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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선물

날짜 : 2007.03.1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사순절의 선물
성경본문 : 로마서 5:1-11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3-11-2007.wmv

사순절이니 만큼 어려운 질문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사탄이라면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습니다.

“나는 이세상의 최강대국을 좌지 우지할 것입니다. 나는 그 국민들에게 자기들의 번성의 이유는 자신들의 노력의 댓가이었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물질을 섬기게 할 것이고 사람들을 이용하게끔 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참 지도력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돈과 권력에서 나온다고 생각을 하게 알 것입니다. 나는 태어나지 않은 태아는 죽이는 것은 합법적이다고 주장하게 할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동물의 위상을 높일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공공학교에서 언급하지 못하게 할것입니다. 나는 마약을 창궐케 해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피폐케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운동선수들을 우상화시켜서 그들을 광고에 많이 사용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방송계를 내 마음대로 조정하여 가정마다 내가 원하는 것들에 빠져들게 만들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근간인 가정을 파괴시킬 것입니다. 나는 이혼을 멋있게 보이게 만들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환상속에 있는 온갖 추한것들을 그림과 영화로 만들게 할 것입니다. 또한 이 것을 예술이라 부르게 할 것입니다. 나는 옳고 그름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나는 교회는 더 이상 현대와는 맞지 않은 전근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만연케할 것입니다. 성경은 순진하고 무지한 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간주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챤들의 마음을 혼동시켜서 기도는 중요하지 않고 충성과 순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후 끝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벌써 내가 생각하는대로 되어 있군요.”

아마 이 생각을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이 이미 자기가 사는 미국 안에 이루워지고 있음을 보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되어 있군요.”

결국 이 분은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미국처럼 자본주의에 깊게 빠져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들은 어쩌면 사탄이 좋아하는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분의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골랐는데 복음서 기자들도 이 분의 견해에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광야 40일의 생활을 본보기로 지키는 것임을 자주 말씀드렸는데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의 시험 장면을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세번째 시험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사탄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탄이 마지막 세번째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온 세상권력과 영화를 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거절하셨지만…. 마태복음 기자는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세상 모든 것을 주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강대국을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합니다. 원하는 것은 다 갖게 합니다. 자기를 경배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사탄에게 이러한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 세번째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우리가 기도와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혹시 사탄이 좋아하는 기도의 내용은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사순절을 지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 한국에사는 사람들을 평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미, 반미” 한다고 합니다. 미국을 무지 싫어하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영어 공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열심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미국을 겉으로는 싫어하지만 미국의 부귀 영화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미국식으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일등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같지 않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 마음으로는 사탄의 축복을 사모합니다. 사탄이 주는 세상적 영광을 사모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을 사탄 왕국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심각한 질문이 떠 오릅니다. 세상적인 영광은 모두 사탄에게서 온 것인가요? 그 동안 이룩한 세상적인 업적은 사탄을 경배한 결과인가요?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일 할 필요도 없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사순절은 기도와 절제의 생활을 하는 것인데 절제 중에 공부를 절제하고 일을 절제하는 것이 함께 들어가야 하지 않으까요? 사실 이번 사순절에 이런 고민 한 번 하는 것 너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번 주간 이런 고민을 하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는 것 큰 의미가 있을줄 압니다. 이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도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8절 말씀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 말씀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곧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지 않고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은 완연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인류 구원 역사에 너무도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을 소개하면서 본문 앞뒤로 중요한 주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시작해서 같은 주제로 마칩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10절 하반절과 11절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과 마지막은 같은 주제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말씀에는 크게 두가지 주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삶이요 또 하나는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두 주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두 주제를 하나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 주제를 연결시켜 보면 한 결론에 쉽게 도달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삶은 주님의 죽으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안에서 즐거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삶은 어떤 삶인지 궁금해 집니다. 어떤 분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나는 세상적인 축복을 차지 했을 때에야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그 때야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바울은 주님의 죽으심과 연관해서 결코 세상적인 축복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도바울은 세상축복을 받은자라야 하나님과 화목한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축복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못 된다라고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전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세상적인 축복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을 할 때 때때로 부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결코 세상적인 부를 나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의 삶을 부로 직접 연결시키고 있지도 않습니다.

반면 3절에서 5절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의 모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마지막 귀절이 눈에 띄입니다. 이 말씀을 좀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난다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곧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세상적인 영광을 소유했건 못했건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쩔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세상영광을 가득 받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날까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 살난 사라(Sarah)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다리에 근육이 하나 없이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브레이스(brace)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봄날 방과후 부모님께 와서 오늘 학교에서 육상 경기를 했다고 신나게 말씀드렸습니다. 두 경기에서 이겼다고 말합니다. 부모들은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사라는 계속 말합니다. “나는 유리한 점이 있었어.” 부모들은 그 말을 듣고 선생님이 먼저 뛰게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부모들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계속 말합니다. “나는 먼저 뛰지 않았어, 나의 유리한 점은 나는 더 열심히 뛰었어야 했던거예요 (I had to try harder).”

