해 놓은 좋은 길이 어디 있나 찾아다니며 살아 왔습니다. 여기저기 물으면서 갈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남에게 빛을 비추는 자가 되었습니다. 브니엘의 영광을 본 야곱은 낯선 나그네들에게 당신이 소유한 브니엘의 선물을 나누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보스톤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어 참 나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학업과 업적은 참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못 사용하면 우리들의 마스크로 전락합니다. 도리어 우리의 참 모습을 잃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때만 우리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브니엘의 선물을 소유한 자가 됩니다.

한 경건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천사도 그를 보길 원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과거의 잘못을 잊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만 봅니다. 아니 이웃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루는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셨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받을 것이요. 무엇을 원하오? 남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원하오?”

“아뇨, 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고치시길 원합니다.”

“당신은 죄인들을 의로운 길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능력을 원하오?”

“아뇨, 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천사들이 하여야 할 줄 압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의 모범이 되는 자가 되길 원하오?”

“아뇨 그러면 제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원하오?”

“하나님의 은혜면 만족합니다.”

“아니 당신은 기적을 구하여야 한다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이나 주어질 것이오.”

“그러면 이것을 원하겠습니다. 선행이 행해지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게 저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래서 이 사람의 그림자에 능력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자가 닿는 곳마다 아픈 자들이 일어나고 땅이 비옥해지고 샘물이 솟고, 슬픔의 얼굴빛이 기쁨의 빛으로 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람 때문인지 몰랐습니다. 이 사람도 몰랐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바로 브니엘의 선물을 안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니엘의 사람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면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로만 만족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떤 아름다운 자취를 남겼는지 모릅니다. 이웃도 그 사람이 남긴 자취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이러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아무도 모르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릅니다. 땅이 비옥해집니다. 이 사람들이 방문한 가정에는 천사가 들끓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자기는 브니엘의 선물을 안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브니엘의 선물이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는 자기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 브니엘의 빛을 보게 됩니다.

어제도 아침기도회를 하는데 저의 머리 속은 복잡했습니다. “오늘 기도회가 끝나면 교역자회의가 있고 그 것이 끝나면 설교를 마쳐서 빨리 동시 통역자에게 보내야하고 그것이 끝나면 심방도 가야하는데 오늘 하루 무사히 잘 보내려나?”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에서의 생각이었습니다. 참 자신을 잃은 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기도 중에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늘도 나는 나의 하는 일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기적을 일으키시겠지. 브니엘의 축복을 여기저기 새로이 창조하시겠지.”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보스톤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브니엘의 선물을 나누는 자가 되게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학업과 업적은 삶의 도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 학업과 업적이 삶의 도구가 될까요? 우리의 참 이름을 고백할 때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고백한다면 우리들은 어디를 가나 나도 모르게 브니엘의 빛을 비추는 자가 됩니다. 길을 잃은 나그네들이 그 빛을 통하여 길과 진리이신 주님께 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서 삶의 희망을 얻는 분들이 오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시각장애자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모든 버스의 번호와 노선이 바뀌는 날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다음 날 학교 가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이 엊그제 등록한 영어학원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적정을 하며 정거장에 갔습니다. “아이참, 아침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을 붙잡고 번호를 묻는 것도 미안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담….” 주저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 죄송한데요. 제가 눈이 좀 불편하거든요. 606번 버스 오면 제게 좀 알려 주세요.” 혹 귀찮아 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버스 승차 도우미를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을 짐작해서 정류장마다 승차 도우미를 배정하여 사람들을 안내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학생이 돈을 받고 일했어도 관계없습니다. 바로 승차 도우미들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야곱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도우미로 인해서 시각장애인 학생의 마음속에 깊은 감사가 남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우미 학생은 이 시각장애인을 전혀 기억도 못했을 것입니다. 본인은 전혀 기억조차 못하지만 상대방은 그 일이 기억남아 이처럼 글을 써서 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브니엘의 영광을 소유한 자들은 이러하지 않을까요?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준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의 가슴에 남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최고의 날입니다. 그래서 브니엘의 사람들은 언젠가 yuppie가 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리를 절어도 말입니다.

남들에게는 다리가 저는 것만 보입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가운데 이웃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삶을 그들은 살아갑니다. 이것이 브니엘의 사람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나그네 길 예배하는 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어느날 “너는 누구냐?” 묻거든, 대답하십시다. “나는 얌체 야곱이니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브니엘의 영광을 소유한 자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얌체 야곱입니다. 아울러 브니엘의 사람들입니다. 얌체인 우리를 브니엘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얌체 야곱입니다.” 아울러 예배를 마치며 우리는 주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은혜로 우리는 브니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도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그네 되신 교우 여러분,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 중 종종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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