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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

날짜 : 2007.03.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
성경본문 : 히브리서 11: 32-40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에 한 젊은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산당을 피해 피난 내려 왔던 피난민이었습니다. 마침 서울마저 공산군에 함락되고 말았을 때입니다. 그는 간신히 공산군 진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 왔습니다. 다행히 미군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를 공산군 스파이로 판단했습니다. 그를 포로로 잡아서 수용소에 감금했습니다. 교회에서 그 소식을 알게된 후 교인들은 그를 석방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거절 당했습니다. 미군들에 의해 거절 당한 것이 아니라 본인에 의해 거절 당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감옥생활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포로들이 고생하는 것을 본 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 곳에 들어 온 이유는 이 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곧 그는 이 들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밤낮으로 포로들을 돌봅니다. 자기도 하나의 포로가 되어서…. 결국 그는 영양실조와 과로로 인해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장례식에서 한 사람이 두꺼운 편지봉투를 놓고 갔습니다. 중국 포로들의 편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그의 선행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진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전하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중국군인들은 중국으로 돌아 갔습니다. 중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가족과 친구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상황도 어려웠지만 그들은 전심을 다해 예수가 누구인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위순맹이라는 군인은 새로운 선교전략을 세워서 중국선교를 계속했습니다. 이 당시는 이미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당하고 교회는 모두 문을 닫았던 때였습니다. 새로운 선교사역이 필요했던 된 것입니다. 신학생을 통해 주님을 영접한 한 중국군인으로 인해 새로운 선교의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복음 전파의 사역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 이곳 보스톤에서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으로 하는 conference가 이 지역 신학교에서 열렸었는데 어느 강의 시간에 들은 이야기 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타 올랐습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도 이런 숨은 분들이 계시구나.” 그 신학생의 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행적은 기억이 되었고 그 행적으로 인해 중국 선교는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섬김이 이처럼 놀라운 결실을 가져오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한채 쓸쓸히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놀라운 자취를 남겼습니다.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사순절은 주님의 40일 광야생활을 본을 받아 주님의 고난의 시간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기 위하여 기도와 구제와 금식으로 지내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 우리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참 자신을 다시 찾는 것일줄 압니다. 이 번 사순절기간 우리들의 참 모습을 재 확인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참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방금 말씀드린 젊은 신학생은 참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석방도 스스로 포기합니다. 참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신학생처럼 우리들의 참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 믿는 자들의 참 모습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3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믿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신학생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으십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러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특징을 알 때 우리는 바른 회개를 할수있게 될줄 압니다. 바르게 사순절을 보내게 될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워지는 히브리서 11장입니다. 11장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멋진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아벨과 에녹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거쳐서 모세의 믿음등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멋진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 전인 31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의 첫 절인32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곧 모세 이후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뭉뚱 그려서 소개합니다. 어떻게 보면 33절이하의 내용은 모세 이후의 사람들의 믿음의 모습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벨 이후 모든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을 새로이 정리했다고 해도 무난할줄 압니다. 곧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소개되어 지고 있습니다.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문단으로 나누워져 있습니다. 첫 문단은 33절에서 35절 중반까지이고 둘째 문단은 35절 후반부터 38절까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 특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문단을 다시한번 봉독해 드릴까요?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한 마디로 승리하는 모습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자의 입을 막기도 했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퍼맨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순절을 잘 지키노라면 진실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명상하노라면 우리들에게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아니 이미 주워진 것을 회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워진 첫 번째 것은 바로 이와같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때로는 수퍼맨과 같은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위에 열거된 여러가지 능력을 한 사람이 모두 누린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자의 입은 막았습니다. 그러나 불의 세력을 막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니 부활로 가족을 다시 찾지는 못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의 입은 막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진 못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곧 어떤 면에서는 수퍼맨이 되어 있으나 모든 면에서 수퍼맨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 그 때마다 필요한 대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수퍼맨이 되게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교우여러분, 믿는 자들에게는 이처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의 세력을 막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아니 임하여 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해서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능력을 새로이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후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뜨겁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 분에게 놀라운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 분은 차를 타고 가다가 길에 서 있는 어떤 분에게 무엇인가 느끼면 무조건 차에서 내려서 그분에게 갑니다. 가서 예수를 전합니다.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전도의 놀라운 은사가 주어진 분입니다.