저는 이 소녀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쩔여 있는 모습을 느낍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의 모습도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이 소녀가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환난 가운데서 인내하고 그 결과 연단을 이루고 그 결과 소망을 품으며 또한 소망중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I had to try harder.” 고백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에는 세상 영광을 가득 받은 사람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나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도리어 “더 열심히 뛰어야 했어” 고백하는 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물씬 거리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향하여 뛰느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되는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향하여 뛰어야 할지를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죄인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원수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고백하셨습니다. “I have to try harder(나는 열심히 뛰어야 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I have to try harder”하시며 죽으시는 모습이 바로 인간을 향한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의 모습도 확연해졌습니다. 세상적인 축복으로 기름이 줄줄 흐르며 사는 것이 하나님과 화해한 모습은 아닙니다. 아니 세상적인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화해가 안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전혀 이것과는 연관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열심히 뛰어야 했어” 고백하는 삶을 사는냐 안 사는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났으며 주님은 죽으시면서 외치셨던 것이니다. “I had to try harder.”

그런데 주님은 세상 물질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들을 향하여 뛰어 가다가 “I had to try harder” 외쳐야 합니다. 외치며 쓰러져야 합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시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시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원수된 자들을 용서하시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I had to try harder.”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고백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에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 또 다시 세상적 영광을 구하여야 할까요? 사실, 하나님은 이 최고의 사랑의 고백을 바로 당신과 화해한 자들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또한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최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난 주 3월 8일에 인디아나폴리스(Indiannapolis) 교외에 있는 집에 불이 났습니다. 80살난 두 노인이 사는 집입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두 노인은 침대에서 곤히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집에 불이 나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래씨(Lessie)라는 개가 있었는데 이 개도 함께 잠을 자다가 먼저 깨어 났습니다. 래씨는 주인들을 깨우려고 멍멍 요란하게 짖어댔고, 두 주인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두 주인은 무사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래씨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참 사순절의 의미를 보여주면서 래씨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래씨는 “I have tot ry harder.” 고백하다 죽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그는 최고의 견생을 산 것입니다. 래씨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할 모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도 혼자 설수 없는 자들을 생각하며 여기 저기 뛰어 다니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I had to try harder” 외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도 구원의 길을 모르고 길잃은 자들을 찾아 다니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I had to try harder” 외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된 자를 찾아다니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I had to try harder” 외친다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냄새가 물씬 물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도 이 고백의 주인공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웃을 생각하며 “나는 열심히 뛰었어야 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됩니다.

지난 주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무개 목사입니다.”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니 곧 바로 지난 번 아틀란타(Atlanta)에서 저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억이 안 났습니다. 곧 이어 용건을 말하는데 제 이름을 Bethany장로교회 소개 문서에서 보았다면서 현재 교회를 찾고 있는데 Bethany교회에 대해서 알아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대로 Bethany 교회는 목사님을 찾고 있긴하지만 영어회중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실망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저의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하고 계속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양심의 소리가 느껴졌습니다. “너는 그에게 너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이 분은 혼자서 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디를 알아 봐줄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최근 한국에 가서도 저에게 목회지를 알아 봐 달라는 후배의 부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곧 후배가 생각이 나면서 “너는 후배를 위해서 또한 이목사를 위해서 아무 책임이 없는 줄 아느냐? 그들은 혼자 설수 없는 사람들이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생각만 나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분을 위해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혼자 설 수 없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들을 향하여 열정을 안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열정적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직 예수를 안 믿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 사업체에 안 믿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분들의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요즘 쉐마의 밤마다 저희가 Brookline 주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줄로 압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과 관계가 안 좋은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분들에게까지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혼자 설 수 없는 분들, 죄인들, 우리들의 원수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몸소 위하여 죽으신 이들을 우리가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이들을 위하여 “I had to try harder” 외치며 사랑할 때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지 않을까요? 그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선물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은 우리가 세상의 영광을 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에게 세상 영광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세상 영광을 위하여 구한 후 느낌이 어떻습니까? 열심히 구하자마자는 곧 이루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곧 바로 의심의 구름이 어김 없이 찾아 옵니다. 마음의 평강이 없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고….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은 당신이 위하여 십자가를 진 영혼을 위하여 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늘 초라한 인간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체험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들을 “I had to try harder”하며 사랑해 보십시다. 신비한 체험을 할 것입니다. 놀라운 평강을 맛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이 선물을 누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 저나름대로 오늘 설교에 맞추어 짧은 글을 지어 보았습니다.

“혼자 설 수 없는 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길 잃은 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화해하길 원하는 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선물입니다.”

이 사순절의 선물을 소유한 자들은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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