조금 다른 케이스의 사람을 소개해 드릴까요? 저의 대학교 친구입니다. 물론 의사입니다. 한번은 이 곳 보스톤에 왔을 때 저를 찾아 왔습니다. 저에게 자기 여동생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동생도 의사인데 한국에서 아주 잘 나가는 의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나가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자기 동생은 신앙이 좋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친구도 신앙이 좋은 의사입니다.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 동생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아주 부러운 것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꿈에 논문 주제와 제목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하나 끝나면 또 다음 것을 할 계획이 언제나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축복을 주셨다고 저에게 간증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하나님께서 동생에게만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 친구에게는 다른 축복을 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 친구도 그 축복을 원하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 모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뿐일까요? 믿는 자들은 모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는데 당신을 믿는 자들에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모두에게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단지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아니 이미 그 은사를 체험한 분들에게는 하나님과 본인만 아십니다. 분명한 것은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은 그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믿으십시다. 많은 경우 우리가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믿음을 안고 십자가의 주님께 나아 갑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안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두 번째 특징이 주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번째 모습을 소개합니다. 35절 중반에서부터 38절 말씀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두 번째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 보면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자들임을 소개합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젊은 신학생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자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번째 모습을 진정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은 세상의 기준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은 세상의 기준을 초월해서 사는 자의 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이 두가지가 다 주어집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실상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번째 대목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는 실상 이 두번째 모습이 진정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이 두가지 모습을 다 갖고 계신 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올 해 수퍼볼 우승팀의 코치인 Tony Dungy씨가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두가지를 다 갖고 계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퍼볼 경기를 마친 다음 날 조찬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코치는 세 아들이 있는데 세 아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웠다고 고백을 합니다. 첫째 아들은 자기를 꼭 닮았는데 자기처럼 무척 경쟁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향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처럼 성공적인 코치로 만든 것을 감사하는 그는 또한 경쟁심이 많은 자기를 닮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전폭적인 능력으로 놀랍게 변화시키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변화시키실 것을 믿는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믿음입니까? 당신 아들을 통해서 이러한 믿음이 생겼다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 아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한 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과자를 오븐에 구우면 혼자서 오븐을 열고 손으로 과자를 꺼냅니다. 물론 손은 지글지글 탑니다. 그러나 타는 것도 모릅니다. 곧 이어 꺼낸 아직도 뜨거운 과자를 입에다가 넣습니다. 혀와 입안이 모두 헐게 됩니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들의 고통을 모르는 병을 통해서 인간에게 고통을 느끼는 것은 큰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을 온전하게 성장시킴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로 인해 그는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두 째 아들의 고통을 통해서 고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그에게 말할수 없는 고통이 찾아 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얼마전 세번째 아들James, 사실 이 아들이 맏아들입니다만, 이 아들이 자살을 합니다. 제임스는 크리스챤입니다. 제임스는 누구보다 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많았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늘 안타까운 마음을 소유한 아들이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세상 돌아가는 것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코치는 씨즌 한창 때이지만 어쩔수 없이 게임을 포기하고 장례식에 참여합니다.

장례식 후 어떤 편지를 받습니다. 제임스의 친구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같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며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저는 제임스의 친구라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되어지는 모든 것을 보고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분들의 표정과 감사의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나는 그 후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코치와 그의 가족은 예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깊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Tony Dungy는 세상의 기준으로 승리자였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수퍼볼 우승 코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 보다 더 큰 것은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가장 슬픈 장례식을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축제의 마당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요즘 세상에는 많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학문에서나 예술에서나 사업에서나 그 무엇을 하시던 그 안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속한 분야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개개인마다 다 다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의 기준을 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함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Tony Dungy가 수퍼볼에서 이기게 하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진실로 세상을 이긴 자임을 보여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그가 수퍼볼뿐 아니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세상 기준을 넘어선 자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Tony Dungy는 어떻게 이러한 최고의 크리스챤이 될수 있었을까요?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자들은 세상 기준을 넘는 자들이 됩니다. 아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세상 기준을 넘어 서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기준을 넘으신 분을 묵상할 때 우리도 세상기준을 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기준을 넘어선 사람들을 하나님은 또한 세상기준 안에서도 승리하는 자로 만드시지 않으실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류를 향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감당치 못하게 하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39, 40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실 히브리서기자가 열거한 구약의 모든 인물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거는 받았습니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오셔서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는 증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고난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주인공들은 많은 고난의 증거를 보았지만 더 좋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더 좋은 것은 히브리서기자를 포함한 예수님 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보여졌습니다. 아니 이들을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교우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옛 믿음의 선조들은 그토록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희미한 증거만 보았을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을 통해서만 보게 됩니다. 사실 저는 우리를 통해서만 본다니 무슨 뜻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믿음의 선조들은 하늘 나라에 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본 것은 땅위에서 못박히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자국은 볼수 있으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 모습을 볼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주님의 고난을 목격한 십자가를 본 사람들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말해 주어야지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상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좇아오면서 “그래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 나에게 좀 얘기해줘” 예수님 전에 하늘나라에 올라 온 사람들은 천국문에 서서 들어 오는 사람들마다 물어 볼 것입니다. “자기가 본 십자가는 어떠했어?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어? 가시면류관은 얼마나 컸어? 예수님의 피 색깔은 어떠했고? 예수님의 표정은…?” 곧 우리들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여러분, 천국에 올라가면 더 이상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만 주님의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만난 주님의 모습을 안고 우리는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안고 영광의 주님의 뵈올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모습을 깊이 느낀 고통을 안고 주님을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보지 못했던 분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이 땅에 태어난 우리와 같은 자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함을 통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옛 믿음의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더 좋은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묵상함을 통해서 이 선물을 받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크리스챤의 참 모습입니다. 미래에는 우리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 십자가를 맛 볼 것입니다. 아울러 이 땅에서는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이 전해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소년이 누나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누나, 사람이 하나님을 볼수 있어?” 누나는 귀챦다는 듯이 “하나님은 저 위에 계서 누가 볼수있겠어.” 잠시 후 엄마에 가서 물었습니다. “ 엄마, 사람이 하나님을 볼수 있어요?” “아니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란다. 어떻게 볼수 있겠니.” 할아버지가 소년을 데리고 낚시를 나갔습니다. 노을이 화려한 빛을 띄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할아버지는 깊은 명상에 잠깁니다. 소년이 다시 잊었던 질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하나님을 볼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손자야, 나는 지금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닥아가고 있다. 다른 것은 전혀 안 보여.”

저녁 노을을 통한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가니 다른 빛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빛에 가까이 간다면 다른 빛을 느낄수 있을까?’

교우 여러분, 사순절 기간 주님의 고난의 장면에 가까이 닥아 서십시다. 그래서 다른 장면이 보이지 않도록…. 세상일들이 주님의 고난의 장면 뒤로 사라져가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창이 허리를 찌르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핏방울이 땅에 떨어져 스며드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여인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옵니다. 로마군병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 소리들 사이로 세상의 모든 소리는 다 사라졌습니다. 아울러 그 소리의 사라짐과 함께 우리의 지은 죄도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번 사순절 기간 이러한 체험을 하십시다. 이러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우리를 향한 음성을 들으십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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